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을 움직이는 건 어렵다
몇 년 전, 저는 자동차 주행 데이터를 수집·분석해서 사업화하려는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석’에 앞서, 문제는 ‘수집’이었습니다. 자동차들이 달리면서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속도와 가속, 조향, 감속 등의 데이터를 어떻게 대량으로 수집할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만 해도 테슬라와 같이 OTA 기능을 지원하는 자동차가 없었기에, 주행 데이터를 뽑아 서버로 보내주는 별도의 작은 하드웨어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이 장치를 OBD 스캐너라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운전자들이 자신의 차량에 달고 돌아다니게 할 것이냐가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과제였습니다.
당시 국내 통신사인 KT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KT는 나름 머리를 굴려서, 이 OBD 스캐너를 ‘사은품’으로 포장했습니다. 베타 테스터들에게 주유권과 함께 15만원 상당의 OBD 스캐너를 무료 증정하고, KT는 베타 테스터들이 달리며 제공하는 주행 데이터를 공유받는 이벤트를 폈는데요. 하지만 결국 이벤트 참여율이 생각만큼 그리 좋지 못했다는 후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기업 입장에서, 고객 자신에게 딱히 분명한 이득이 되지 않는 무언가를 고객들이 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그 고객이 한 두 명이 아닌, 수 천, 수 만 명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테슬람, 앱등이를 잇는 새로운 팬덤
하지만, 테슬라에겐 이런 고민이 남의 일인 것 같습니다. 테슬라의 발전된 자율주행 서비스인 FSD 베타 버전의 테스터를 모집하자, 수 천, 수 만 명의 테슬라 팬보이들이 앞다투어 참여하려 나섰습니다. 서비스의 안전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제대로 된 보장 없이 자신의 안전을 담보로 맡겨야 하는데도 말이죠. 이를 두고 얼마 전 미국 포드 사의 CEO인 Jim Farley가 직접 “우리는 고객들에게 자율주행 테스트를 시키지 않는다”며 테슬라를 우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Jim Farley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FSD 베타 테스터로 참여할 기회는 테슬라 팬들에게 '벌칙'이 아닌 '특혜'입니다. 특별히 KT처럼 주유권 같은 보상을 주지 않더라도, 테슬라의 베타 테스터는 앞다투어 참여하고 싶은 특별한 경험이란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테슬라 고객들은 중요 개인정보라고 볼 수 있는 자신의 주행 데이터를 테슬라에 공개하는 것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행 데이터가 뉴럴넷의 학습에 쓰임으로써 테슬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음에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테슬라 고객들의 다수가 단순 고객이 아닌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에 대한 ‘팬’이기에 가능한 일인데요. ‘팬덤(Fandom)’이란 단어 자체가 ‘광신자’를 뜻하는 ‘Fanatic’에서 유래해서인지 몰라도, 테슬라 팬 중에는 특히나 열성 팬이 많습니다. 워낙 열성적인 팬들이기에, GM, 포드, 폭스바겐 등 기존 자동차 회사들은 기술적으로 한참 열등하고 모두 공룡처럼 멸종할 것이라는 식으로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테슬라 제품에 대한 부정적 언론 보도에 맹렬히 악플을 다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는 데요. 이런 광적인 팬덤을 조롱하고 비꼬는 밈(Meme) 역시 인터넷 상에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테슬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을 비하하는 ‘테슬람’이란 단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테슬라'와 '이슬람'을 합쳐 만들어낸 부정적 단어인데, 마치 애플 팬들을 비하하는 '앱등이'를 연상케 합니다.
테슬라의 슈퍼 팬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런 광적인 팬덤의 존재가 누군가에겐 민폐겠지만, 반대로 테슬라에게는 매우 든든한 일일 겁니다. 단순히 제품을 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브랜드를 홍보하고 자신의 개인 정보까지 적극적으로 제공해 회사의 성장을 돕고 있으니까요. 반대로 전통 자동차 제조사들은 배가 아플 겁니다. 그들의 눈에는 아직 자동차를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는 테슬라가, 자신들에겐 없는 두터운 팬층을 갖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GM에겐 없지만 테슬라에게는 있는 슈퍼 팬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1. 특별한 정체성을 소비하게 하다
애런 글레이저의 저서 <슈퍼 팬덤>에 따르면, 구매 결정은 자기 표현의 일종입니다. 소비자들이 한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그 브랜드에 담긴 철학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사회적 표현을 한단 말입니다. 소비자들에게 테슬라란 브랜드는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여러 포인트가 있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테슬라가 단순한 ‘친환경’에서 한 걸음 나아가 여기에 ‘섹시함’을 입혔다는 데서 굉장히 유니크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환경 운동은 이제껏 해오던 행동을 멈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스틱 포장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든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사육된 닭을 먹지 않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다 보니 ‘친환경’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언가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환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 입장에선,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극성 맞은 행동으로까지 보일 정도죠. 하지만 테슬라 자동차를 구매하는 건 그 반대입니다. 전기차를 구매하는 건 친환경 행위이지만 일단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인데요. 2008년 처음 출시된 테슬라 로드스터는 무려 10만 9,000달러에 달하는 럭셔리 스포츠카였습니다. 웃돈을 주고 부자들이나 살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선의 워프를 연상케 하는 압도적 가속력과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의 대쉬보드는 운전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궁상맞음’, ‘불편함’을 연상케하던 환경 운동에 ‘럭셔리’와 ‘하이테크’ 이미지를 입힌 겁니다.
이런 테슬라를 구매함으로써 소비자는 ‘테슬라 오너’라는 매력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환경을 생각하면서 경제력까지 있는 얼리 어답터 집단의 일원이 되는 거죠. 종이봉투를 쓴다거나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는 것과 달리, 아무나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진입장벽을 갖춘 소수의 집단이기에, 테슬라 오너는 더욱 특별합니다. 남들보다 특별하고 싶어하면서도 어딘가에 속해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테슬라 오너’는 ‘애플 유저’만큼 매력적인 정체성이 된 겁니다.
2. 팬서비스로 만들어진 정서적 연대
이렇게 팬이 된 소비자들의 충성심을 계속해서 자극해 팬덤에 락인(Lock-in)시키는 건, 일론 머스크와의 정서적 연대입니다. 팬덤의 대상인 일론 머스크의 이미지부터 매력적인데요. 그는 단순히 한 명의 평범한 CEO가 아닙니다. 검은 매연을 내뿜으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전통 자동차 제조사들에 기술 혁신으로 맞서 싸우는 투사입니다. 로켓으로 인류를 화성에 보내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 개척자입니다. 자고로 이런 영웅 이야기에는 고난의 서사도 필요한 법이죠. 2003년 테슬라가 사업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경쟁사와 언론이 테슬라가 얼마 안 가 망할 것이며, 일론 머스크가 사기꾼이라며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이런 의견이 일견 타당하게 보였는지, 테슬라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매도 사냥꾼들의 먹음직스런 타겟이 돼 공매도 주문 잔량이 가장 많은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2019년 테슬라가 본격적인 흑자 전환을 시작하며 여론이 180도 바뀌었고, 일론 머스크는 공매도꾼과 경쟁자를 물리치고 미래를 앞서나가는 영웅이 되어버렸죠.
머스크의 인기와 지명도는 단순한 기업인 수준이 아닙니다. 테슬라의 경쟁자로 지목되는 GM의 메리 바라, 애플의 팀 쿡, 혹은 현대기아차의 정의선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한 걸음 나아가, 포드나 폭스바겐의 CEO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애초에 그들이 고객들 앞에 직접 나서는 모습조차 쉽게 찾아보기 힘듭니다. 반대로, 일론 머스크는 트위터 팔로워 수만 5천만 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그 발언 하나 하나가 모두 기사화됩니다. 과거 수많은 앱등이들을 양산하고 다녔던 스티브 잡스에 비견될 정도죠.
그러나 일론과 팬들간의 교류는 스티브 잡스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연예인과 정치인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일론의 SNS 활동은 트위터에서 가장 활발한데요. 테슬라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는 일반인들의 트윗에도 친절히 답을 해주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 일론 머스크가 올린 트윗의 개수는 무려 14,000개가 넘습니다. 2009년 6월에 트위터를 시작했으니, 이제까지 평균 하루에 3개 이상의 트윗을 꾸준히 올린 꼴인데요. 하루에 16시간 일한다고 알려진 일론 머스크의 일과 중 1시간 이상이 트위터에 쓰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활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기 실적 발표회 이외에도 배터리 데이, AI 데이 등의 공식 행사를 열어 회사의 계획을 팬들과 공유합니다.
이렇게 단순히 소통의 빈도가 높은 데 그치지 않습니다. 쇼맨십도 뛰어난데요. 몇 달 전엔 한창 핫했던 클럽하우스에 직접 출몰해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다음 달엔 미국 NBC 코미디쇼 Saturday Night Live(SNL)에 호스트로 출연까지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활발한 소통으로 팬들의 정서적 친밀도가 높아지고, 충성도가 올라가는 건 자연스런 일입니다.
제품, 회사, 그 이상의 무언가
우리가 살아 생전 이런 CEO를 몇 명이나 볼 수 있을까요? 활발한 활동과 인기에 힘입어 이제는 대선 출마설까지 나오고 있는 일론 머스크는, 이제 기업인보다 연예인, 정치인에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위의 내용 외에도, 사람들이 유독 머스크와 테슬라에 열광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이렇게 테슬라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를 기대하고 동참하려는 이들이 많은 것도 테슬라의 성공에 베팅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테슬라에 왜 이렇게 광팬이 많은가 하는 질문에 일론 머스크가 직접 답한 적이 있습니다. 2013년 비즈니스 인사이더라는 매체에서 진행한 인터뷰였는데요. 이 인터뷰에서의 일론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번 글을 마쳐봅니다.
※ 이 글은 전기차 전문 매체 EV POST에 동시 게재됩니다
References
- 슈퍼 팬덤: 소비자는 어떻게 팬이 되는가 (에런 글레이저, 조이 프라드블래너)
- 팬덤 경제학 (데이비드 스콧, 레이코 스콧)
- Elon Musk Explains Why There Are So Many Tesla Fanboys (Business Insider,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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