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phile

모든 고민은 0.5초 이내에

어중간하게 있지 말 것

2023.10.06 | 조회 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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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에 관한 짧은 이야기

아주 사적이고 디테일한 에세이

모든 고민을 0.5초 이내에 끝낼 것. 아시안게임에서 일본 농구대표팀이 공유하는 콘셉트라고 한다. 흥미롭고도 중요한 대목이다. 꼭 농구가 아닌 어떤 것에 반영하더라도.

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준결승은 한일전이었다.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내가 아무리 국뽕이 없다지만 한국이 졌다고 기뻐할 리는 없을 텐데, 신기하게 처참하게 무너지는 걸 보며 느낀 건 기분 좋을 정도의 무력감이었다. 일본 농구의 상승세는 남녀가 비슷한 페이스를 보이고 있지만, 일단 내가 자세히 본 여자팀만 두고 보면, 아시아에서는 100%로 붙으면 중국도 이제 쉽지 않다. 이미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성과도 나왔다. 이제 미국 외의 국가는 일본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다.(운 나쁘면 미국도 물릴 것 같다)

한국이 일본보다 DNA나 피지컬 면에서 나으면 나았지 부족할 건 없다고 본다. 박지수라는 걸출한 월드클래스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된 이유로는 일단 인프라와 개인능력의 차이가 제일 크겠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게 ‘콘셉트’다. 할 수 있는 건 철저하게 갈고 닦고, 해도 안 되는 건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 

말하자면 이건 전술이 아니다. 일종의 행동 원리(principle)다. 어중간한 태도는 빨리 버리고, 뒤를 돌아보지 말 것. 한국이 아직도 <슬램덩크>의 판타지에 머물러 있다면, 원산지인 일본은  먼저 깨달았다. 서태웅 같은 하이 플라이어나 채치수 같은 괴수가 될 수 없을 바에는, 매일 500개의 슛 연습을 거르지 않는 신준섭이나 수비 스페셜리스트 김낙수가 되겠다는 것이다. 


우월한 피지컬을 무력화하는 엄청난 스피드와 활동량, 그것을 경기 내내 일정한 텐션으로 유지하는 폭넓은 선수 활용, 그러기 위해 주전과 비주전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디테일한 역할 설정, 자신보다 크고 강한 상대를 이기지는 못해도 적어도 귀찮게 하는 터프함과 집중력. 어쩌면 2010년대 이후 급격하게 바뀌어버린 세계 농구의 트렌드(포지션 파괴, 압박, 스페이싱, 트랜지션 같은)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게 일본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뻔한 말의 위력을, 이번에 일본팀 보면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안다는 건 단순해진다는 뜻이다. 알면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진다. 목표가 명확해지면 동기부여도 잘 되고, 반복적인 훈련으로 몸에 때려넣기도 수월해진다. 사람은 힘들어서 지치는 게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으면 지친다. 간단한 원리다. 

그 다음에는 앞서 말한 콘셉트가 대전제가 된다. 모든 고민을 0.5초 이내에 끝낼 것. 어중간하게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다음 스테이지로 빨리 움직일 것. 3점슛이 무슨 AI처럼 살벌하게 들어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던져야 할 때가 명확하니 앞뒤 없이 그냥 던지기 때문이다. 모 감독 말처럼 슛은 생각 없이 던져야 들어간다.

특히 7~8 내에 두세 번의 패스와 스크린으로 간결하고 확실하게 찬스를 만드는 얼리오펜스는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며칠 전부터 일본팀의 예전 올림픽 영상까지 찾아보고 있다. 단체 종목에서 팀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선호하는 입장에서는, 황홀할 지경이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우화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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