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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으로부터 호
달콤한 게으름의 두번째 이야기를 보냅니다.
2024-05-04
우리는 그걸 Dolce Far niente 라고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달콤한 게으름.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죠.
영화 Eat, Pray, Love 중 지오반니의 대사.
제노아에서 기차로 50분 그리고 버스로 18분을 타고 가면 포르토피노에 도착한다. 지난 편지에서 내내 이야기했듯 나는 이번 여행에 아무런 정보도 계획도 없었다. 내게 주어진 정보는 오로지 구글 지도 하나인 채로 이곳 저곳을 다니고 있다. (그마저도 3일차 부터 지도 조차 켜지 않고 모르는 길을 홀린 듯 걸어 다녔다.) 그래서 버스 탑승 방법도 역시 몰랐다. 정말이지 막 여행하는 중이다. 다행히 3분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었는데 우연히 내가 타야 할 782번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오고 있다. 잠시만, 근데 버스 티켓이 없잖아. 신용카드로 탈 수 있나? 현금 결제 되나? 버스가 빨리 온 것은 좋았지만 나는 아직 버스 탈 준비가 안 됐다고요! 코 앞에 도착한 버스 앞에 ‘티켓을 사고 싶어? 어플을 다운로드해!’ 라는 광고 판을 확인한다. 포르토피노에서 역으로 돌아온 여행객들이 우루루 내리고, 버스 기사는 나를 보고 말한다. (누가 봐도 다급해 보였나보다. 국경을 뛰어 넘는 바디 랭귀지.)
“버스 교대 때문에 잠깐 기다려야해. 5분 정도!”
아니 선생님, 5분이 뭐야. 10분도 기다려줄 수 있지요. 속으로 안심하며 휴대폰에 어플 이름을 검색할 때, 방금 버스에서 내린 여행객 중 어느 부부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버스 티켓 있니?”
“('내 얼굴에 버스 티켓 없어요 가 써져있나?’... )아니 없어!”
“이거 우리 안 쓴 티켓이야 (내게 티켓을 보여주며)! 너 쓸래?”
“헉! 그럼 내가 돈을 줄게!”
“아니 괜찮아! 어차피 안 쓰는 건데 뭐!”
“……(눈썹을 8시 20분 모양으로 만들며) 고마워…….그라찌에….땡큐….”
“포르토피노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
너희도 좋은 하루 보내! 라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말 그대로 공짜 행운을 나눠준 부부는 유유히 뒤돌아 역을 향해 걷는다. 얼떨결에 버스 티켓을 손에 꼭 쥐어본다. App Store 검색창을 닫고, 쥐고 있는 티켓을 꼭 이 여행의 행운표처럼 간직한다. 이 티켓 한장을 일기장에 붙여 오늘의 행운을 기념 해야겠어. 히히. 혼자 아이처럼 웃으면서 말이다.
버스를 타고 포르토 피노를 가는 동안 창밖의 풍경이 아름다워,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을 몇개나 지나쳤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내가 봐온 여태까지의 모든 아름다운 장면을 무력하게 만들고야 말지. 사실, 정류장을 몇 개든 지나쳐도 상관없다. 돌아 가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둥근 돌모양의 도로 위로 말 발굽 소리 대신 캐리어 바퀴굽(?) 소리를 내며 숙소를 향한다. 숙소는 포르토피노 광장 옆에 위치해 정류장에서 걸어서 7분 거리. 마을의 광장과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집. 진한 분홍색 벽에 짙은 초록색의 문을 가진 나의 쉼터. 포르토피노에서 친해진 친구들은 내게 광장에서 “그래서 너희 집 어디야?”라고 물었고 나는 쉽게 “저기 분홍색 집! 보여?” 대답할 수 있었다. 열쇠를 3번 돌려야 열리고, 손잡이가 망가져 문을 밀 때는 녹슨 검은색 문고리를 이용해야 했다. 숙소 안에는 창문이 3개 있었는데 곳곳에 마을의 바다와 성당을 볼 수 있다. 방과 거실, 화장실로 이루어진 이 집은 나홀로 여행객인 나에게 안성맞춤. 일부러 많은 곳을 다니지 않아도 거실 식탁에 앉아 창밖의 광장과 잔잔한 해변을 바라보며, 집요하고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집 앞에 맛있는 젤라또 집이 있기도 했고.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나는 곧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었다. 누구 하나 날 찍어줄 이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한껏 기분을 내고 싶었다. 원피스에 쪼리 차림 으로 노트북, 일기장, 책 세개를 넣은 가방을 메고 숙소를 나선다. 어딜 가야할지 여전히 계획 없다. 숙소 앞 갈래 길에서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간다. 마을엔 노란 꽃나무가 길을 따라 곳곳에 심어져있다. 꽃나무에서는 특유의 달근한 향기가 풍겨온다. 지도 없이 노란 꽃나무의 향을 맡으며 산책하다 보면 때로는 노란 성당을, 때로는 마을을 지키는 성곽, 등대를 마주할 수 있다. 한낮에는 뜨거운 온도에 그 향기가 막 향수를 뿌린 것처럼 강하게 맡아지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꽃잎이 습기를 머금어 워터 디퓨저를 틀어 놓은 것처럼 은은하게 마을 전체를 덮곤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의 이정표가 세상에 또 있을까? 꽃 향기를 따라 그대로 또 걷고 걸었다. 걷다보니 성당 앞. 성당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들이? 하고 뒤를 보는 순간.
포르토피노의 풍경이 한눈에 담긴다. 나는 탄성과 함께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토했다. 감격, 탄성, 감동, 휴식. 네가지 감정이 동시에 일렁인다. 아름다고 예쁜 것에 무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넓은 세상에 여전히 이렇게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있다. 자연 속에서 나는 점처럼 아주 작은 존재임을. 땅 끝까지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이렇게 감격시키는 구나. 그렇게 한참을 성당 앞 돌 의자에 앉아 나는 포르토피노를 바라봤다.
발걸음을 옮겨 성벽을 향해 간다. 노란 꽃나무의 숲을 다시 한번 지나, 초록의 덤불 길을 따라간다. 가파른 절벽을 따라 길을 만들어 군데 군데 경사진 곳을 지나는데 성당은 보이질 않는다. 길을 잃었음을 직감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혹시 이 길이 성을 향하는 길이 맞아?”
“아니. 이 길은 등대를 향하는 길이야.”
정해둔 목적지는 아니지만, 그게 어디든 좋을거야.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고, 택시를 남들보다 늦게 타더라도 괜찮았던 것처럼. 흘러가는 대로. 발길이 닿는 그대로. 나의 여정의 흐름과 박자에 몸을 그대로 맡긴 채 그렇게 등대로 목적지를 수정했다. 사실, 등대에 도착해서 나는 등대 옆의 Bar라는 샛길로 세어버렸다. 사람들은 등대 옆에 위치한 작은 바에 앉아 저마다의 휴식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매혹된거지. 모자를 눌러쓴 어떤 이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노트북을 하고, 어떤 이는 맥주 잔을 부딪히며 이야기하는 모습. 아, 이 정도면 충분해. 화려한 음식을 팔지도, 값 비싼 인테리어 없이. 오직 이케아에서 산 것 같은 테라스 의자와 책상 그리고 쉬어가는 사람들만 있는 이 곳이면. 충분하다. 길을 잃어 나의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갈 지라도, 주어진 여정대로 가다보면 적당한 충만함을 선사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사람들 사이에 앉아 가져온 노트북과 일기장을 꺼냈다. 음료는 Portofino 이름이 들어간 칵테일 하나, 그리고 콜라 제로. 칵테일 바에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재즈 음악, 바 옆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나무잎 틈으로 보이는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와 머리 위 나무 잎의 살랑거림을 한번씩 올려다보고. 그렇게 한참동안 글을 써내려갔다. 살갗과 마음에 닿는 오늘의 모든 감정, 감각, 생각들을 나를 그냥 지나쳐버리기전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포르토피노의 저녁은 낮보다 훨씬 차분하다. 숙박 시설이 적어 대부분의 관광객은 당일치기로 이곳을 찾는다. 한낮에는 사람이 북적이다가, 오후 네시가 되면 사람이 빠져 금새 고요해진다. 해가 떠있을 동안은 활기찬 해변 마을, 달이 뜨면 차분히 그 기운을 가라 앉히는 곳이다. 활기와 고요를 동시에 가진 이 마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저녁에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을에 머무르는 몇몇 사람들이 노천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 역시 이곳의 명장면. 장면 속에서 나는 유일하게 짝 없이 혼자 앉아 식사하는 사람을 맡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내 앞, 뒤, 옆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나를 궁금해 했다. 그들은 내가 영어를 구사를 한다는 걸 알기 전까지 이런 류의 대화를 한다.
- 저 사람은 혼자 여행하나?
- 어머, 쟤 혼자서 편지 쓴다.
- 너도 혼자 여행을 좀 해봐라 딸아!
- 저 사람은 어쩌다 여길 혼자 왔을까?
몇번은 종업원과 나의 영어 대화를 듣고 이때다! 싶었는지 내게 잽싸게 말을 걸어 오는 이들도 있다. 덕분에 친구가 생기기도 했는데 특별히 토론토에서 온 모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와 4시간 동안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던 그녀들. 술에 취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80%는 이탈리아 여행, 음식,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나머지 20%는 한국과 캐나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취한 정신 속에서도 꼭 기억하고 싶었던 대화가 있었는지 다음날 아침 펼쳐본 일기장에 꼬불꼬불한 글씨로 영어 두문장이 적혀 있었다.
“Don’t rush anything for the future. When the time is right, It will happen.
Just Be here now.”
(미래를 위해 모든 일에 애쓰려고 하지마. 적절한 때가 찾아오면, 네게 저절로 일어날야. 그냥 지금 여기에 있어.)
그녀의 딸과 나는 나잇대가 비슷했다. 국적이 달라도 우리의 고민은 같았는데, 어쩌다보니 직업, 결혼,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됐고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엄마가 우리 사이에 툭 '나도 어렸을 땐 가진 거 하나 없었어. 이렇게 여행을 다니게 될 줄도 몰랐거든...' 라며 운을 떼고 시크하게 와인을 한모금 넘긴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아보면 아, 그때 그 일이 이래서 나에게 일어났구나. 생각할 때가 많아. 음식을 좋아했던 것,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생각들, 내가 몇번씩 바꿔가던 취미나 운동까지. 너희를 둘러싼 모든 사건들은 결국 너희 스스로가 되어 돌아올거야.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다 너희의 힘이 되고 있어.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 모든 일에 애쓰려 하지마. 적절한 때가 되면, 네게 저절로 일어날거야. 그러니, 지금 여기에 있어.
그녀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나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의 우연한 만남과 대화도 우리의 일부가 될까?"
"당연하지."
"그렇다면, 미래의 내가 먼저 너희들에게 인사할게. 먼저 말 걸어줘서 고마워!"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친절한 모녀는 내리기 시작하는 여우비는 게의치도 않는 지, 악수하던 손을 거두고 나를 한번씩 안아준다. 남은 여행도 안전히, 즐겁게 보내! 그 말을 하고 그녀들을 그렇게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밤 11시,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바다 위를 유영하듯 넘실 거린다. 점점 작아져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나를 떠올렸다. 무언가 하려고,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즐거웠던 오늘. 길을 잃고, 정류장을 지나쳐도 우연히 때가 되면 내게 주어지던 행운과 사라지던 만남들까지. 그 모든 것이 내가 된다. 아니 이미 나의 일부가 되었다.
Question . '아, 그때 그 일이 이래서 나에게 일어났구나' 라는 것을 느꼈을 때가 있나요?
Answer . 혼자 생각해보기, 글로 써보기, 예은에게 보내주기 등등..
Behind the scene
그럼, 여덟번째 편지에서 세번째 포르토피노 이야기로 만나요 :)
24년 05월 04일 목요일.
예은으로부터.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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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Matty
조금 늦은감 있는 답글를 남겨봅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빛에 반짝반짝이는 바다 그리고 평화로운 이탈리아의 해변마을이 눈앞에 그려졌어요. 작가님을 통해 낯선 곳에서의 설렘과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만남이 이어지는 이 여행에 초대해주셔서 고마와요~! 오늘도 작가님의 글을 통해 평온과 쉼을 얻고 갑니다.
막간.예은으로부터 (75)
Matty ! 따뜻한 답글 감사합니다 ! 부족한 제 글을 언제나 사랑해주셔서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 ! 오늘 하루도 Matty 의 하루가 안온하기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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