이번 주, 넷플릭스 <솔로지옥5> 마지막회를 보면서 멈칫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최미나수가 샘(이성훈)에게 건넨 고백의 순간이었는데요.
"I can't imagine leaving this place unless it's...sam"(이곳을 떠나는 건 상상이 안 가. 너와 함께가 아니라면 말야, 샘.)

툭 내뱉은 영어 고백 끝에 이어진 최미나수의 미소는 그야말로 정말,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았나요? 에디터로서 이 장면이 작위적이지 않게 느껴진 이유는 언어 속에 담긴 정서적 밀도 때문이었어요. 한국어와 영어를 혼용하는 그들만의 방식은 타인은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세계를 형성하는 장치였으니까요. 가장 익숙한 언어로 건넨 고백은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솔직함이었습니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미나수. 그녀가 조건부 호감 대신 자신의 꾸밈없는 모습에 귀 기울여준 이를 선택한 그 순간. 결국 사랑은 나를 온전하게 '나답게' 만드는 이에게 정착하는 과정임을, 제작진은 최미나수의 고백으로 보여준 게 아닐까요.
나의 세계를 담는 그릇, 언어

최미나수의 고백에서 떠오르는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2024)>의 아서가 했던 말인데요.
"가끔은 그게 겁나. 당신이 내가 이해 못 하는 말로 꿈꾸는 것. 당신 마음속에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미국인 남편 아서는 아내 나영의 한국어 잠꼬대를 들으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에게 한국어는 아내의 가장 깊은 무의식, 즉 자신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죠.
최미나수에게 영어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이 가진 한국어와 같은 위치일 겁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언어, 내가 나로서 가장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정서적 모국어 말이에요. 그렇게 보면 그녀가 고백의 순간 영어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편해서가 아니라 "이게 진짜 나야"라고 자신의 가장 깊은 방 문을 열어준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랑은 결국, 나의 가장 내밀한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이니까요.
그/그녀와 함께 있는 '나'의 모습이 좋은가요?

하지만 이 장면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 진짜 이유는 언어 그 너머에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보다 너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나오는 것 같다"는 그녀의 고백에서 알 수 있어요.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질 때 상대의 조건을 먼저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얼마나 다정한지, 얼마나 능력이 좋은지 말이에요. 하지만 최미나수의 고백은 그 화살표를 상대가 아닌 '나'에게로 돌려놓습니다.
이 지점에선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금명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나수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이별을 고했던 그녀의 대사는 지금 봐도 아프게 다가와요.
"나는 니가 너무 좋은데 나도 너무 좋아."
금명의 연인 영범은 나쁜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금명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을 홀대하는 그의 가족과 유약한 영범 사이에서 자꾸만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곧 자신을 위한 결단을 내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기로 한 것이죠.
금명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이별을 택했다면, 미나수는 나를 완성하기 위해 사랑을 택했습니다. 두 선택은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같아요. 사랑이란,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가가 아니라 그 사람 곁에 있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는가에 달려 있다는 거죠.
이성과 감성으로 읽는 사랑
이 지점에서 소설 한 권을 통해 미나수의 선택을 복기해 볼까요.
바로 양귀자의 소설 <모순> 속 안진진의 선택입니다. 그녀는 낭만적인 김장우 대신, 계획적이고 조금은 지루한 나영규를 결혼 상대로 택하죠. 많은 독자들이 의아함을 품었지만 이 선택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김장우 앞에선 솔직할 수 없었지만, 나영규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요.

안진진은 '자신을 설레게 하는 남자' 대신 '나를 솔직하게 하는 남자'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 선택은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사랑의 방식이었을지도 몰라요. 미나수가 샘을 선택한 것 역시, 그 앞에서의 내 모습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가장 편안하고 ‘미나수다운’ 모습이었기 때문 아닐까요?
에디터의 시선: 결국, 나를 잃지 않는다는 것

에세이 <그 시절의 이름들>을 집필하며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고민 역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누군가의 아들과 딸, 또는 누군가의 연인, 혹은 어떤 직함을 가진 사회인. 그 수많은 호명 속에서 우리는 종종 진짜 '나'를 잃어버리곤 하니까요.
책 속에서 저는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내가 나를 잃지 않으면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중략) 그때라면 결혼이라는 결심이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문장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원칙이기도 해요. 좋은 관계란 '자기다움'을 유지하면서 상호보완해나가는 것이지,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니까요. 상대의 빛에 눈이 멀어 내 반짝임을 잊지 마세요. 대신, 그 빛을 받아 더 환하게 빛나는 나를 발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때때로 우리 삶의 장르를 바꿉니다. 그리고 그 속에 주연 배우로 등장하는 우리 자신을 때로는 더 근사한 사람으로, 때로는 더 초라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죠.
부디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리얼리티 쇼라는 날것의 장르를 단숨에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로 뒤바꾼, 최미나수의 그 환한 미소처럼 말이죠.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소설 | 양귀자, <모순> 사랑에 빠진 김장우와 나를 나답게 해주는 나영규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진진. 그녀의 선택을 통해 사랑과 인생의 모순을 들여다봅니다.
에세이 | 소서, <그 시절의 이름들> 우리가 지나온 시간 속, 나를 잃지 않고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누군가와 함께할 때 가장 빛났던 시절의 이름들을 복기하며,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Coming Soon] 대중문화로 나를 읽는 시간, <에디터 소서의 대중문화 클럽>
드라마 속 한 장면, 영화의 대사 한 줄에서 내 삶의 문장을 발견한 적 있나요? 혼자만 간직하기엔 아까운 그 감상들, 이제 함께 나누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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