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클레르 딜레마 | 초대 챔피언 후안 마누엘 판히오 이야기

페라리에서 그랑프리 우승까지 가장 오래걸린 드라이버 TOP10

2026.06.20 | 조회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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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축구는 잘 보고 계신가요? 경기 결과보다는 축구 자체를 즐기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재미삼아 F1 베스트 11
재미삼아 F1 베스트 11

저는 F1과 축구를 연관지으면 꼭 이 선수가 생각 나더라고요. 어릴 때 직접 이벤트 축구중계를 본 기억도 있는데요.

오늘은 오프닝으로 축구의 신... 아니 아니,... F1의 신, 미하엘 슈마허의 축구 장면을 올려보며 뉴스레터를 시작합니다!

슈마허 축구 진짜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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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클레르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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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F1 시즌 중 7개 레이스가 마무리된 가운데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키미 안토넬리가 챔피언십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뜻밖(?)에 루이스 해밀턴이 페라리와 함께 월드 챔피언십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지난 주 뉴스레터에서 바르셀로나 업데이트가 성공일지 폭망일지 지켜보자 말씀드렸는데요. 결과적으로 업데이트 이후 페라리가 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허용된 엔진 향상 기회가 추가로 존재한다는 점은 페라리가 메르세데스의 강력한 시즌 경쟁자가 될 것을 시사하고 있기도 한데요. 에어로 측면에서 레드불이 가장 강력한 내연기관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 상황에서 애초에 메르세데스는 그보다 약하고, 페라리는 애초에 더 약한 엔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페라리는 초반에 작은 터보를 사용한 스타트에 강점을 가지고는 있었는데요. 바르셀로나와 모나코에서 보았듯 이제 그 이점은 사라졌네요.

사진을 클릭하면 페라리 업데이트 내용으로 이동합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페라리 업데이트 내용으로 이동합니다.

다른 팀들이 스타트에서 우월했던 페라리와의 격차를 좁혔기에 페라리는 이제 더 많은 출력을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르셀로나는 엔진보다는 섀시가 중요한 트랙으로, 긴 코너를 빠르게 통과하기 위한 그립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페라리의 섀시가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보시면 됩니다만, 엔진이 여전히 메르세데스 수준엔 미치지 못하고 출력도 안되기 때문에 긴 시즌을 치르면서 지속적으로 메르세데스를 압박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데요.

이 와중에 해밀턴이 페라리의 에이스(?)로 올라온 것이 기쁘면서도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맥클라렌-메르세데스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아무래도 과서 해밀턴을 좋아했기에 해밀턴의 재기가 반갑지만 어찌됐든 2020년대 들어와 지금까지의 페라리의 얼굴은 샤를 르클레르라고 생각하고 있고, 최근 3번의 레이스는 르클레르에게는 상당히 끔찍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르클레르에게 가장 처참했던 부분은 바르셀로나 그랑프리 레이스 도중 해밀턴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팀 오더'였을 텐데요. (물론 3-STOP과 2-STOP 전략으로 나뉘었던 페라리기에 팀의 명령에 명목은 있었지만... 늘 전략적이라는 이유겠지..) 최근 흐름을 타고 있는 해밀턴에 르클레르가 주도권이 없어져보이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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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바세르 페라리 팀 감독이 해밀턴을 직접 영입했다는 사실이 르클레르에겐 부담일겁니다. 최근 몇년의 페이스를 보면 분명 현재는 르클레르가 여전히 해밀턴보다 더 빠른 드라이버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건 26년의 차량에서 르클레르의 주행에 실수+사고가 잦아졌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브레이킹 실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차량 변화가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고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과거 그라운드 이펙트 차량에서는 코너를 빠르게 진입할수록 그립이 증가하는 거친 주행이 필요했고, 공격적 성향이 간했던 르클레르는 이를 바탕으로 좋은 기량을 뽐냈으니까요.

그러나 현재의 차량은 더욱 미끄러지는 성향이 있어 한층 섬세한 주행 기술을 요구하는게 사실이며, 이는 해밀턴 주행 습관을 보았을때 분명 유리한 부분입니다.

2주 후 펼쳐질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는 추가로 엔진 업그레이드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페라리의 엔진이 메르세데스와 경쟁할 수 있다면 시즌 후반 판도에 재밌는 그림이 연출 될 수도 있겠습니다.


DNF는 이제 그만!!

구독자님, 바르셀로나-까탈루냐 GP에서 안토넬리의 머신이 멈추며 DNF되는 걸 보셨죠? 토토 볼프 감독도 반복되는 리타이어는 팀 입장에서 절대 감당할 수 없다고 했는데요. 불과 두 경기 전인 캐나다에선 조지 러셀의 차도 1위로 달리다 DNF되는 결함이 있었는데, 이제 메르세데스가 문제의 원인을 추적하는 데 성공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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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기술 감독 제임스 앨리슨이 메르세데스 공식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대부분의 위험 영역이 이제 파악되어간다고 했거든요.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링크로 들어보세요.)

들어보시면 나름 기술적인 내용들을 이해하시기 좋을 것 같습니다. 

앨리슨은 공식 팟캐스트에서, 엔진 쪽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다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배터리의 비슷한 구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올 해 문제를 겪은 것은 메르세데스 워크스 팀뿐만은 아닌데요. 커스터머 팀들, 특히 맥라렌의 경우도 중국에서 노리스와 피아스트리 모두 출발도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거의 저주 받은 줄...) 여기서도 각각 (서로 다른) 배터리 문제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F1 규정 도입이 새로 되면 언제나 첫 시즌에는 불안정한 컨디션을 제공할 수 밖에 없는데요. 그래도 이 정도면 확실히 90년대나 2000년대에 비해 빠르게 원인들이 파악되고 문제가 바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메르세데스는 왜 러셀을 위한 항소를 철회했을까?

메르세데스가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조지 러셀이 억울하게 받은 페널티를 재검토 해달라고 항소한 사실 알고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메르세데스 팀은 이 항소를 다시 철회했습니다.

다소 놀라운 결정이기도 한데요, 메르세데스가 성명서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피에르 가슬리의 타임 페널티가 취소된 후, 피트레인 속도 위반으로 러셀이 받은 페널티가 그의 레이스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가용한 모든 옵션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했다"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르셀로나 레이스 주말 동안 재검토를 요청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일단 신청서를 제출했던 것" 이라고도 했는데요.

이 후, 메르세데스는 FIA 그리고 F1 측과 공동 논의 및 검토 후 앞으로 이런 요인들이 있을 경우 선제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F1측의 의지표명을 확인한 상태에서 구태여 재검토 요청을 추진하는 것은 이 스포츠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게 메르세데스의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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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메르세데스 본부가 있는 브랙리에서는 러셀의 페널티를 다시 심사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러셀은 레이스 도중 드라이브스루 페널티를 이미 소화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를 되돌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메르세데스가 '재검토 권리(Right of Review)'를 계속 주장했다면, 경기 결과도 못바꾸고 FIA에게 업무 스트레스만 주며, 특히 F1의 하이라이트이자 상징과도 같은 모나코 그랑프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추가로 양산되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슬리의 사례를 보면 레이스 도중 두 번의 5초 타임 페널티를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이득을 얻게 되었는데... 이건 그냥 서류상에서 숫자를 지우면 되니까 부당한 페널티라 판단되면 취소 실행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형평성을 생각했을때 이러면 누가 타임 페널티를 레이스 중에 소화할까요?

현재는 레드불과 맥라렌이 공식적으로 항의해 'FIA 국제 항소 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간 상황입니다.


F1에서 친환경이 가능하냐?에 대한 FIA의 대답

레이스 얘기만 하니 지루해서 다른 얘기를 좀 해보도록 할께요. ㅎㅎ

F1은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사실상 '0'으로 만드는 '넷제로' 목표를 선언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내연기관의 엔진을 가지고 친환경을 선언할 수 있지? 라고 하실텐데요. 지구 환경오염이 화두가 된 21세기에 F1과 골프같은 스포츠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FIA도 이런 부분을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최대한 레이스 외 적인 부분인 물류, 공장시설 등에서 친환경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자체적으로 보고서도 꾸준히 내고있고, 계획적으로 잘 진행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2025년 기준 F1의 배출량은 148,805톤이었는데 전년도보다 무려 11.8%나 줄어든 성과입니다. 배출량 집계를 시작한 2018년의 228,793톤과 비교해보면 벌써 35%나 감소했어요. F1의 최종 목표는 2030년까지 탄소 발생을 50% 줄이고,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배출량은 환경 보호 프로그램을 통해 메꾸는 겁니다. 

비록 이번 시즌은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경기가 취소되면서 원래 24경기에서 22경기로 단축되긴 했지만, 그 방대한 장비와 인력이 움직이면서도 배출량을 이만큼 줄였다는 건 놀랍습니다.

팀들이 공장과 시설에서 친환경 에너지를 쓰고, 지속 가능한 항공 연료나 해상 화물용 친환경 연료에 아낌없이 투자한 덕분인데... (솔직히 팀들은 돈이 더 들어가요 ㅠㅠ)

2023년 오스트리아에서 시범 운영을 한 뒤로, 지금은 유럽 그랑프리의 모든 패독이 태양광 에너지와 수소 처리 식물성 기름을 결합한 전기로 돌아가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F1이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건 모터스포츠가 생존(?)하기 위해서란 명분을 따지면 잘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2026년부터는 마이애미와 몬트리올 경기 일정을 가깝게 붙여서 대륙 간 이동을 줄이는 노력도 병행한다고 하네요.


2027년 타이어 테스트

환경 보호만큼 다가올 2027년 기술 규정 준비도 쉴 틈 없이 진행되고 있는 F1입니다. 바르셀로나 그랑프리가 끝나자마자 피렐리가 2027년에 쓸 새로운 슬릭 타이어의 성능을 테스트했습니다. 슬릭 타이어는 맑은 날 쓰는 겉면이 아주 매끈한 타이어를 말합니다. 이번 테스트에는 페라리, 애스턴 마틴, 캐딜락 팀이 동원됐고, 중간 정도의 단단함을 가진 C2 타이어를 집중적으로 시험했습니다. 페라리의 르클레르 형제, 애스턴 마틴의 잭 크로포드, 캐딜락의 저우 관유가 투입됐는데요. 스페인의 무더위로 인해 트랙 표면 온도가 57-58°C까지 올랐는데 이정도면 공기 온도는 36°C도 정도 됩니다. 

다음 테스트는 영국 실버스톤 그랑프리 직후 메르세데스와 윌리엄스가 협력한다고 하네요.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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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바르셀로나-까탈루냐 그랑프리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루이스 해밀턴을 보며 준비했습니다. 

페라리로 그랑프리 우승까지 가장 오래걸린 드라이버 TOP10

10위: 로렌조 반디니 - 14 레이스만에 우승

이탈리아 드라이버인 로렌조 반디니는 1962년 페라리와 사인했는데, 모든 레이스에 등판(?)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면 페라리 차량으로만 시즌을 치른게 아니라 스쿠데리아 센트로-수드 팀에서도 레이스를 소화했기 때문인데요. 당시 페라리는 드라이버가 많아 (필 힐, 바게티 등 5명이 넘었음) 반디니가 매번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거두절미 하고 1964년 시즌 그는 딱 1승을 거뒀는데, 그게 바로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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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게하르트 베르거 - 15 레이스만에 우승

오스트리아 드라이버인 게하르트 베르거는 1987년 페라리와 계약했는데, 당시 페라리는 너무 많은 리타이어로 시기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거는 1987년 스즈카에서 센세이셔널하게 우승하며 티포시에게 우승컵을 안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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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위: 질 빌네브 - 18 레이스만에 우승

요즘 팬들도 캐나다 그랑프리의 '질 빌네브 서킷'으로 모두 아실만한 질 빌네브입니다. 1977년도부터 페라리를 탔고 우승 기회가 많았지만 매번 운이 따라주지 않아 놓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1978년 홈 그랑프리인 캐나다 GP에서 결국 우승의 한을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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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6위: 필 힐 - 19 레이스만에 우승

필 힐은 미국인 드라이버로, 페라리로 우승까지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1960년 몬자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했고 이듬해엔 두번의 GP 우승을 추가하며 월드 챔피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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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6위: 디디에 피로니 - 19 레이스만에 우승

1981년 페라리에 데뷔한 프랑스 드라이버 디디에 피로니는 데뷔시즌에는 포디움에도 들지못하며 부진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차량이 개선된 1982년 이몰라에서 첫 우승컵을 따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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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볼프강 그라프 베르게 폰 트립스 - 20 레이스만에 우승

독일인인 베르게 폰 트립스는 1961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를 위한 첫 우승을 따냈습니다. 당시에는 그랑프리 숫자가 지금과 비교해 현저히 적었기 때문에 20 레이스라고 해도 꼬박 5년이 걸렸습니다. 어렵게 우승을 차지한 이 후 상승세를 이어가며 드라이버 포인트 순위 1위까지 갔지만 같은 해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레이스 중 불운의 사고로 운을 달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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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루이스 해밀턴 - 31 레이스만에 우승

8회 월드 챔피언에 빛나는 루이스 해밀턴은 2025년 페라리로 이적하고 해당 시즌 단 한번의 포디움도 기록하지 못하며 부진했지만 지난 주 페라리 데뷔 후 31 레이스만에 우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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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카를로스 사인츠 - 32 레이스만에 우승

해밀턴도 굉장히 오래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인츠는 더 오래 걸렸습니다. 2021년 페라리로 이적한 첫 해에는 무관이었으나 2022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무려 32 레이스만에 꿈에 그리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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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에디 에어바인 - 50 레이스만에 우승

북아일랜드 출신 드라이버인 에어바인은 1996년부터 페라리 드라이버가 됐습니다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불멸의 레전드인 미하엘 슈마허가 페라리의 넘버1 드라이버였고, 당시에는 페라리가 절대적으로 넘버1을 지지했기 때문에 팀 내부적인 이유에서도 우승하기 어려웠습니다. 에어바인은 50번의 도전 끝에 1999년 호주 그랑프리에서 값진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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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장 알레시 - 68 레이스만에 우승

1989년 F1에 데뷔한 프랑스 드라이버 장 알레시는 데뷔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하며 재능을 인정받아 페라리에 눈도장을 받고 1991년에는 계약까지 하게됩니다. 팀 동료였던 베르거와 마찬가지로 80년대 후반은 페라리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우승권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알레시는 1995년이 되어서야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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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기록: 영웅들은 기억된다』 시리즈 연재

트랙 위에 마에스트로 - 후안 마누엘 판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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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 마에스트로!

만약 한 선수의 하이라이트를 단 하나의 레이스에 빗대어 압축해야 한다면, 후안 마누엘 판히오에게는 의심의 여지 없이 1957년 독일 그랑프리가 될 것이다. 이 레이스는 단순한 우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기술이 기계적 한계와 불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한 편의 서사시였으며, 판히오를 단순한 챔피언에서 '마에스트로(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의 다섯 번째 월드 챔피언십을 확정 지은 이 경기는 그의 불굴의 정신과 완벽한 기술을 상징하는 전설로 남아있다.

1957년 뉘르부르크링, '녹색 지옥'이라 불리는 이 험난한 서킷에서 판히오는 자신의 다섯 번째 타이틀 확정까지 단 6점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마세라티 250F의 연료 탱크를 절반만 채우는 과감한 전략을 세웠다. 가벼운 차체로 초반에 격차를 벌린 뒤, 레이스 중반에 타이어 교체와 함께 재급유를 한다는 계산이었다. 계획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그는 30초의 리드를 안고 13랩에서 피트인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계산된 정밀함은 혼돈으로 바뀌었다. 휠 너트가 고착되면서 피트 스톱은 영원처럼 길어졌고, 그가 트랙으로 복귀했을 때 페라리의 마이크 호손과 피터 콜린스는 이미 50초 이상 앞서 있었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판히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10랩 동안 마치 다른 차원의 주행을 선보였다. 매 랩마다 신기록을 경신하며 미친 듯이 페라리 듀오와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그의 추격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는 페라리의 최고 기록보다 무려 11초나 빠른 랩 타임을 기록하며 격차를 줄였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고, 경쟁자들은 백미러에 점점 더 커지는 마세라티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에서 두 번째 랩. 판히오는 먼저 피터 콜린스를 추월했고, 곧이어 마이크 호손마저 제치며 선두를 탈환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역전극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많은 이들, 특히 그의 동료 스털링 모스는 이 경주를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브로 평가한다.

레이스를 마친 후, 그는 땀에 젖은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렇게 빨리 운전한 적이 없었고, 다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한 문장은 그날 그가 쏟아부은 모든 것을 증명했다. 이 영웅적인 순간은 그의 경력을 넘어,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위대한 정신의 뿌리는 아르헨티나의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에서부터 단단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2) 아르헨티나 소년정비공

한 위대한 인물의 강인한 성격과 흔들리지 않는 집념은 종종 그의 뿌리 깊은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다. 후안 마누엘 판히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에서 보낸 그의 겸손한 유년 시절은 훗날 트랙 위에서 보여줄 강인한 정신력과 기계에 대한 천부적인 이해의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전설은 화려한 유럽 서킷이 아닌, 척박한 땅에서 묵묵히 기름때를 묻히던 어린 시절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판히오는 1911년 6월 24일, 아르헨티나 발카르세에서 이탈리아 아브루초 출신의 이민자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정직, 성실, 자기 훈련과 같은 귀중한 가치를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 축구공을 다루는 독특한 자세 때문에 '엘 추에코(El Chueco, 안짱다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의 운명은 그라운드가 아닌 정비소에 있었다.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동차 정비소에서 보조로 일하기 시작하며 기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군 복무 시절, 그의 뛰어난 운전 실력은 지휘관의 눈에 띄어 공식 운전병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제대 후 그는 자신의 정비소를 열었고, 직접 개조한 1929년식 포드 모델 A 차량으로 지역 레이스에 참가하며 레이서의 꿈을 키웠다.

그의 초기 경력을 단련시킨 무대는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아르헨티나의 장거리 공개 도로 레이스, '투리스모 카레테라'였다. 그는 쉐보레를 몰고 1940년과 1941년 연속으로 챔피언에 올랐다. 특히 안데스 산맥을 넘어 10,000km를 달리는 '그란 프레미오 델 노르테'와 같은 경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수천 미터 고도의 산악도로, 타는 듯한 사막,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계 고장과 싸우며 완주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비극이 찾아왔다.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카라카스 레이스 도중, 안개 낀 어두운 해안 도로에서 그의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동승자이자 친구였던 다니엘 우루티아가 목숨을 잃었다. 깊은 죄책감과 우울증에 빠진 그는 레이스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지만, 주변의 격려 속에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투리스모 카레테라'⌕의 혹독한 환경에서 배운 교훈들—기계적 한계에 대한 이해, 심리적 인내력, 예측 불가능한 노면을 읽는 능력—은 단순히 유럽 무대를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교적 평탄한 포뮬러 원 서킷을 정복하는 데 사용될,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투리스모 카레테라(Turismo Carretera)'는 아르헨티나의 최상위 스톡카 레이싱 시리즈입니다. 이 레이스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되고 인기 있는 모터스포츠 중 하나로, 특히 NASCAR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3) 40세 챔피언, 그리고 부상

모터스포츠의 역사는 젊은 천재들의 등장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판히오는 38세라는, F1 드라이버로서는 황혼기에 가까운 나이에 유럽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등장은 F1 초창기에 즉각적인 파란을 일으켰으며, 오랜 시간 남미의 거친 도로에서 축적된 그의 경험과 노련함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이 처음으로 개최되던 해, 판히오는 알파 로메오 팀의 일원으로 역사적인 첫 시즌에 데뷔했다. 그는 모나코, 스파, 랭스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스피드를 과시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무난한 초대 챔피언 등극을 예상했지만, 잦은 기계 고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실버스톤에서는 오일 펌프 파손으로 리타이어하는 등 결정적인 순간마다 불운이 겹쳤다. 결국 타이틀은 팀 동료인 주세페 파리나에게 돌아갔지만, 트랙 위에서 보여준 순수한 속도는 판히오가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듬해인 1951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페라리의 신성 알베르토 아스카리를 제치고 생애 첫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40세의 나이에 F1의 정점에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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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1952년, F1 규정이 F2로 변경되자⌕ 그의 소속팀 알파 로메오가 챔피언십에서 철수했다. 하루아침에 소속팀을 잃은 디펜딩 챔피언은 시즌 초반을 벤치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이탈리아 몬차에서 열리는 비챔피언십 레이스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북아일랜드에서의 다른 레이스를 마친 후, 연결 항공편을 놓친 그는 몬차까지 밤새도록 알프스 산맥을 넘는 무모한 운전을 감행했다.

레이스 시작 30분 전, 극도의 피로 상태로 서킷에 도착한 그는 결국 예견된 비극을 맞았다. 레이스 단 두 바퀴 만에 컨트롤을 잃고 트랙을 이탈했고, 차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나무와 충돌하며 산산조각 났다. 그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가 목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그렇게 그의 1952년 시즌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 끔찍한 사고는 그의 경력을 완전히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닌, 모터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기의 서막이었다.

⌕1952년 F1 규정이 F2(포뮬러 2) 규정을 따르게 된 주된 이유는 1951년 시즌 종료 후, 기존 F1 엔진 규정에 맞는 레이스 카를 제작할 수 있는 팀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F1 팀이 재정난이나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F1 기준에 맞는 차량을 만들지 못하게 되자, F2 규정으로 대체하여 시즌을 진행하게 되었다.


4) 천재 저니맨, 시대의 우승 청부사

모터스포츠 역사상 한 명의 드라이버가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꾸준히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하지만 후안 마누엘 판히오는 이 통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그는 무려 4개의 다른 팀 소속으로 5번의 월드 챔피언십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는 그의 독보적인 실력과 그 어떤 기계나 팀 환경에도 즉시 적응하는 경이로운 능력을 증명한다.

그의 위대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팀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스털링 모스는 이렇게 말했다. "판히오가 항상 최고의 차를 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최고의 드라이버였기 때문이다!" 이 한마디가 그의 황금기를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1953년 마세라티와 함께 챔피언십 2위를 차지하며 건재함을 알린 그는,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했던 메르세데스-벤츠에 합류하여 2년 연속 챔피언십을 제패했다. 특히 1955년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에서는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으면서도 레이스를 완주하며 우승하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주요 라이벌이었던 알베르토 아스카리가 순수한 속도의 기준점이었다면, 이제 판히오는 경험과 레이스 운영 능력에서 그를 넘어섰다.

1956년 페라리로 이적했을 때, 그의 적응력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엔초 페라리는 판히오의 잦은 팀 이적을 비판하며 "판히오는 어떤 브랜드에도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스털링 모스는 "그가 최고의 드라이버였기 때문!"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엔초와의 불편한 관계와 다루기 힘든 란치아-페라리 D50 머신에도 불구하고 판히오는 자신의 기량을 증명했다. 시즌 마지막 레이스에서 그의 머신에 문제가 생기자, 당시 챔피언십 우승 가능성이 있던 팀 동료 피터 콜린스가 주저 없이 자신의 차를 판히오에게 양보했다. 이 전설적인 스포츠맨십 덕분에 판히오는 네 번째 타이틀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7년, 그는 다시 마세라티로 돌아와 그의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 타이틀을 획득하며 전설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제 그의 경쟁 상대는 총명하고 젊은 '제자' 스털링 모스였고, '마에스트로' 판히오는 자신의 모든 경험과 지혜를 동원해 그를 앞서야 했다. 그의 전성기는 단순히 기록의 나열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기술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낸 위대한 도전의 역사였다.


5) 필살기는 '포휠 드리프트'

1950년대 포뮬러 원은 순수함과 야만성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안전벨트나 롤케이지 같은 기본적인 보호 장비조차 없었고, 드라이버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트랙을 달렸다. 이러한 극도로 위험한 환경에서 판히오가 5번의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빠른 속도나 대담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강점은 어린 시절 정비사로 일하며 쌓아 올린, 기계에 대한 깊고 본능적인 이해력에 있었다.

당시의 F1 레이스는 3시간 이상 지속되는 극한의 체력전이었다. 무거운 스티어링 휠과 수동 기어 변속으로 손에 물집이 잡혔고, 엔진의 열기는 그대로 드라이버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판히오의 기술적 통찰력은 그를 경쟁자들과 차별화시켰다. 그는 레이스가 끝나면 종종 직접 렌치를 들고 정비사들과 함께 차를 분해하며 문제점을 파악했다. 이는 팀의 사기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머신의 성능을 최적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기계적 교감은 그의 드라이빙 스타일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네 바퀴를 모두 미끄러뜨리며 코너를 공략하는 '포휠 드리프트(four-wheel drift)' 주행법의 선구자였다. 이는 관중을 열광시키는 화려한 기술인 동시에, 당시의 조악한 타이어와 서스펜션을 다루기 위한 가장 실용적인 해법이었다. 그의 손과 발은 스티어링과 페달을 넘어, 차체의 미세한 진동과 무게 이동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었다.

그의 경력은 F1 머신 진화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전쟁 이전 시대의 유산을 간직한 알파 로메오 '알페타'부터, 인보드 브레이크와 같은 혁신적 기술이 집약된 메르세데스 W196, 그리고 F1의 아이콘으로 남은 마세라티 250F에 이르기까지, 그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머신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팀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머신에 빠르게 적응하고 즉시 최고의 성능을 이끌어내는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그를 단순한 드라이버가 아닌 '마에스트로'로 불리게 한 것은 바로 이 기술적 통찰력이었다.


6) 인간적인 인품을 가진 형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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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위에서 판히오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승부사였지만, 헬멧을 벗은 그의 모습은 따뜻함과 겸손함, 그리고 깊은 인간미가 가득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털링 모스가 "우리 대부분은 개자식들이었다(Most of us are bastards)"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치열했던 당시 F1 세계에서, 판히오의 인격은 단연 돋보였다. 그와 같은 전설이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인간적인 매력에 있다.

  • 성격과 동료애: 스털링 모스는 판히오를 '마에스트로'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말했다. 판히오는 경쟁자들에게조차 관대했고, 그의 페어플레이 정신은 모두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고, 패배한 상대를 위로할 줄 아는 진정한 신사였다.
  • 고난과 재기: 1952년 몬차에서의 끔찍한 사고는 그의 선수 생명을 위협했다. 목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기나긴 재활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다음 해 트랙에 복귀했다. 이 시련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 쿠바 납치 사건: 1958년,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정점에 달한다. 쿠바 그랑프리 참가를 위해 하바나에 머물던 그는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에게 납치되었다. 전 세계가 그의 안전을 걱정했지만, 그는 29시간 만에 무사히 풀려났다. 놀라운 것은, 납치범들조차 그의 온화하고 위엄 있는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극진히 대우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이 사건을 "또 하나의 모험"이라 부르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개인사: 판히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안드레아 베루에라는 여성과 20년 이상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사후에는 DNA 검사를 통해 세 명의 아들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트랙 안팎에서 겪은 수많은 시련과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그를 단순한 챔피언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여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속도와 경쟁을 넘어선, 한 인간의 위대한 여정 그 자체이다.


7) F1의 대부가 되다.

후안 마누엘 판히오의 유산은 딱딱한 숫자로 기록된 통계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의 이름은 모터스포츠의 정신과 철학 그 자체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그가 남긴 발자취는 후대의 모든 드라이버에게 영원한 기준점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챔피언이 아니라, F1이라는 스포츠의 근본을 세운 '대부(Godfather)'로 추앙받는다.

그의 5회 월드 챔피언 기록은 미하엘 슈마허에 의해 깨지기까지 무려 46년간 F1의 최고 기록으로 군림했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그의 우승률이다. 그는 자신이 출전한 52번의 그랑프리 중 24번 우승하여, 46.15%라는 전무후무한 우승률을 기록했다. 이는 F1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로, 그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증명한다.

판히오의 위대함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정받고 있다. 7회 챔피언 미하엘 슈마허는 "판히오는 내가 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라며 최고의 존경을 표한 적이 있고, 역시 7회 챔피언인 루이스 해밀턴은 그를 "우리 스포츠의 대부"라고 칭했으며, 전설적인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는 "진정한 월드 챔피언의 본보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의 정수는 트랙을 넘어선 그의 철학에 담겨 있었다. 그는 챔피언의 오만함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스스로가 최고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의 끝없는 자기 성찰과 겸손함을 상징하며, 모든 스포츠인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결론적으로, 판히오는 단순한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건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결코 품위와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진정한 신사였다. 아르헨티나의 흙먼지 속에서 시작하여 세계 모터스포츠의 정점에 섰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불굴의 의지, 기계와의 교감, 그리고 경쟁자마저 감동시킨 인품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의 이야기는 속도의 한계를 넘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탐구하는 여정이며, 이것이 바로 그가 영원한 '마에스트로'로 기억되는 이유이다.


8) 주요 기록

  • F1 출전: 52회 (51회 스타트)
  • 우승: 24회
  • 포디움: 35회
  • 폴포지션: 29회
  • 패스티스트 랩: 23회
  • 월드 챔피언십: 5회 (1951, 1954, 1955, 1956, 1957)
  • 데뷔년도 / 은퇴년도: 1950년 / 1958년
  • 역사적 랭킹 특징: F1 역사상 가장 높은 우승률 (46.15%), 4개의 다른 팀 소속으로 월드 챔피언십 획득, 최고령 월드 챔피언 (46세 41일)

 

드라이버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F1 기록: 영웅들은 기억된다』 시리즈는 제가 작년 12월부터 준비를 하다 멈춘 프로젝트입니다. 저도 공부할게 많아 할애되는 시간이 많은데.. 다시 한번 최대한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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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음 주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프리뷰와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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