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에게
예은으로부터 13호
명찰 떼기 연습, 마지막 이야기를 보냅니다.
잘가 내 오랜 여름아 머뭇거리지 마
마지막 인사 대신 그저 널 안고 싶지만
멈춰버린 하늘에 별이 달리는 밤
내겐 영원 같았던 우리를 닫는다
- Bye, Summer (IU) -
2024-12-07
주연이 아버지, 명상 도반 선생님, 신 기장님. 2024년, 1월부터 10월까지. 한 해가 지나가는 시간동안 어른들의 명찰 떼기 연습을 지켜보며 나의 명찰을 떠올렸다. 나는 과연 잘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떼어 “이제 비행 그만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 순간, 또 눈물이 나는 건 아닐까. 두렵고 떨렸다. 스물부터 아홉까지. 나의 20대의 이름 없는 모든 날은 결국 승무원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나는 결국 나의 20대의 모든 명찰과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다른 일을 도전해보고 싶어.”
입버릇처럼 부모님에게 하던 말. 스물다섯부터 아홉까지 시간이 영영 흐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버려 아홉이 되었다. 나의 퇴사 계획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입사 동기 기주는 새해 첫날이면 나에게 늘 같은 질문을 했다.
“언니 진짜 내후후년에 퇴사할거야?” _ 21년 기주
“언니 진짜 내후년에 퇴사할거야?” _ 22년 기주
“언니 진짜 내년에 퇴사할거야?” _ 23년 기주
올해의 기주는 내게 ‘퇴사할거야?’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버릇처럼 말하던 ‘때려쳐~’ 를 서로 하지 않았다. 기주도 나도. 기주의 마음은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나는 ‘스물 아홉 퇴사의 실현’을 위해 아주 오랫동안 쌓아둔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형태의 용기. 살면서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다른 용기를 내고 살아봤던 건 처음이다. 퇴사의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이 형태는 점점 초연해지기 시작했는데 예를들면 이렇다.
✍🏻 예은의 용기 기록
객실 승무원 그만 둘 용기
익숙해진 업무에서 벗어날 용기
경험했던 성공, 환경을 모두 내려놓을 용기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날 용기
팀장님한테 퇴직원 보낼 용기
엄마 아빠한테 퇴사한다고 고백할 용기
좋아하는 직장 동료들한테 퇴사 고백할 용기
실패와 실망을 마주할 용기
(실제로 용기를 낼 때마다 일기장에 적어둔 목록입니다.)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현실보다 훨씬 커서 였을까. 용기로 완전 무장해서 그런걸까. 막상 퇴직원을 쓰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 회사에 들어올 땐 수기 자소서(못 믿겠지만… 수기로, 형식 자유, 질문도 지원자가 만들었던 형식임)를 5일 밤을 새워 꼬박 채워야 했는데, 나갈 때는 여덟칸도 채 안되는 개인 신상 정보와 퇴직 사유 하나면 끝이라니. 회사를 사랑하고, 직업을 사랑했던 모든 시간이 이렇게 종이 한 장으로 끝맺음 됐다. 그렇게 나의 퇴사가 확정되고, 나의 퇴사 소식을 온전히 나만 알고 있을 때, 후배 린은 내게 편지를 건넸다.
‘물맞댐’을 아시나요?
물고기가 새로운 환경에 갑자기 들어가게 되면 죽는다고 해요.
선배님이 마음의 온도를 맞춰주신 덕에 저는 낯선 세상에 물맞댐 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편지를 보며 나는 한국을 향하는 불꺼진 출근 버스에서 눈물을 주륵 흘렸다. 물맞댐.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 역시 물맞댐이다. 비행이라는 수조에서 나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수조로 들어갈 준비를 하니까 말이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밀도 있는 메세지를 받는다. 린의 이런 메세지가 그냥 내게 닿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냥이 없다. 모든 일, 감정, 메세지엔 이유가 있고 때가 있으니까.
자꾸 글이 길어지는 걸 보니 나는 여전히 내려놓는 중인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추억하고 싶은 것들도,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 글의 제목이 명찰 떼기 연습이라는 점에서 나는 내가 퇴사를 하며 겪었던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생에 퇴사는 처음이라 겪어보는 모든 감정이 생경하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고민하다 뉴스레터 구독자 [유진]과 나눈 메일을 이곳에 나누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게 가식 없는 나의 날것의 감정이거든.
유진의 질문 : 예은이는 올 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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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에게.
꿈과 작별하고 있어.
스물아홉에 접어드니까 나의 20대를 되돌아보게 되더라. 바른 생활 소녀처럼 틀에 갇혀 살아가던 대학생 시절이 떠오르고, 한가지 목표만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렸던 나를 자꾸만 돌아보게 됐어. 나는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객실승무원 외에 다른 꿈을 꿔본 적이 없거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진짜 무엇일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 마음을 채울 수 있을지, 아니 채우지 못하더라도 나를 온전히 호흡 할 수 있게 하는지. 그런 고민을 20대 후반에 들어서 계속 했던 것 같아.
‘서른이 되기 전에 퇴사 할거야.’
입버릇처럼 절친한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야. 서른에 퇴사해서 뭐할건데? 라고 누가 묻곤 했지. 그건 나도 몰라. 그때 되면 뭐라도 새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비행을 해왔어. 비행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어딘가에 가서 온종일 글을 써보고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5년을 유영했어.
2024년 1월이 되고 나는 올해 반드시 퇴사를 하겠다고 다이어리 첫장에 적어냈지.
봄이 오면 여름까지 더 다녀야지. 여름이 오면 가을 뉴욕은 가봐야지. 하면서 한달 두달 나는 퇴사를 미뤄왔어. 사실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 내게 주어진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 그리고사랑받고 있고 사랑을 주고 있는 이 집단을 나가는 것.
그 자체가 내게 상상 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과 두려움이 혼재한 상태. 그렇게 9월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고, 할까 말까의 기로에 서서 오늘은 잔류, 내일은 사직을 오락가락하던 나는 9월 말, 더 늦기 전에 나의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도전을 선택했지! 그렇게 11월 9일, 이 직업과 완전한 이별을 할 예정이야. 20대의 모든 순간마다 마음에 품었던, 여전히 사랑하는 꿈과 아름다운 작별을 만들고 싶어. 그래서 나름의 마음 규칙을 정했어. 딱 한가지 규칙이지!
규칙 = 나의 꿈을 온전히 사랑한 상태로 보내주기
떠날 때가 되면 내가 하던 일과 공간에 대해 떠나는 이유를 만들고 싶기 마련이고, 어떤 사람은 그 이유의 소재를 온통 미움으로 점칠 하기도 해. 나는 그 반대이고 싶어. 내가 사랑했던 직업과 회사에서 만든 이야기가 곧 내가 되었고, 이곳에서 알게 된 모든 이들이 모두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어있거든. 그래서 좋은 점을 기억하고, 좋은 말을 남겨 놓고 싶어.
그만둘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비행을 꿈꾸고 비행을 해왔던것은 비단 나 혼자의 힘과 꿈이 아니었다는 것. 내가 비행 하기까지 나를 응원하던 친구와 가족, 회사 동료들. 그리고 비행하는 동안 새벽마다 비행 기도를 하는 엄마까지. 내가 품었던 마음은 결국 나를 둘러싼 누군가의 마음에도 자리한다는 것을이제서야 알게 됐어. 나의 명찰 내려놓음으로 인해 나만큼 누군가 마음이 아프다면, 그 사람을 잘보살펴 주고 싶어. 슬퍼해줘서 고맙다고 안아주고 싶고!
음, 그러니까!
나는 올해의 마무리로서 나의 세상과 작별하는 작업을 하는 중이야.
나의 명찰, 유니폼, 갖고 다니던 짐 가방, 그 안에 담긴 잠옷과 110V짜리 전기 플러그, 스프레이, …그리고 함께 지내던 동료들과의 즐거웠던 나날들까지!
유진이는 어떤 마무리를 하고 있어?
예은.
* 이 메일은 [유진]에게 전송한 메일 전문이며,
날 것의 감성을 위해 오타 및 문법 오류에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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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에 사랑한 건
얼룩을 남기니까
오래도록
- Bye, Summer (IU) -
Question . 구독자 님이 2024년 떼어 놓은 명찰이 있나요?
감정, 관계, 직장, 사건 상관 없어요.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Answer . 혼자 생각해보기, 글로 써보기, 예은에게 보내주기 등등..
그럼 열네번째 편지에서 만나요 :)
24년 12월 07일 토요일.
예은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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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
응원합니닷~~~! 미루고 미루다 몰아읽는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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