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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으로부터 6호
달콤한 게으름 이야기를 보냅니다.
2024-05-02
우리는 그걸 Dolce Far niente 라고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달콤한 게으름.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죠.
영화 Eat, Pray, Love 중 지오반니의 대사.
로마를 향하는 비행기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운 좋게 휴무일이 8일이 연달아 생겼다. 나는 당장 떠날 수 있는 곳이 어디있나. 급히 찾아보고. 시간과 마음이 맞는 곳, 로마를 선택했다. 사실 로마가 아닌 포르토피노를 향한 여정이긴 했지만. 그 시작점과 종점은 로마다. 그렇게 나의 20대 마지막 봄, 이탈리아 여행을 맞이하게 됐다.
30분. 내가 집에서 출발하기 전, 짐을 챙겨야하는 시간이다. 그러다보니 당장에 필요한 것들만 캐리어 안에 급히 넣었다. 13시간의 비행동안 불쑥 ‘내가 그걸 챙겼나?’ 라는 생각은 끊임없이 떠오른다. 가방 안에 넣은 물건을 회상해보자. 편한 반바지, 상의 몇벌, 세면도구, 화장품은 스킨 로션과 선크림, 립스틱 하나. 노트북, 헤드셋, 충전기, 필름카메라, 여권, 일기장, 좋아했던 책 2권, 혹시 몰라 챙긴 비치타올 한장.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툭 넣어둔 예쁜 원피스.
눈에 밟히는 예쁜 옷들을 한번 더 머리 속에 떠오른다. 아, 그 옷 챙겨올걸! 맞다, 삼각대! 짐을 챙기는 순간, 공항에서 짐을 부치던 순간에도. 로마까지 비행 시간이 6시 48분이 남은 지금 이 순간까지. 여행에 가져오지 못한 물건에 대한 미련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모든 미련의 나에게 말한다.
사라지지 않는 미련을 없앨 순 없지만, 그래도 흘려 보내보자고. 가벼운 여정 조차 사랑해보자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렇게 나의 20대, 마지막 봄 여행의 부제를 지어본다.
로마 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제노아행 비행기로 환승했다. 이번 여행의 유일한 행선지, 포르토피노를 가기 위해서다. 사실, 친퀘테레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어쩐지 친퀘테레보다 포르토피노로 마음이 계속 기울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20대 마지막 봄을 보내며 나의 여행의 모토는 있는 그대로, 마음 기우는 대로 마음껏 선택해보기가 모토. 모토에 맞춰 아무 계획도, 정보도 없이 나는 포르토 피노를 향한 발걸음을 옮겼다.
제노아 공항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공항이었다. 사실, 제노아라는 도시 자체가 이탈리아 내에서도 크루즈가 머무르는 기항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고향 외에는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는 않은 터라 더 그런듯 했다. 짐을 찾는 수하물 수취대가 단 두개 뿐인 공항이라니. 불길한 예감을 언제나 빗나가지 않는다. 공항 도착장을 나가면 수많은 택시가 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택시 한대 없는, 거기에 우버, 프리나우(유럽에서 사용하는 택시 어플리케이션)도 서비스 이용 불가 지역이란다. 내가 방심했지. 유럽 여행은 정말이지 언제고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정신차려이각박한유럽세상속에서 ! (나에게 하는 말)
나보다 늦게 나온 이탈리아 현지인들은 어디서 그렇게 택시를 부르는지 기사에게 손짓을 하고 상호간에 이름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곧장 차를 타고 사라졌다. 나같은 이방인 그것도 승객 198명 중 유일무이한 동양인은 어쩌라고…! 안내판을 찾아봐도 없다. 이를 어쩐담. 싶었지만 생각보다 크게 멘털은 요동치지 않는다. 머리속으로 5분만 더 현장에서 탈 수 있는 택시가 오는지 기다려보자. 이 계획이 실패하면 호텔에 전화해 나를 좀 구해달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다.
“You! Taxi ! Chance!”
뒤를 돌아 나에게 말을 건 누군가를 바라본다. 비행기에서 내 뒤에 앉아 나를 한번씩 흘낏 바라보던 노란 반팔, 흰수염 아저씨다. 그는 내게 ‘바보야! 이번 택시 네가 타야해 ! 너가 먼저 이 대기줄에 섰잖아!’ 라고 말하는 듯, 이탈리안 특유의 손짓을 하며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섞어 말했다. 아마, 오고 있던 택시들이 대부분 이미 예약된 누군가의 차량이라는 것을 모르고 내게 먼저 타라고 했던 것 같다. 어리둥절해 하던 차에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Ciao!(안녕하세요)” 로 시작하는 이태리어로 대화를 하더니 금방 전화를 끊는다. 이후 내게 눈길 조차 주지 않는다. 나는 지도를 보며, 걸어가야 되나. 생각을 한다.
현장에서 택시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호텔로 전화하려고 구글 지도에 저장한 숙소 주소를 누를 때 였다. 내 앞에 택시가 한 대 멈춰 선다. 기사가 곧 내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곤, 노란 반팔 흰수염 아저씨가 손을 들고 그에게 향한다. 아저씨도 가시는군요. 안녕히 가세요. 곧 사라질 것 같던 그가 고개를 휙 돌려- 까딱, 나를 향해 손짓한다.
“Yours ! This Taxi! Yours!”
그는 시크하게 딱 세마디로 내 심금을 울린다.
깜짝놀라 “ME?” 대답하니 그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보니, 그는 나를 위해 택시 회사에 전화해 차량을 호출해 나를 먼저 태워보낸 것이다. 짐을 올리는 동안에 뒤돌아 할 줄 아는 유일한 이탈리아어. “Grazie!(고마워요)”로 그에게 인사했다. 차문을 닫아주며 “Prego!(천만에 만반에 말씀!)” 한마디 하는 신사 아저씨.
나도 처음 보는 누군가를 위해, 그것도 이 구역의 철저한 이방인인에게 이런 배려를 베풀 수 있을까? 내 것을 양보해 남에게 내어주는 그 마음 덕분에 숙소에서 짐을 푸는 순간에도. 웃음이 흘러 나오던 제노아의 밤이다.
이탈리아 시각 새벽 3시, 한국 시각 오전 10시. 명상 수업을 3시간 동안 들었다. 어제 숙소에 도착한 게 대충 오후 23시 30분쯤 되고, 이것저것 정리하다 잠든 건 00시 30분쯤 되니까 나는 겨우 2시간 30분 채 자고 일어나 하루를 다시 시작한 셈이다. 수련이 꽤나 힘들 것 같았는데. 3시간 수련을 마치고 새벽 6시가 되어 제노아 항의 새벽녘을 바라보니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곧바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어제 호텔 직원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제노아의 바질 페스토와 포카치아가 이탈리아 내에서도 유명해.” 어느 맛집으로 향할지 정해두지 않고 오직 포카치아. 바질페스토. 두개의 단어를 머리에 입력하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산책을 하며 잠시 마트에 들러보기도 한다. 마트에는 벌써 여름이 다가오는지 입구에서부터 납작 복숭아를 매대에 놓고 팔고 있다. 당장 먹을 건 아니여도 언젠가 먹겠지 싶어 납작 복숭아 두알을 집어 본다. 가방에 넣어두고 길을 가면서 먹을수도, 혹은 바다에 앉아 먹을수도 있잖아.
제노아 올드타운의 골목은 길마다 빵 굽는 냄새가 넘실 거린다. 빵 냄새에 홀려 정처없이 마을 골목을 구석 구석 거닐다 어느 젊은 여인 두명이 운영하는 포카치아 가게에 홀린듯 들어갔다. 이 구역의 포카치아 가게들 중 향의 농도가 가장 강하게 풍겨 오는 곳이니, 이건 맛 없을 수가 없는 가게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 검은색 머리를 질끈 묶은 이탈리아 여인이 내게 Buon giorno! 하고 인사한다. 그리곤 나의 주문을 천천히 기다려준다.
“가장 맛있는 메뉴가 뭐야?”
“치즈가 얹어진 기본 그리고 바질페스토와 모짜렐라가 올라간 포카치아를 추천할게!”
“당장 내놔! 그라찌에! ”
포카치아를 양손에 두둑히 얹고 나는 해변을 향한다. 거리엔 포카치아와 함께 하는 일상이 익숙하다는 듯. 한 손에 에스프레소, 또 다른 손엔 포카치아를 들고 나무 밑에서 아침식사를 즐기는 사람을 보고 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해본다. 나무 아래에서 한입. 그리고 바다를 보며 한입. 책을 읽으면서 한입. 달콤한 나의 여정의 둘째날도 한입.
오전 6시 42분, 비가 내리는 포르토 피노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여행을 하며 틈틈이 일기, 노트북, 때로는 책 한켠에 적어둔 글들을 모아 여러분에게 들려 드려요. 어딘가는 정돈 되지 않은 문장, 단어들이 곳곳에 보여 좀 더 수정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 이 여정의 신선함이 다 가시기 전에, 즉 여행을 마치며 회상하는 것이 아닌 이 공간과 시간에 그대로 머무르며 감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제 곧 포르토피노를 떠나 로마로 다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포르토피노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줄 수 있길 바라며. 그럼 모두, Dolce Far Niente!
Question .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마음이 편안하거나 행복했던 적이 있나요?
Answer . 혼자 생각해보기, 글로 써보기, 예은에게 보내주기 등등..
그럼, 일곱번째 편지에서 포르토피노 이야기로 만나요 :)
24년 05월 02일 목요일.
예은으로부터.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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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슈
너 혼자 좋은데 다니기냐
막간.예은으로부터 (75)
ㅋㅋ ㅋㅋ 홀연히 떠나고 돌아왔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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