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편지

2026.04.19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월입니다. 어느새 꽃은 대부분 떨어졌고요. 건물 사이사이 목을 내민 나무들이 대낮의 해 아래서 초록빛을 뿜어내는 것을 보니,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나봅니다.

 

꽃가루나 미세먼지나 마음 같은 다양한 것들이 부유하고 있는 봄과 여름 사이. 사월의 중간에서 저는 몇해째 휴가를 쓰고 단원고 기억교실에 방문합니다. 매해 이맘때에는 비바람이 불거나 하늘이 흐려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올해는 날이 맑고 포근하더군요. 제가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받는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선물을 한아름 안고 가는 기분으로, 익숙한 교실을 한 반씩 기웃거렸습니다.

 

그대로 보존하고 애도하는 것에 목적을 둔 공간이니 큰 변화가 있을 리는 없는 그곳에서 저는 늘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곤 합니다. 책상 위에 놓인 2와 9 모양의 생일 초, 방명록에 꽂혀있는 친언니의 청첩장, 그리고 "엄마가 깨워주는 아침이 좋다고 말하던 네가 그립다"고 적힌 편지까지. 기어코 흘러간 시간과 남아 있는 기억이 묻어있는 물건들을 보며 어떤 이는 고개를 젓고, 어떤 이는 한숨을 길게 내쉽니다. 저는 방문객용 메시지 카드 앞에서 어떤 말을 남겨야할지 고민이 길어집니다. 두서없이 이어진 문장들 끝에 결국 그날도 '잊지 않겠다'는 말로 마칩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는 말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요. 안산에서 서울로 이어진 긴 귀갓길에 정리되지 않는 이런저런 장면들을 꺼내어보았습니다. 그러다 지난 3월, 난지공원에 나무를 심으러 갔던 경험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곳은 쓰레기 매립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다보면 여전히 시멘트나 철근 같은 잔해들이 나오곤 합니다.

 

그리고 몇 주 전에는 회사 일로 외부 사진 작가님과 작업을 함께한 적이 있는데요. 시간이 붕 떠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그가 세월호 희생자였던 학생들과 나이가 같고 안산 출신이며, 그 참사 이후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사진과 영상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그날 공원에서 흙을 파다가 덜컹 철근에 삽이 걸리던 감각을 떠올렸습니다. 매년 교복을 입은 모습 그대로이던 그들이 어쩌면 지금쯤 이런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제야 덜컥 실감이 났던 것이죠. 결국 낯선 사람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기억교실에 매년 남기고 오는 '잊지 않겠다'는 말이 어쩐지 거짓말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매순간 그들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제 하루를 감당하기에도 벅찰 때에는 정말 잊고 사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런데 낯선 이와의 만남 이후로, 기억이란 매순간 떠올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일종의 감각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요. 그 감각은 사소하게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말로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때로는 여전히 반복되는 비슷한 슬픔 앞에서 멈추게 합니다.

 

여러분은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있나요?

 

2026년 4월 19일

현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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