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사냥 | "챔피언십을 위해 키미를 먼저 보내줘(?)"

시리즈 연재 #3 : F1 역사상 유일한 사후(死後) 월드 챔피언

2026.06.28 | 조회 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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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F1 뉴스레터 Pit.IN 발행인 오제형입니다.

 

오스트리아 그랑프리가 있는 6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오스트리아는 불과 2주 전까지 제가 27년간 직접 살던 곳이라 오스트리아 그랑프리는 홈 그랑프리처럼 가까운 마음이 드는 곳인데요. (물론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 했지만..)

사실 저의 홈인 만큼 구독자 분들께 조금의 선물을 준비이 되길 바라며 제가 5월 말부터 같은 지역에 거주 중인 헬무트 마르코와의 대면 인터뷰를 레드불 링과 헬무트 소유 호텔 매니저 측을 통해 신청했었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제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과정과 함께 헬무트 마르코의 시간이 너무 없어 인터뷰를 조율 할 수 없었습니다. (한 동네 살았는데 ㅠㅠ..) 보통 유럽은 이런 인터뷰 조율을 최소 두달 전부터는 준비하기 때문에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헬무트 마르코는 오스트리아 그랑프리가 개최되는 레드불링의 앰버서더로 F1뿐만 아니라 여러 레이싱 대회에 홍보대사 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F1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인터뷰를 선물했다면 좋았겠지만, 대신 오스트리아 특집으로 내용 준비했으니 재밌게 읽어주세요! 

뉴비분들은 잘 모르실수 있는 헬무트 마르코는 작년까지 레드불 레이싱의 상임고문으로, 레드불의 정신이자 전부라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모기업 레드불의 마르테쉬츠를 설득해 현재의 레드불의 설비와 기반을 다진 것도 그의 역량이었고, 세바스티안 베텔과 막스 베르스타펜을 발굴해 F1의 수 많은 기록을 갈아치운, 어떻게 보면 텃세가 난무한 F1에서 유일한 신생팀의 성공이자 현재의 레드불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혼자가서 내가 나온 사진은 이거 하나...
작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혼자가서 내가 나온 사진은 이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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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십을 위해 키미를 먼저 보내줘(?)"

앞으로 메르세데스의 운명도 이렇게 바뀌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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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그랑프리를 돌아보면 저는 한 번씩 기억나는게 2002년 페라리가 남긴 팀 오더 무전인데요.

"Rubens, it's the last lap. Let Michael pass for the championship! Let Michael pass for the championship! Rubens, please." (챔피언십(포인트)를 위해 마이클을 먼저 보내줘)

일명 "챔피언십(포인트)를 위해 마이클을 먼저 보내줘"사건입니다. 페라리는 당시 오스트리아 GP에서 1위로 달리고 있던 루벤스 바리켈로에게 팀 동료 미하엘(마이클) 슈마허의 우승을 위해 2위로 내려오라는 지시를 남겼고, 당시 여러 비판 속에 노골적인 순위 양보가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메르세데스 키미 안토넬리의 공식 인터뷰를 보니 토토 볼프 감독은 팀 내 경쟁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캐나다 GP 에서의 상황처럼 다른 팀의 견제 없이 두 드라이버 둘만의 배틀시에는 자유롭게 경쟁을 해도 되지만, 바르셀로나 때처럼 타 팀의 압박이 들어오는 위기 상황에서는 얄짤없이 페이스가 빠른 차에게 길을 비켜주기로 합의 했다고 해요.

현재 안토넬리가 조지 러셀보다 포인트도 앞서고 있고 기세도 좋잖아요? 게다가 레이스 엔지니어 피터 보닝턴도 안토넬리와 아주 좋은 호흡을 맞추고 있거든요. 러셀은 초반에 기계적인 불운도 좀 있었지만, 어쨌든 이번 오스트리아 GP 기자회견에서는 "누가 우승하든 팀이 이기는 게 최우선"이라며 성숙한 멘탈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셀은 개인적으로 좋은 팀 플레이어라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 적인 마인드로는 사실 아니지만,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는 팀의 챔피언십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과거 페라리나 맥라렌의 사례처럼 챙길 수 있는 포인트를 확실히 챙겨두는 결정도 필요하겠죠. 


FIA 회장은 모하메드 벤 술라옘 회장의 종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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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장 토드 회장 시절에 만들어진 회장 임기는 12년 x 최대 3회 라는 제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최근 마카오 총회가 있었는네 여기서 이 제한을 아예 삭제해 버렸습니다. 어쩌면 70세 나이 제한 규정까지도 조만간 없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요 (출처 BBC), 이 것 뿐만이 아닙니다.

구독자님께서도 아마 아시다시피 (아빠 사인츠를 비롯) 작년 선거 출마를 원한 후보들이 꽤 있었지만, 대륙별 지원자 1명이란 기준 등 출마 기준이 너무 빡빡해서 사실상 아무도 벤 슐라옘 회장을 견제할 수 없다는 상황이 더 염려되는 상황인데요. 어떤 견제나 제한이 없으면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겠죠.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F1을 소비하고 있긴 하지만, 타 후보의 출마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은 스포츠를 관장하는 기관의 공정성이라는 가치와는 거리가 많이 멀어 보입니다. F1의 수익은 이와 별개로 43%나 올라서 무려 670만 유로의 이익을 냈는데, 아무래도 자본이 필요한 스포츠이다보니 FIA의 회원들이 이런 부분도 무시는 못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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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사냥

요즘 유럽 날씨가 미쳤습니다. 40도에 육박하는 날씨 속에 열사병 환자에 사망자도 늘고 있다는데요.

오스트리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랑프리가 개최되는 레드불링의 날씨는 금요일 기준 36도였습니다. 주말간 더 올라간다고 합니다. 폭염주의보가 발령된건 당연하고, 따라서 이번 그랑프리는 날씨와의 전쟁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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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일화로, RB 팀은 차고의 에어컨 장비를 모두 끈 상태로 대회를 치른다고 하는데요. 이유는 에어로다이나믹 센서가 데미지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RB는 피터 바이어 CEO를 비롯한 피트월에 앉아있는 인원들 또한 함께 에어컨을 틀지 않고 (피트 크루들과 고통을 함께하기로..) 그랑프리를 치르기로 했답니다. (공기역학 센서에 문제가 생기면 차량은 균형을 맞추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윌리엄스는 너무 덥기 때문에 차고의 에어컨은 틀기로 했다고 합니다. 바울스 감독에 따르면 어짜피 차고는 오픈 되어있어 에어컨 튼다는게 미친소리이긴 하다고... ㅎㅎ, 다만 윌리엄스 피트월에서는 에어컨이 아니라 선풍기를 쓰기로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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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극도로 더운만큼 차량의 냉각이 중요해졌는데, 올 시즌 대부분의 컨스트럭터는 시즌 초반 오히려 과냉각이 문제가 될 정도로 냉각에는 잘 대비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올 해 흡입구가 커진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답니다.

하지만 작년부터 시행되어온 드라이버 냉각 조끼는 이번 그랑프리에서도 의무적용되었는데요. FIA에서는 선수 보호차원이라고 하지만 솔직한 우리 이삭 하자르는 10분이면 녹아서 소용 없다고 했...😂 이게 이번 그랑프리는 의무라서 냉각 조끼 미착용시 0.5kg의 추를 차량에 추가적으로 설치하게 되어있습니다. (무게 감소로 인해 차량의 스피드가 빨라지는 수혜를 입을 수 있음으로...)


디퓨저 

2026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메르세데스와 RB는 차량의 디퓨저를 긴급 수정해야 했습니다. 페라리가 FIA에 규정 재심을 요구하며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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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대 차량이 그라운드 이펙트에 덜 의존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디퓨저의 효율성은 레이스를 위해 매우 중요해 졌죠. 캐나다 GP 때부터 새로 장착한 메르세데스의 디퓨저는 상단 폭의 절반 이상을 덮는 톱니 모양 프로파일을 특징으로 제작했다는데요. 이게 사실 디퓨저를 연장하고 공기역학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메르세데스는 언더보드의 변형을 막는 '플로어 스테이(Floor-Stays)' 규정(C3.2.6조)과 모서리를 둥글게 마감하는 규정을 결합하여 당시 몬트리올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바 있었는데, 이게 상황에 변수가 생겼습니다.

바로 페라리가 항의를 했고 FIA가 이로써 개입하게 된 건데요. 페라리 역시 비슷한 시기에 디퓨저 연장 아이디어를 냈었는데 FIA에서 사실 거절당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수 없었던 페라리는 메르세데스의 톱니 모양 디자인이 휠투휠 경합 중 타 팀에게 타이어 펑크 등 위험한 상황을 유발한다고 주장했고 레드불 역시 이러한 우려에 지원사격을 한 일화가 있습니다.

결국 FIA는 극단적인 디자인을 차단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GP 이후 기술 지시문(Technical Directive)을 발행했습니다. 규정의 빈틈을 이용해 추가적인 공기역학적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그래서 이젠 금지가 되었습니다. 

메르세데스는 여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고, 그 것 없이도 차는 충분히 좋다며 그냥 작은 해프닝 정도로 넘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1등의 여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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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기록: 영웅들은 기억된다』 시리즈 연재 #3

요헨 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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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1 역사상 유일한 사후(死後) 월드 챔피언

1970 F1 시즌은 어쩌면 모터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가슴 아픈 서사시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심에는 오스트리아 모터스포츠의 개척자이자 당대 최고의 천재 드라이버였던 요헨 린트(Jochen Rindt) 있다. 1970 9 5, 이탈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직전 몬차 서킷의 트랙 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요헨 린트는 라이벌들을 압도하고 빠른 랩타임을 기록하기 위해, 공기저항을 극한으로 줄이려는 목적으로 리어 윙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세팅을 시도한 고속 구간에 진입했다. 그러다 질주하던 그의 차량 브레이크 샤프트 계통에 치명적인 기계적 결함이 발생했고, 제어를 잃은 차량은 몬차의 서킷 배리어와 가혹하게 충돌했다. 당시만 해도 서킷의 부실한 안전 배리어 구조는 사고의 충격을 고스란히 드라이버에게 전달했고, 그는 28세라는 젊고 찬란한 나이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멈추었을지언정, 그는 시즌 내내 다른 드라이버들과의 경쟁을 끝내지 않았다. 요헨 린트는 사고 전까지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그랑프리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이미 챔피언십 선두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이후 치러진 남은 경기에서, 그의 유일한 대항마이자 강력한 경쟁자였던 페라리의 재키 익스(Jacky Ickx) 역전에 필요한 포인트를 끝내 확보하지 못하면서 시즌이 마감되었다. 이로 인해 요헨 린트는 세상을 떠난 후에 월드 챔피언 타이틀이 최종 확정되는 유일무이한 드라이버가 된다. 이는 포뮬러원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후(死後) 월드 챔피언' 탄생이었다.

또 한편으로 린트는 로터스 팀에 입단하며 "내가 로터스와 함께 우승을 하던가, 아니면 죽던가..." ("Entweder werde ich mit Lotus Weltmeister oder ich sterbe.")라는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었고, 결국 그 두가지의 말을 모두 지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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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짝 친구 헬무트와의 모험

요헨 린트(Karl-Jochen Rindt) 2 세계대전의 참화가 유럽을 뒤덮고 있던 1942 4 18,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린트와 일제 마르티노비츠는 마인츠에서 '클라인 운트 린트'('Klein & Rindt')라는 성공적인 향신료 제분 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사업가 부부였다. 그러나 전쟁의 잔혹함은 어린 요헨을 비껴가지 않았다. 1943, 연합군이 감행한 함부르크 대폭격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일시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불과 돌을 지난 나이에 고아가 요헨 린트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살고 있던 외조부모의 손에 맡겨져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독일 마인츠 출생 배경과 부모의 국적 때문에 그를 단순히 독일 드라이버로 오해하거나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헨 린트는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나 오스트리아에 두었으며, 레이싱 라이센스를 오스트리아 국적으로 취득해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오스트리아 국적으로 활약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그를 니키 라우다와 함께 자국 모터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문화적 아이콘으로 추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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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츠에서 자란 린트는 유년 시절부터 몹시 반항적이고 대담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그라츠의 중학교인 페스탈로치 김나지움 (Pestalozzi-Gymnasium) 거쳐 1961 슈타이나흐(Steinach)에서 마투라(Matura, 대입 자격시험) 통과했다. 이후 빈(비엔나)의 세계무역대학교(Hochschule für Welthandel) 입학하기도 했으나, 이미 레이싱 마음을 빼앗긴 그에게 학업을 마칠 마음은 없었다.

청소년 시기에 그는 평생의 단짝이자 훗날 레드불 레이싱의 전설적인 고문이 되는 헬무트 마르코(Helmut Marko) 만나게 된다. 두 소년은 같은 반 친구이자 드라이버 동료가 되어 그라츠와 근교 험준한 산악 도로에서 콤비를 이루어 어른들 몰래 자동차를 끌고 나와 레이싱을 즐겼다. 위험천만한 스티리아 지역의 산길을 온몸으로 내달리며 린트는 제어력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고, 스피드 대한 순수한 갈망을 키웠다. 시절 헬무트 마르코와 함께했던 거침없는 무모함과 스피드에 대한 집착은 훗날 린트가 F1 무대에서 어떤 위험 속에서도 차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독보적인 '근본'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오스트리아 전설의 시작

요헨 린트는 타인의 자본에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신념과 자산을 바탕으로 레이싱 경력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부모님이 남겨준 향신료 회사 '클라인 운트 린트' 경영진으로 이름을 올렸던 그는, 자신의 사재를 과감히 털어 레이싱 카를 구입했다. 1963년에는 개인 자산으로 쿠퍼 포뮬러 주니어 차량을 구매해 유럽 주니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64년에는 브라밤 F경주차를 직접 사들여 빠르게 경쟁력을 입증해 나갔다. 차를 부서질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이면서도 기어코 놀라운 랩타임을 만들어내는 그의 독특한 주행은 단숨에 업계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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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1964, 오스트리아 국적으로 자국의 트랙인 오스트리아 그랑프리를 통해 꿈에 그리던 F1 월드 챔피언십 무대에 공식 데뷔하게 된다.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명장 쿠퍼(John Cooper) 1965 린트를 자신의 정식 드라이버로 전격 영입했다.

F1 초창기 시절, 그의 천재성은 포뮬러 카에만 머무르지 않고 내구 레이스라는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에서도 폭발했다. 1965, 요헨 린트는 동료 드라이버 마스텐 그레고리(Masten Gregory) 팀을 이루어 페라리 250 LM 타고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24시간 내구 레이스인 '르망 24' 출전했다. 무려 하루 동안 차량의 내구성과 드라이버의 한계를 시험하는 레이스에서 린트는 압도적인 스피드와 정교한 차량 제어력을 선보이며 종합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승리는 그가 단거리 그랑프리뿐만 아니라 장거리 레이스에서도 세계 정상급의 경쟁력을 갖추었음을 세계에 선언한 결정적 장면이었고, 그를 단순한 신인에서 업계가 두려워하는 강력한 드라이버로 각인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4) 경쟁을 모르던 시절

쿠퍼 팀에서 실력을 다진 린트는 1968 브라밤(Brabham) 팀으로 이적해 활약한 , 1969 그의 레이싱 인생을 통두리째 바꿀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당대 최고의 기술적 혁신가였던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 이끄는 로터스(Lotus) 팀이 파격적인 계약 조건과 높은 연봉을 제시하자, 린트는 로터스로의 이적을 전격 선택했다. 선택은 그의 커리어를 진정한 황금기로 인도하는 신의 수가 되었다. 1969 시즌 후반기, 미국 Watkins Glen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 린트는 마침내 F1 데뷔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고, 이 승리로 로터스 팀과의 파괴적인 시너지를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리며 포뮬러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로터스 72
로터스 72

1970 시즌에 접어들자, 요헨 린트는 누구도 범접할 없는 '절대적 정점'에 도달했다. 혁신적인 경량화와 공기역학이 집약된 전설적인 머신 '로터스 72(Lotus 72)' 탑승한 그는 네덜란드 그랑프리를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 그랑프리까지 무려 4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경이로운 대기록을 작성했다.

1970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구형 모델인 로터스 49R6 타고도 브라밤(Jack Braham)과의 경쟁 끝에 역전 우승한 장면이 있었는데, 이 장면으로 그가 빠르지 않은 차로도 일명 모두르 '압살' 할 만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로터스 49R6
로터스 49R6

1970 독일 그랑프리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하이라이트였다. 비가 섞여 내리는 대단히 까다롭고 위험천만한 노면 조건 속에서 치러진 레이스에서, 린트는 차체가 미끄러지는 극한의 상황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제어하며 경쟁자들을 차례로 무력화시켰다.

그는 단순히 빠른 랩타임을 내는 드라이버를 넘어, 치열한 심리전과 압박 속에서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레이스 운영 능력을 과시했다. 콜린 채프먼의 공격적이고 과감한 차량 설계 철학과 요헨 린트의 두려움 없는 주행 스타일이 결합된 1970년의 로터스 팀은 F1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전설적인 조합으로 팬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게 된다.


5) 스피드를 몸소 견디던 시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F1 에어로다이내믹(공기역학)과 다운포스 기술이 비약적으로 도입되던 거대한 기술적 과도기였다. 이 덕분에 차량의 스피드는 하루가 다르게 상승했으나, 이를 뒷받침해야 타이어 기술이나 안전 장비, 그리고 서킷의 구조적 안전성은 매우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콜린 채프먼이 설계한 로터스 72 쐐기형 바디라인과 인보드 브레이크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인 설계를 자랑했지만, 경량화를 위해 차체의 기계적 마진을 극단적으로 줄였기 때문에 부러지거나 파손될 위험을 안고 있는 연약한 머신이기도 했다.

이러한 거친 기술적 변화 속에서 요헨 린트를 차별화시킨 것은 그의 독보적인 '적응력' '동물적 제어 기술'이었다. 그는 과감한 브레이킹과 공격적인 코너 진입을 선호했으며, 바퀴를 모두 미끄러뜨리며 코너를 탈출하는 파격적인 주행법을 구사했다. 차량의 하중 이동과 거동이 극도로 불안정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그는 특유의 정교한 카운터 스티어링과 페달 조절을 통해 기어코 가장 빠른 랩타임을 쥐어짜 내는 기술을 가졌다.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1970 7 4, 프랑스 그랑프리 연습 주행 도중 앞차가 튕겨낸 커다란 돌멩이가 린트의 콕핏 안으로 날아들어 그의 뺨을 강타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계적 결함과 외부 위험이 드라이버의 생명을 시시각각 위협하던 시대였지만, 린트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레이스 카의 특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피드백을 전달했다. 주행이 종료되어서야 그의 메카닉 에디 데니스(Eddi Dennis) 콕핏 안에서 그를 다치게 돌멩이를 발견했을 정도로 치열했던 환경 속에서도, 린트는 기술적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차량의 에어로 셋업을 직접 조율하며 스피드를 극대화하는 천재적인 적응 능력을 보여주었다.


6) 두려움·스타성·우정

트랙 위에서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요헨 린트의 이면에는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고뇌와 드라마가 가득했다. 그는 1967 핀란드의 유명 모델이었던 니나 링컨(Nina Lincoln) 뜨거운 사랑 끝에 결혼식을 올렸고, 1968 나탸샤(Natascha) 품에 안으며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다.

가족이 생긴 그에게 모터스포츠의 살벌한 위험은 점차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1969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랑프리에서 차량의 윙이 파손되며 발생한 끔찍한 대형 추돌 사고로 인해 린트는 코뼈가 부러지고 심각한 뇌진탕을 입는 중상을 당했다. 사고 직후, 죽음의 공포를 직접 마주한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모터스포츠 커리어를 완전히 중단하고 은퇴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스피드 대한 순수한 열망과 챔피언 타이틀을 향한 드라이버로서의 DNA 결국 그를 다시 트랙으로 복귀하게 만들었다.

린트는 단순한 레이서를 넘어 대중을 매료시키는 거대한 스타이자 팝스타같은 존재였다. 그는 1965년부터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요헨 린트 (Jochen-Rindt-Show)' 직접 기획하고 매년 주최하기도 했다. 전시회는 세계의 화려한 레이싱 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브라밤, 그레이엄 , 재키 스튜어트 같은 당대 최고의 F1 스타들을 초청해 팬들과 소통하게 만든 혁신적인 이벤트였다. 그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아내 니나 채프먼은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1975년까지 쇼를 빈(비엔나)에서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

20페이지 요헨 린트 특집 매거진
20페이지 요헨 린트 특집 매거진

린트가 몬차에서 허망하게 떠났을  헬무트 마르코는 단짝 친구의 부재에 깊은 상실감을 겪었지만,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하던 린트의 철학을 가슴에 새겼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우정을 쌓았던 마르코에게는 훗 날 레드불의 수장이 되어 세바스찬 베텔, 막 베르스타펜 같은 위대한 월드 챔피언들을 발굴해 , 그가 기준으로 삼았던 '두려움 없는 날것의 재능' 원형은 바로 요헨 린트였다.


7) 오스트리아의 유산을 남긴 별

요헨 린트가 모터스포츠 역사에 남긴 유산 그리고 특별히 오스트리아 포뮬러원에 남긴 기록들은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이정표로 빛나고 있다. 그의 유산은 크게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그는 변방이었던 오스트리아 모터스포츠를 세계 최정상의 반열로 끌어올려 훗날 니키 라우다, 게르하르트 베르거 같은 전설들이 등장할 있는 길을 닦은 위대한 선구자였다.

둘째, 28세라는 너무나도 짧은 생애 동안 통산 62 출전 속에서 엄청난 밀도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기어코 세계 정점에 천재 드라이버였다.

셋째,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무겁게 다가오는 유산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F1 세계에 '드라이버의 안전'이라는 절대적인 과제를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그의 사고는 경량화와 스피드만을 맹목적으로 쫓던 시대에 경종을 울렸고, 이후 서킷 배리어 개선과 차량 구조 안전성 확보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촉발시켰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시에 안착된 요헨 린트의 묘
오스트리아 그라츠시에 안착된 요헨 린트의 묘

그가 사망한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중앙묘지(Zentralfriedhof)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세계에서 모여든 무려 20 명의 인파가 운집해 시대의 영웅이 떠나는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그라츠 시는 2007 그의 유해를 시의 공식 명예 묘역(Ehrengrab)으로 지정하며 그가 남긴 위대한 발자취를 영원히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요헨 린트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비운의 레이서가 아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판히오나 이탈리아의 아스카리처럼 자국을 대표해 불꽃처럼 가장 뜨겁고 빠르게 타올랐으며, 너무나 이른 죽음조차 그의 압도적인 스피드를 가두지 못했기에 모터스포츠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진정한 영웅이다.


8) 주요 기록

  • F1 출전: 62회
  • 우승: 6회
  • 포디움: 13회
  • 폴포지션: 10회
  • 패스티스트 랩: 3회
  • 월드 챔피언십: 1회 (1970녀느 사후 확정)
  • 데뷔년도 / 은퇴년도: 1964년 / 1970년
  • 역사적 랭킹 특징: F1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후(死後) 월드 챔피언
    • 1965년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 종합 우승 달성

제가 뉴스레터 시즌 2를 시작하고는 항상 FP (연습) 세션까지만 보고 뉴스레터를 발송하고는 하는데요. 오늘은 조금 늦어졌습니다. 때문에 퀄리파잉 내용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점 참고하여주시고요.

당장은 아니지만 뉴스레터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F1 인터뷰 전문 채널로도 발전시켜볼 생각입니다. 그 때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죠. 이번엔 같은 나라 사람인 토토 볼프로!!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재밌게 보시고 저는 다음주 주말에 뉴스레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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