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일지라도, 끝내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2026.03.13 | 조회 142 |
0
|

*각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 구해주거나 운명적인 사랑이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주는 식의 이야기가 참 많았죠. 하지만 최근 작품들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의 관계들이 눈에 띕니다. 내 삶을 드라마틱하게 구원해 주는 백마 탄 기사보다는,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오늘 하루를 같이 버텨주는 동료나 연대자의 존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는 걸 자주 보게 돼요. 아주 희미한 빛일지라도, 끝내 인물을 혼자 남겨두지 않는 관계들 말이에요. 

일터의 생존기부터 사회적 고발까지, 연대하는 사람들

최근 제 마음에 와닿은 두 작품, tvN <언더커버 미쓰홍>ENA <아너>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두 작품은 분위기가 꽤 다릅니다. <언더커버 미쓰홍>이 1997년 증권가라는 척박한 남성 중심 조직 안에서 여성들이 어떻게든 살아남는 '생활형 연대'를 보여준다면, <아너>는 성폭력 피해와 증언, 법적 대응을 둘러싼 '증언형 연대'를 그리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두 작품을 정주행하고 나면 비슷한 감각, 어떤 뭉클함이 남습니다. 인물들이 더 이상 누군가의 구원을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 때문일 거예요.

 

'미쓰'라 불리던 시대, 서로를 놓지 않는 여성들

첨부 이미지

 

<언더커버 미쓰홍>은 시작부터 그 시절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환기합니다. "97년, 여직원의 이름 석 자가 아닌 '미쓰'라고 퉁치던 세기말"이라는 내레이션 한 줄이 시대상을 단번에 보여주죠. 이름 대신 호칭으로 불리고, 개인의 능력보다 성별로 먼저 나뉘던 조직 문화.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시대적 배경을 단순한 레트로 감성으로 소비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안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어떻게 붙들어주었는지를 따뜻하게 비춥니다.

이 작품이 특히 좋은 건 연대라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아서예요. 같이 밥을 먹고, 상대방이 힘든 걸 먼저 눈치채주고, 위태로워 보일 때 모른 척 지나치지 않는 식이죠. 홍금보(박신혜)를 중심으로 기숙사에서 만난 여성들이 쌓아가는 관계가 유독 와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연대는 대단한 선언이라기보다는 일상의 다정한 태도에 가깝거든요. 힘들고 지치기 쉬운 상황에서도 끝내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태도요.

솔직히 현실을 사는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구해내는 영웅이 되기는 참 어렵잖아요. 하지만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동료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못 본 척하지 않는 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죠. <언더커버 미쓰홍>은 바로 그 작고 소박한 행동들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거대한 버팀목이 되는지를 짚어줍니다.

 

"우리도 거기 있을게"라는 말의 무게

첨부 이미지

 

반면 <아너>는 좀 더 직접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관계의 힘을 보여줘요. 극 중에서 윤라영(이나영)은 20년 전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고, 비밀 성매매 앱 '커넥트인'을 폭로하며 큰 파장을 일으키죠. 그리고 그 떨리는 목소리에 수많은 피해자와 시민들이 응답하기 시작합니다.

이 드라마가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단지 악당을 무찌르는 통쾌함만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던 사람이 마침내 입을 여는 그 첫 순간도 눈물겹지만, 그 용기 낸 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게 꽉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제겐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무언가를 고발하는 일은 흔히 한 사람의 엄청난 용기로만 포장되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다음 장면이잖아요. 그 외침이 외로운 혼잣말로 남지 않도록, 함께 분노하고 함께 감당하겠다고 곁에 서주는 사람들의 응답 말입니다.

그래서 라영이 자신의 아픈 기억을 털어놓았을 때, 강신재(정은채)가 건넨 "우리도 거기 있을게"라는 말이 유독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이건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죠. 다 잊으라거나 혼자서 이겨내라는 빈말 대신, 그 끔찍한 고통을 당신 혼자만의 몫으로 두지 않겠다는 약속이니까요. <아너>가 말하는 관계의 힘은 누군가의 상처를 마법처럼 없애주는 게 아니라, 그 무거운 상처를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는 데 있습니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첨부 이미지

 

드라마가 주는 여운 속에서, 자연스레 최은영 작가의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생각났습니다. 이 작품은 십 년 전 편입생이었던 '나'와 강사였던 '그녀'의 시간을 조용히 따라가는 이야기를 그렸어요. 바지에 생리혈이 묻어 당황했던 순간,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 그리고 한동안 나의 롤모델이자 길잡이처럼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시간들까지, 그 모든 것은 앞서 '연대'를 이야기했던 드라마 두 편을 떠올리게 했죠. 작품 속 '나'는 앞이 캄캄하고 막막할 때, 내 앞에서 묵묵히 먼저 걸어가 주는 존재의 감각을 섬세하게 붙잡거든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소설 속 '나'의 말처럼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그토록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쫓고 싶었는지 모른다"는 '나'의 고백은 앞서 말한 두 드라마 속 인물들의 모습과도 포개어집니다. 비록 완벽한 구원은 아닐지라도, 기꺼이 서로의 곁에서 작고 희미한 빛이 되어주는 관계의 소중함을 말해주니까요.

 

에디터의 시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힘

첨부 이미지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도 결국 이 '곁에 있는 사람들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내 삶의 골칫거리들을 단숨에 날려버릴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의 의지로 삶의 파도를 버텨내기엔 벅찰 때가 참 많으니까요. 제 에세이 <그 시절의 이름들>을 쓰면서도 그런 다정한 존재들을 유독 많이 떠올렸습니다. 거창한 구원이 아니어도, 내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기꺼이 어깨를 내어준 사람들이 제 삶의 고비마다 있었거든요. 사회 초년생 시절,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자책하던 저에게 "공감성 콘텐츠를 잘 만드는구나"라며 장점을 먼저 발견해 준 동기 언니가 그랬습니다. 지친 하루 속, 언니가 건넨 달콤한 달고나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고요.

집안 문제로 마음이 지옥 같아 잠 못 이루던 시절,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직접 만든 빵을 나누어주며 위로가 되어준 '봄날의 햇살' 같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또,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안개 속을 걷던 날, "내가 뒤에서 밀어줄게. 당신은 당신의 북극성을 따라가"라며 쪽지를 남겨준 연인의 다정함도 빼놓을 수 없고요.

<언더커버 미쓰홍>의 진솔한 생활형 연대부터 <아너>의 묵직한 증언형 연대, 그리고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비춰주는 등불까지.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고 제 삶의 페이지들을 넘기다 보면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을 진짜로 숨 쉬게 만드는 건 나를 완벽하게 구원해 줄 누군가가 아니라, 비틀거리는 순간에도 내 곁을 지켜주는 곁의 사람들이란 걸요. 아주 희미할지라도, 끝내 꺼지지 않는 빛처럼 말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작품

드라마 | <언더커버 미쓰홍>

‘미쓰’라 불리던 시대, 여성들이 팍팍한 생활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따뜻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는지 보여주는 작품.

드라마 | <아너>

힘겹게 꺼낸 고통의 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도록, 곁에서 그 무게를 함께 나누는 관계의 의미를 묻는 작품.

소설 |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누군가가 내 앞에서 먼저 걸어준 기억, 그리고 그 희미한 빛이 삶에 어떤 의미로 남는지 돌아보게 하는 작품.

에세이 | 소서, <그 시절의 이름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 속에서 잊고 지냈던 다정한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며 삶의 빛나는 순간들을 되짚어보는 작품.

 

[Coming Soon] 대중문화로 나를 읽는 시간, <에디터 소서의 대중문화 클럽>

드라마 속 한 장면, 영화의 대사 한 줄에서 내 삶의 문장을 발견한 적 있나요? 혼자만 간직하기엔 아까운 그 감상들, 이제 함께 나누고 싶지 않으신가요.

함께 콘텐츠를 보고, 쓰고, 대화하며 나만의 시선을 선명하게 만드는 멤버십 클럽을 준비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일정과 커리큘럼은 조율 중이지만, 관심 있는 분들께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사전 예약(알림 신청)을 남겨주시면, 클럽 오픈 시 가장 먼저 초대장을 보내드릴게요.

혜택: 사전 예약자 대상 우선 신청 기회 제공 / 신청 방법: 하단 링크 클릭 후 연락처 남기기

👉 [사전 예약 알림 신청하기]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에디터 소서 픽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6 에디터 소서 픽

이번주 뭐 볼까? 실패 없는 OTT & 책 추천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