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7. 바람과 히스 꽃이 지은 한 권의 책 【영국, 하워스

당신과 떠나는 상상의 여행기 ⟪자정 무렵 여행하기⟫

2023.06.20 | 조회 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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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픽션이 인쇄하는 【픽션.문화.예술】 이야기

잠들기 10분 전, 침대맡에서 떠나는 게으른 여행 이야기. <자정 무렵 여행하기> 최픽션 입니다.

우리에게 바람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아마도 ‘제주’일 것입니다. 제주는 그 끝없는 바람과 함께 사느라 천장을 낮추고 담을 높인 집을 짓곤 했죠. 그 덕에 제주의 집에서 눈을 뜨고, 문을 열면 검은 현무암 담이 먼저 우리를 맞습니다. 그리고 그 담에 가까이 다가서면 부지런한 바람, 그리고 낮은 집 덕분에 환히 보이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죠.

오늘 자정 여행도 그런 곳입니다. 바람이 많고, 집은 낮고, 아무것도 없는 곳. 그런 곳으로 여행을 떠나려 해요. 그러니 챙겨야 할 것이 분명해지죠. 출발 전에 우리는 바람을 막을 카디건 스웨터를 입어야 합니다. 카디건 스웨터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어부들이 입기 시작한 옷이라고 하죠. 그들이 그것을 입기 시작했을 무렵, 그때는 ‘카디건 스웨터’라는 말이 없었다고 해요. 시인 김현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아마도 ‘부드러운 갑옷’이나 ‘바람을 먹는 옷’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멋진 말을 덧붙입니다.

눈빛이라는 말이 없었을 때 내가 바라보는 눈동자의 반짝임은 어떻게 불리었을까. 별이라는 말이 없을 때 하늘에 반짝이는 것은 아, 였을까 오, 였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없었을 때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은 손을 먼저 잡는 것이었을 발을 먼저 맞대는 것이었을까. 노래라는 말이 없었을 때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목소리에 가까운 것이었을까 자연의 소리에 가까운 것이었을까. 욕심과 살육과 재앙은 하나의 말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아니나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것. 그런 걸 생각하면 가끔 턱을 괴게 된다. 턱을 괴는 몸짓은,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일은 인간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인간만이 시간에 쫓기며 살기 때문이다. 속도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순간. 정적 속에서 생각의 단추를 끼웠다 풀었다 하는 일이 인간을 잠시 짐승에서 구한다.”

<아무튼, 스웨터> 김현

오늘 가려는 곳의 이름은 뭐라 불렸을까요. 아마도 과거에는 그저 ‘하워스의 언덕’ 정도로 불렸을 것입니다. 카디건 스웨터나 제주의 돌담이 그랬듯이 말이죠. 하지만 지금 그곳을 ‘하워스의 언덕’이라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신 모든 이들이 이곳을 이렇게 부르죠.

“폭풍의 언덕"

오늘 떠날 자정 여행의 목적지. 그곳은 바로 ‘폭풍의 언덕’입니다. 브론테 자매 중 둘째,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장소이자, 브론테 자매가 평생을 살았던 장소입니다. 브론테 자매와 가족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었습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영국 요크셔 주의 아주 황량한 시골 마을. 하워스에 종신직을 얻게 되죠. 그래서 연고도 없는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웃집이라고 해봐야 잔뜩 힘을 모아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곳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외딴곳에 브론테 자매는 똑, 떨어진 것이죠.

이런 황량한 공간은 필연적으로 생각의 길을 끝간 데까지 끌고 가곤 합니다. 그래서 우울이나 권태에 빠지기 쉽죠. 하지만 이야기를 짓고, 나누기를 좋아하던 브론테 자매에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되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을 빈 종이처럼 이용했는데요. 여기서 잠시 자매들의 놀이를 돌아볼까요?


자매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바로 책 만들기였어요. 그들은 황량한 마을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시대는 1800년대, 빅토리아 시대였습니다. 이때는 산업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이었기에 책은 물론이고 종이 자체가 비쌌던 때입니다. 그래서 자매들은 아이디어를 모았고, 드디어 미니어처 북이라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이 책을 만드는 과정은 이랬습니다. 일단 여덟 장의 종이를 가로 5cm, 세로 3.8cm로 잘라 반씩 접어요.

그리고 그 작은 종이에 정말 작은 글씨로 이야기를 적어 넣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책처럼 보여야 했기에 회갈색 소포 포장지를 가져다 흰 종이들보다 조금 더 크게 잘라서 표지로 만들고 흰 실로 꿰매면 완성! 이었습니다.

이렇게 16페이지짜리 미니어처 북을 만드는 것이 자매들의 제일가는 놀이였습니다. 이 미니어처 북은 글씨가 너무 작아서 확대경 없이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거짓말 같으신가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 미니어처 북은 유품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하워스에 가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이왕 상상으로 자정의 여행을 떠났으니, 미니어처 북도 펼쳐볼까요?


브론테 자매는 어린 시절, 어두운 슬랩스틱 유머가 담긴 글을 많이 썼다고 해요. (콰당! 같은 말이 많이 들어있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 그리고 정령이나 유령, 세상에 없는 존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즐겨 썼고, 부활을 주제로 한 이야기도 많이 생각했다고 해요. 그 이유는 역시나 그들의 집 창밖으로 펼쳐진 황량한 언덕과 쉼 없이 몰아치는 바람이 영감이 된 탓이었을 겁니다.

세 자매 중에서 가이드에 가장 어울리는 성격은 역시나 큰 언니, 샬럿 브론테였어요. 외향적인 성격인데다가 실제로 자매가 글을 출판하는 일도 샬럿이 도맡아 했을 정도죠. 하지만 ‘폭풍의 언덕’산책이라면 이 친구에게 가이드를 맡기는 게 좋을 거예요. 바로 에밀리 브론테 말이에요. 에밀리는 정말이지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웬만하면 타인과 만나는 일도 좋아하지 않았고, 외부 활동을 하는 일도 많지 않았죠.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그런 편이었다고 하는데요. 샬럿은 에밀리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을 정도예요.이렇게 브론테 자매와 함께 책을 읽어봤으니 그들을 가이드 삼아 폭풍의 언덕 산책을 떠나볼까요?

"에밀리는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런 에밀리도 숨기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언덕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 그곳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언덕으로 산책을 나갔죠. 어떤 글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을 정도예요.

그들에게 집은 먹고 마시고 쉴 때만 이용하는 것이었다.

에밀리는 왜 바람밖에 없는 이 언덕을 좋아했던 것일까요? 그건 누군가 뿌려놓은 듯 언덕에 펼쳐진 히스 꽃과 골짜기, 그리고 시냇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밀리는 자유롭게 핀 꽃과 시원하게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그 시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답답함을 풀 수 있었죠. (여성의 이름으로는 책을 출간하기도 어려웠던 시대였으니까요) 말하자면 에밀리는 이 언덕에 펼쳐진 자연스러운 풍경 속에서 진정한 자유의 시간을 즐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언덕의 안내는 에밀리가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밀리와 함께할 폭풍의 언덕 산책에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일단 언덕에서 앉아있을 수 있는 나무로 된 작은 스툴 의자. 그리고 언덕에서 글을 쓸 때 필요한 휴대용 책상. 이 두 가지 준비물이 필요해요.

나무로 된 작은 스툴 의자는 그렇다고 치고, 휴대용 책상은 뭘까?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빅토리아 시기에는 너무나 흔했던 물건이 바로 휴대용 책상이었는데요. 이 책은 무릎에 얹어놓고 쓸 수 있는 아주 작은 책상이에요. 작지만 글을 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책상이기도 했는데요. 종이나 공책, 펜, 원고를 담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어요. 그래서 에밀리는 자신의 휴대용 책상에 집필한 원고를 차곡차곡 모아두었죠. (지금으로 치면 노트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여러분에게 <폭풍의 언덕>이 출간되었던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한 번은 샬럿이 에밀리의 책상에 담긴 동생의 원고를 훔쳐보게 되었어요. 내성적인 에밀리는 자신의 원고를 보여주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죠. 하지만 결과는 샬럿의 이 엉뚱한 행동 덕에 그들의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으니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잘 된 일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에밀리 자신에게도 꽁꽁 감춰야 했던 자신의 세계를 자유로이 펼칠 수 있었으니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브론테 자매의 책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우리는 아직 폭풍의 언덕 여행 중이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이 언덕에 핀 히스 꽃을 마주해보도록 해요. 지금 보고 있는 히스 꽃은 이 언덕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에요. 그 이유는 바로 에밀리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던 날. 그날로 돌아가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에밀리가 <폭풍의 언덕>을 세상에 펴낸 지, 1년이 채 되지 않던 어느 날. 평소 몸이 좋지 않았던 에밀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병을 이기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그가 아끼던 개 키퍼가 있었죠. 그런 에밀리의 모습을 보고 샬럿은 동생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서둘러 언덕에 올라 에밀리가 그토록 좋아하던 히스 꽃 한다발을 꺾어 집으로 돌아왔죠. 하지만 에밀리는 자신의 곁에 놓인 히스 꽃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숨을 헐떡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에밀리는 세상을 떠났는데요. 다행이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마지막까지 폭풍의 언덕, 그곳의 향기와 함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히스 언덕, 양치식물 가지, 어린 월귤나무 잎사귀, 퍼덕이는 종달새나 홍방울새를 볼 때마다 그 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샬럿. 그는 언제까지고 하워스와 폭풍의 언덕을 곁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폭풍의 언덕을 올려보고 거닐 때마다 동생 에밀리를 생각했죠. 그리고 샬럿이 느낀 그리움은 지금까지 이어져, <폭풍의 언덕>을 사랑하는 이들은 히스 꽃 혹은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녀를 떠올리곤 합니다.

어쩌면 오늘 함께 ‘폭풍의 언덕’ 여행을 한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겨울의 바람은 너무 오래 맞으면 안 되니, 에밀리나 황량한 하워스, 그리고 히스 꽃 핀 언덕 풍경이 그리워질 때면 창은 꼭 닫고, 조명은 은은하게.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폭풍의 언덕>이 책을 펼쳐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럼 <폭풍의 언덕>이 작은 책에 담긴 바람 소리를 즐길 당신을 위해 오늘의 가이드는 여기까지 할게요.

다시 만날 자정 여행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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