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8. 여덟 개의 발자국 【영국, 애비로드, 비틀즈】

당신과 떠나는 상상의 여행기 ⟪자정 무렵 여행하기⟫

2023.06.21 | 조회 129 |
0
|

최픽션 인쇄소

최픽션이 인쇄하는 【픽션.문화.예술】 이야기

잠들기 10분 전, 침대맡에서 떠나는 게으른 여행 이야기. <자정 무렵 여행하기> 최픽션 입니다.

2년 전 이맘때쯤, 혹은 그 이전을 떠올려보죠. 그때는 매달 수많은 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록 페스티벌은 물론이고 인디밴드들의 페스티벌, 포크 페스티벌, 자라섬에서 열리는 국제 재즈 페스티벌까지… 좋아하는 장르가 무엇이든 그것에 맞는 페스티벌 하나쯤은 꼭 열리곤 했었죠.

당신은 어떤 페스티벌을 주로 찾으셨나요?

이 질문과 함께 한 가지 질문을 더해보려 합니다. 페스티벌의 첫날, 그 문을 통과하던 순간과 페스티벌이 끝난 뒤의 분위기를 기억하시나요? 이 두 풍경은 낮과 밤, 혹은 손목띠만큼이나 달랐습니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던 손목 띠는 2~3일의 페스티벌 시간 동안 낡고 너덜너덜 해졌죠. 그래서 페스티벌을 나설 때면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툭, 띠는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으로 열광적인 페스티벌의 온도도 뚝, 떨어져 버리곤 했죠.

이런 기분은 비단 페스티벌의 관객들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페스티벌에서 가장 뜨거운 태풍의 눈. 무대 위에 선 뮤지션들은 온도의 차가 주는 낙하의 기분을 더 쓰게 맛보았죠. 무대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떨어지는 낙하의 폭도 커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밴드. 비틀스의 무대 뒤 온도가 어땠을지는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의 쇠락한 도시 리버풀에서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로 태어난 비틀스의 멤버들. 그들은 밴드 활동을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곡을 만들고 악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애송이였는지는 몇 가지 일화가 잘 말해주고 있는데요. 존 레넌은 기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을 정도였고. 리버풀 내에서 벌어진 음악 경연 대회에서는 숟가락 하나로 연주하는 이에게도 패배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숟가락 연주자가 형편없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당시에는 이렇게 주변의 물건들을 이용해 곡을 만드는 장르가 유행이었으니까요.)

그런 비틀스 멤버들의 소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최고의 실력. 또 다른 하나는 최고의 무대.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독일 함부르크 여행을 결심합니다. 당시 무역으로 흥하고 있었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는 밤의 무대가 가득했었죠. 누구든 실력과 열정만 있다면 무대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비틀스 멤버들은 그곳에서 매일 밤, 클럽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했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주하고 또 연주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합주가 이어지자 비틀스 멤버들은 이제 눈 감고도 서로의 리듬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밴드의 완성도가 높아졌죠.

이 시기, 비틀스는 다시 리버풀로의 귀환을 결심합니다. 물론 자의적인 결심은 아니었어요. 당시 아직 미성년자였던 조지 해리슨이 클럽에서 연주하는 것을 라이벌 클럽에서 고발하는 바람에 추방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죠. 그렇게 비틀스는 뜨거웠던 함부르크 시절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리버풀. 그들은 ‘캐번 클럽’이라는 지금도 건재한 그 클럽에서 매일 밤 연주했습니다. 이미 함부르크에서 무수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이었기에 리버풀의 좁은 무림에서 그들을 따를 고수는 아무도 없었죠. 이 소식은 리버풀 내 최고의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가게에서 언젠가부터 들어보지도 못한 밴드의 음반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보기 위해 직접 캐번클럽에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주하는 비틀스 멤버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죠. 아마도 번스타인에게 가장 뜨거웠던 순간은 (페스티벌로 치면 이틀째 메인 무대라고 할까요) 바로 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번스타인은 비틀스의 실력을 단번에 알아보고 다음 날, 스스로 매니저가 되고 싶다며 그들을 찾아갑니다. 실력은 있었지만 사업적으로는 아무것도 몰랐던 비틀스 멤버들은 번스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요. 이 순간이야말로 세계 음악사에서 빼놓으면 안 되는 페이지가 아닐까 싶네요.

번스타인과 손잡은 비틀스. 그들은 자신들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레코드 사의 거절 때문에 초반엔 고생을 좀 하게 됩니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비틀스를 퇴짜 놓을 생각이면 리버풀에서 해당 레코드사의 음반은 팔 생각도 하지 말라며 협박을 했죠.(실제로 리버풀에서 가장 큰 음반 가게를 가지고 있었으니 마냥 허풍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번스타인의 기지 덕분에 리버풀은 첫 앨범을 녹음할 수 있었고, 그 앨범은 런던과 영국, 더 나아가 유럽을 침공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유럽 뮤지션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미국 시장에까지 진출을 하게 되는데요. 이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역사였기에 음악사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곤 합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말이죠.

 


최고의 실력으로 미국 시장의 팬들마저 집어삼킨 비틀스. 그들에게 남은 목표는 하나.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그들의 바람대로 비틀스는 정말이지 수없는 무대에 섰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월드 투어를 쉼 없이 다니며 매일 다른 도시, 다른 무대에서 연주하고 노래했죠.

그야말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페스티벌의 시간이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대가 화려해지면 질수록 그들을 찾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무대 뒤에서 그들은 좁은 호텔방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호텔 밖으로 단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무수한 카메라와 팬들의 돌진을 떠안아야 하는 신세. 최고의 뮤지션에게 주어진 과업 같은 일이 20대 초반의 네 젊은이에게 주어진 것이었죠.

문제는 그런 무게를 견딜 방법을 회의할 시간도 없이, 무대는 이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무대를, 페스티벌의 열정을 갈구했던 그들조차 더는 이 뜨거운 온도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서 그들은 결심합니다. 다시, 스튜디오로. 다시 앨범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말이죠.

이 시기부터 비틀스는 다시 스튜디오 밴드가 됩니다. 세계가 아무리 외쳐도 앵콜 무대도, 앵콜 페스티벌도 없었죠. 비틀스 멤버들은 생각했습니다. 다시 처음의 시간,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들이 깨닫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페스티벌이 끝난 뒤의 온도였습니다.

뜨거웠던, 너무나도 뜨거웠던 페스티벌의 시간을 보낸 비틀스. 그들이 무대를 떠난 순간, 페스티벌도 문을 굳게 닫았고, 관객과 무대가 사라진 빈자리에는 공허한 찬바람만 불었습니다. 그 차디찬 온도를 비틀스 네 멤버는 서로 포옹을 하는 것으로 이겨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두터운 코트를 입고 각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으로 해 결해 보려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길을 걷던 그들은 네 갈래 좁은 길로 갈라지기 시작했죠.

그들은 어렴풋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시는 서로의 손을 맞잡거나, 좁은 방에서 연주를 하며 새우잠을 잘 일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비틀스 멤버들은 마음이 떠나버린 비틀스의 자리 앞에 다시 한번 섰습니다. 마지막이라면, 비틀스답게. 최고의 연주, 최고의 무대를 만들고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이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앨범이 바로 <Abbey Road>입니다.

오늘 자정 여행은 이 <Abbey Road> 앨범의 표지가 촬영된 애비로드 스튜디오 앞의 횡단보도죠. 그들이 녹음을 했던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원래 ‘EMI 스튜디오’라는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앨범의 커버 사진 때문에 너무나 유명해진 나머지, 스튜디오 이름을 ‘애비로드 스튜디오’로 변경한 것이었죠. 이 스튜디오는 원래 클래식 음반 제작을 주로 했기 때문에 장비 세팅도 그쪽으로 특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수많은 록밴드가 이곳에서 레코딩을 한 번 해보고 싶다며 찾아온다고 하는데요. 이는 비틀스라는 페스티벌이 아직도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 다시 애비로드의 횡단보도로 가보죠. 이 횡단보도는 앨범 커버에서 볼 수 있듯이 네 명이 나란히 서면 끝과 끝이 보일 정도로 아주 짧은 횡단보도입니다. 원래 이 앨범의 커버를 여기서 찍을 계획은 전혀 없었따고 해요. 애초의 계획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찍으려 했다고 하는데요. 멤버들이 너무 멀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스튜디오에서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찍게 된 것이죠. 히말라야와 횡단보도… 너무 갭이 큰 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스튜디오 밴드로 돌아오고 그 시대를 마무리하는 비틀스의 앨범 커버로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비틀스가 이곳을 선택하는 바람에 이 횡단보도는 어떤 도시계획에도 변함없이 이 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사진 찍기 행렬 때문에 차도 사람도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고 하죠. 재밌는 점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이 횡단보도를 사랑하고 있어서인지 운전자들은 큰 불만 없이 관광객들의 포즈를 기다려 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을 보면 특징이 있는데요. 어떤 이는 그저 평범하게 횡단보도를 걷지만 어떤 사람은 맨발로 이곳을 건넙니다. 바로 커버에서 폴 매카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이 커버는 딱히 계획을 하고 찍은 것이 아니었고, 멤버들도 녹음을 하다가 갑자기 나와서 찍었습니다. 그래서 폴 매카트니는 편하게 나와서 사진을 찍은 것이죠.

그리고 존 레넌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일부러 새하얀 옷을 아래위로 맞춰 입고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실 거예요. 커버에서 존 레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맨발? 혹은 하얀 정장. 저부터 답해보자면… 저는 그냥 검은 옷을 입고 걸을 거예요. 링고 스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의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시겠죠? 맞아요. 비틀스의 네 멤버 고르기 게임에서 링고스타가 선택되는 일은 거의 없죠. (DC코믹스 히어로들 중에서 아쿠아맨이 선택되는 것만큼이나 드문 일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의 유머감각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링고스타의 스타일로 이 횡단보도를 건너볼까 합니다.

자, 이제 여행을 떠나며 나누었던 ‘페스티벌’이야기로 오늘의 여행을 마쳐볼까 해요. 정말이지 어떤 페스티벌이건 또 어떤 삶이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그렇게 걷고 즐기는 길이 열정적이었을수록 그 길에 끝에선 더 큰 허무를 느낄 때도 있죠. 하지만 페스티벌도 삶도. 비틀스가 걸었던 횡단보도와 비슷한 것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횡단보도는 막다른 길에는 절대 그려지지 않아요. 다시 말해 횡단보도가 있다는 것은 그 너머의 또 다른 길이 있다는 뜻이죠. 한 시대의 끝이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인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즐겁게 끝을 맞아보도록 해요. 함께한 상상의 여행도, 지치고 힘든 오늘의 하루, 혹은 지금의 시간도 말이에요.

그럼 다시 만날 자정 여행까지.

잘 지내요, 우리.

【최픽션 인쇄소】 는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만들어집니다. '이야기 인쇄'가 멈추지 않도록 ✔️구독을 잊지 말아주세요 🙏

【최픽션 인쇄소】 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

📝 〖브런치〗 〖밀리로그〗 〖블로그〗

🎧 〖팟캐스트〗 〖스포티파이〗 (준비중)

▶️ 〖유튜브〗 (준비중)

원하는 채널에서 최픽션이 인쇄하는 이야기를 만나주세요 👋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최픽션 인쇄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최픽션 인쇄소

최픽션이 인쇄하는 【픽션.문화.예술】 이야기

뉴스레터 문의 : ficciondm@gmail.com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