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저를 알아 보시는 어느 사립대학의 교수님을 만났다. 정년이 한 해 남으셨다는 것을 보아 나와 거의 동연배일 것으로 추측한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을 만나고 오시고 오는 길이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온 세대와 지금의 세대의 삶이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보았다.
1985년 내가 KAIST를 졸업할 때까지 PC는 대중화하지 못했었다. 대학원 과정에서도 지도교수님이 새로 마련하신 플로피 디스크가 두 개 달린 IBM PC를 신기하게 바라 보았고 과제를 하려면 여전히 펀치카드를 사용해서 프로그래밍을 하던 IT의 여명기였다. 하지만 신입사원이 불과했던 나는 수출공장의 생산관리를 하면서 컴퓨터를 사용했던 인연으로 회사에 전산실을 기획하고 그 책임을 맡는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에 중견기업으로는 과감한 투자로 전산장비를 제공한 IBM에서도 놀란 대규모의 투자를 했고 나는 입사 1년의 경험 없는 신입 사원에 불과했지만 최고경영자께서는 나에게 내가 기획한 전산팀을 그대로 맡겨서 요즈음 용어로 표현하면 CIO (Chief Information Officer)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경험이 전무한 신입사원인 나를 믿고 그런 책임을 맡겨 주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당시 IT업계의 맹주였던 IBM은 역사상 아마도 가장 큰 경영상의 실패를 자각한 때였다. 퍼스널 컴퓨터의 대중화는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두 명의 스티브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에 의해서 본격화되었다. 1977년 Apple II가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대중화에 성공한 첫 PC였다. 이들의 성공에 놀란 IBM은 더 좋은 제품으로 시장의 표준을 장악하려고 했다. 1981년 당시의 애플의 컴퓨터는 8비트 컴퓨터였는데 16 비트로 컴퓨터의 성능을 대폭 향상한 IBM PC를 출시했다. 이때 운영체계 (OS)를 빌 게이츠에게 아웃소싱한 것이 오늘의 마이크로소프트를 있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IBM은 시장의 표준을 장악하려는 욕심에 자신의 기술을 공개해서 누구나 만들게 하는 개방 라이센스 전략을 구사했다. IBM은 PC의 표준을 바꾸고 장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수많은 회사들이 IBM이 개방한 기술로 IBM과 아무런 차이없는 호환 제품을 더 싼 가격으로 쏟아내면서 IBM은 이 사업에서 전혀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987년 IBM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버는 어이없는 상황을 반전시켜 보고자,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 때의 실패한 개방 정책을 포기하고 운영체계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하드웨어도 다른 회사들에게 라이센스로 개방하지 않는 새로운 PC를 출시하기로 한 것이다. 뒤늦게 애플 흉내를 낸 것이다. 당시 큰 기대를 모았던 PS/2라는 새로운 PC 사업을 계획하면서 IBM은 한국의 사업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내가 재직하던 회사가 당시 IBM의 중요한 고객사였고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무기기 회사였던 관계로 나는 IBM과 내가 다니던 회사와의 합작회사 설립 계획에 쉽사리 합의할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설립 자본금은 60억원으로 30년이 넘은 당시로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당시 대졸 사원의 월급이 30-40만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60억원의 크기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는 이 와중에 글로벌 대기업과 협상과정과 사업 준비과정에서 사업계획과 합작투자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특히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합작 상대는 물론 내부와의 설득과 협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어린 나이의 나로서는 큰 일을 해냈다는 큰 자부심을 갖게 된 프로젝트였다. 나는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쓰는 미래의 변화에 대해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개인용 컴퓨터와 이와 관련한 사업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워드 프로세스, PC용 프린터, 그리고 닌텐도의 게임기까지 많은 사업 제안과 구상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내가 그렇게 전망이 밝다고 생각하는 사업을 스스로 창업을 해서 해보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첫번째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창업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PC는 지금처럼 고객들이 쉽게 고르고 사는 품목이 아니었다. 이 생경한 신문물은 전시장과 교육장을 마련하고 고객에게 긴 설명과 교육을 통해서만 판매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합자 회사의 60억 자본금은 우리나라 5대 도시에 전시장과 교육장을 마련하는 부동산 임대 보증금으로 40억 이상이 사용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벤처 캐피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가 창업을 지원하겠다고 창투사를 설립하는데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해서 형식적인 창투사들은 설립되었지만 이들이 기술과 전망을 보고 사업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 순순한 창업투자는 대한민국에서 최근에서 도입되고 있을 뿐 당시의 창투사들은 창업가에게 담보를 요구하고 실패의 책임을 모두 창업자에게 지우는 창업투자로 가장한 고리 대금업이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수준이었다. 80년대는 자유저축의 금리도 10%가 넘는 자본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땅이 좁고 규제가 많은 대한민국의 부동산, 특히 서울의 부동산은 지금이나 그 때나 청년들에게는 한없이 비싸기만 했다. 그러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창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업을 하려면 구멍 가게라도 얻어야 가능했고 그마저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80년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청년들에게 지금 창업이 너무나 쉬운 세상으로 변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선은 자금이 넘치고 대출을 세일하는 세상으로 변화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앞다투어 창업자금지원과 공간 등의 지원을 하고 있다. 정부가 아니더라도 앤젤투자자, 기업의 벤처투자, 그리고 인큐베이터, 창업 악셀레이터, 벤처 캐피털들이 좋은 스타트업체를 혈안이 되어 찾아 나서고 있다. 이들 기관투자자들이 싫으면 국내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들을 통해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쉽사리 조달 받을 수도 있다. 국내 벤처캐피털 보다도 글로벌 벤처 캐피털들은 더욱 적극적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 유니콘 기업의 선두 쿠팡은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와 비전펀드에서 거금을 투자해서 성장해 왔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디지털 경제의 도래이다. 전자상거래의 효시는 1995년 아마존이 책을 처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면서 2000년까지 인류역사에 없었던 벤처투자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아마존은 오프라인 상점이 없이 사이버 부동산에서 상점을 열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 점이 우리나라의 창업에도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벤처투자의 빗장이 열린 것이다. 금융위기의 세상에서 창업 아이디어 우위의 세상이 열렸다. 또 하나는 부동산에 잠기는 거대한 자본이 필요 없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고객을 우리나라 내수 고객에 한정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변화가 왔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시작한 6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1세대 창업가들이 오늘날 재벌의 토대를 쌓았다. 그리고 70년대 이들의 성공을 재현해보겠다는 2세대 창업가들이었던 율산, 제세 그룹이 처참하게 실패하고 나서 우리나라는 90년대까지 창업 불모지였고 똑똑한 젊은이들의 꿈은 대기업에 취업해서 임원을 하는 것이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닷컴은 창업의 환경을 송두리째 쓰나미처럼 바꾸어 이 때 기회를 포착한 성공한 기업가들은 지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흥 재벌이 되어 있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NC소프트 등의 신화는 이러한 변화를 포착한 청년 창업가들의 결단의 결과다.
요즈음 대학에서는 좋은 학생들은 창업을 하고 박사과정에 올라오지 않는다고 나의 동료들은 걱정을 한다. 이는 대한민국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미래의 거대한 먹거리 장을 만든다면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나의 젊은 시절을 되새겨 볼 때마다 요즈음 청년들이 너무 부럽다. 지금 청년들은 사업 실패가 개인의 재정적 파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창업을 얼마든지 시도해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설혹 창업에 실패해도 기업들이 직원을 채용할 대 창업의 경험을 귀하게 사주는 시대가 되고 있다. 자본 뿐만이 아니라, 공간, 그리고 컨설팅 지원와 시장의 접근 지원까지 창업지원 프로그램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정치권과 구세대들은 여전히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창업지원 정책은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려고 하는 것이 주다. 지금은 자금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고 자금은 넘쳐나는 시대라서 정부의 자금지원은 벤처 생태계의 좀비 기업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모들은 여전히 안전한 삶에 대한 편견으로 청년들의 창업을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 창업은 처가까지 패가망신을 시키는 위험한 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IBM과의 합작투자 기획경험은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컴퓨터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IBM 브랜드를 활용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 이름에 IBM을 넣을 것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IBM의 로고를 합작회사 이름에 넣기 위해서는 IBM은 회사의 절대지분을 요구했다. 즉 지분 50% 플러스 1주를 그들이 가질 때만 허용하는 조건이었지만 내가 일하던 회사의 사주는 자신들의 절대 지분을 포기하는 합작을 나는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IBM 브랜드를 적극 활용하지 못하는 합작 계약이 이루어졌고 나는 내가 기획해서 시작한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했다. 컴퓨터가 지배할 세상에서 사무기기 회사에서 IT 사업으로 확대만이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확신했던 나는 이 과정에서 회사에서의 희망을 접고 다른 길을 모색했다. 전산실을 설립하고 관리하고 글로벌 기업과 합작투자를 기획했다는 내 경험을 자세히 적은 특별한 이력의 원서가 내가 박사과정을 지원하고 2주도되지 않아서 대학의 펠로우십 장학금으로 곧바로 입학허가를 받은 원인임은 내가 박사과정을 입학하고 나서 박사과정 책임교수님을 만나고서 알게 되었으니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던 셈이었다.
그 때 만약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이었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창업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경험을 나누는 이유는 청년들에게 아이디어가 있으면 창업을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헬 조선을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겠지만 나와 같은 세대에게는 너무나 부러운 일이다. 마음이 젊은이들이여 창업의 야망을 가져라. 그러기에 너무 좋은 시절이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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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이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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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균 이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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