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으로부터 12호

명찰 떼기 연습 (1)

2024.11.02 | 조회 19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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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

막간.예은으로부터

비행하며 세상을 마음껏 음미하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영감을 글로 기록하고 내용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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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으로부터 12호

명찰 떼기 연습, 첫번째 이야기를 보냅니다.

 

 

2024-11-02

 

 

“저는 지금 제 몸에 달려 있던 명찰들을 떼는 중인 것 같아요.

엄마라는 명찰, 팀장이라는 명찰 뭐 그런 거 있잖아요.

50대 중반이 되어 보니 내 인생에 달린 명찰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을 연습하는 것 같아요.”

 

 

명상 지도자 과정의 마지막 수업. 6월 어느 날, 명상원의 한가운데 앉은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고 침을 한번 삼킨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명찰 내려놓기 연습’을 소개했다. 50대 중반이 되어 자녀들은 결혼 후 출가했다. 그렇게 달고 있던 [정한(가명) 엄마] 라는 명찰을 내려놓는다. 회사 역시 이제는 퇴사했다. 사회에서 불러주던 직함, 쏟아 내었던 열정과 시간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결국 지금 제게 남아있는 이름표는 제 이름 하나에요.” 그렇게 말하고 배시시 웃는다.

 

“그래서 이 명상 지도자 수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다시 붙여보고 싶은 이름표는 해보고 싶은 대로 찾아 붙이기로 했거든요. 뭐, 언젠가 다시 붙인 명찰을 내려놓는 일이 있겠지만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주변 어른들의 얼굴과 나의 유니폼 재킷에 붙어있는 명찰이 교차하여 떠올랐다. 퇴직 후 작년은 미국 일주, 올해는 이탈리아 일주를 떠난 주연의 아버지가, 그 다음엔 작년 봄 본부장실에 들어가 “본부장님 저 이제 승무원 그만두게 …씨…헉…. 허영 ㅠㅠㅠㅠ ” 하고 울었던 작년의 어린 나 자신이 떠오른다. 비행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사내 스카우트 제안에 홀랑 객실 승무원 명찰을 내려놓으려 다짐하고 호기 좋게 본부장과 면담하다 오열했던 나. 그때 본부장님은 내게 “지금 이렇게 우는 거 보면 아직 비행을 더 하고 싶은 것 같은데? 내가 시간을 더 줄 테니 한번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회사에서의 예은 님 평판, 부서 간 관계, 뒷일 이런 거 다 생각하지 말고. 본인이 지금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기적으로 생각해 봐요. 오로지 예은 님의 생각에만 귀 기울이세요.” 이제 명찰을 내려놓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평생 남 눈치만 보고 살던 내가. 나보다 남을 위한 선택을 했던 내가 처음으로 오롯이 나를 위해 비행을 다시 선택했던 날이다.

 

 명찰 내려놓음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줄곧 은퇴를 준비 중인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늦여름 양평의 어느 별장, 쥬씨와 함께 글을 쓰던 어느 밤. 주연은 빈백에 앉아 아버지와 통화를 하며 메모지에 물건 이름을 나열한다. 메모지에 적힌 '침낭, 먹을 거, 경량패딩...' 그리고 그녀는 대답한다. “어. 아빠. 어. 침낭? 사 오라고? 아. 알겠다.” 그녀는 다음주에 아버지의 이탈리아 캠핑 일주 여정에 합류한다. 주연의 아버지는 K 방송국에서 정년퇴직 후 퇴직금을 모아 작년 여름엔 테슬라 미국 일주를, 올해는 테슬라 이탈리아 일주를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주연과 남동생은 아버지의 여정에 맞춰 중간 합류를 했다. 작년 미국 일주 때는 코스트코에서 산 텐트에 누워 세 사람은 요세미티에서 캠핑을 하고, 조슈아 트리의 별을 보다 텐트 안에서 싸워 "나 나갈거야!" 하고 텐트를 나갔지만, 갈 곳이 없어 다시 텐트로 들어와 웃기도 했다며 주연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야기 한다. 이번엔 이탈리아라고? 야 너희 아버지 정말 멋지다. 내 말에 주연은 배시시 웃으며 아빠 덕에 자기도 못 해볼 경험을 한다 말을 붙인다. 이탈리아 캠핑 다녀오고 후기 들려줘. 아버지 이야기로 글 좀 써보게. 명찰 떼는 중년의 이야기! 응. 그럴게.그리고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인스타그램에 짤막한 글을 올렸다.

 

주연의 글
주연의 글

 

 

평생을 살며 일에서 가장 큰 즐거움과 속상함을 동시에 느끼던 아빠가

대신 새롭게 사랑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 주연의 글에서-

 

적어도 25년이 넘도록 사랑했던 일의 완전한 끝을 맺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이제 5년 차인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사실, 완전한 결말이라고 표현했지만, 결말이랄 게 없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평생 다니던 직장을 잘 그만뒀습니다.’로 끝나는 책이 아니다. 사실 아저씨의 삶은 이제부터 본격적이지 않을까. 나이를 잊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을 더 본능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만들어갈 수 있는 만 62세의 이야기야말로 무진장 재미이기 시작하는 때가 아닐까 싶었다.

 

주연이네 캠핑 장면
주연이네 캠핑 장면

 

2.

부시 파일럿과 헤비메탈 그 사이, 신 씨 아저씨.

 

주연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우리 아빠의 은퇴 계획도, 신기장님의 은퇴 계획도 궁금했다. 여기서 신기장님이 누군데? 싶겠지! 회사에서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글 선생님. 조종사, 작가, 기타 연주가 등의 별명을 갖고 있다. 일렉 기타를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 연주하고 헤비메탈(좌우지 좡자자장, Mother Fxxker 소리치며 노래하신다…!)을 사랑하신다. 1만 3천 시간을 비행으로 인생을 채워온 기장님은 조종사 그만두면 뭐 하시려나 싶었다. 뭐가 됐든 주연이네 아저씨처럼 신 씨 아저씨도 범상치 않은 은퇴 계획을 하고 있을 것 같아 그와 솥 밥을 먹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장착했다. 냅다 질문.

 

“기장님은 은퇴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난 Bush Pilot(부시 파일럿)을 해보려고.”

“부시 뭐요?”

 

부시 전 대통령은 들어봤어도 부시 파일럿은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게 뭔데요? 신기장님은 허허 웃으며 하얀 머리를 넘기며 대답한다.

 

“부시 파일럿. 아프리카, 알래스카같이 도로가 없어 중대형 항공기가 착륙할 수 없는 오지에 물자나 환자를 이송해 주는 조종사들을 말해.”

 

기장님과 제법 잘 어울리는 계획이다. 뭐, 부시파일럿이 아니더라도 내가 느꼈을 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면서 살고 싶어. 봉사라든지 그런 거 있잖아. 그렇게 말을 덧붙인 기장님은 내가 보내는  반짝반짝 존경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애써 무시하며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야. 너는 유튜브를 좀 해보는 게 어떠냐? 신 & 김으로 하나 같이 만들래? 하고 장난을 친다. 부시 파일럿. 어쩌면 생명을 다 걸고 오지로 비행을 가야 하는 그 일을 새로운 챕터의 서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 아저씨가 내 눈엔 길을 오가는 핸드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고 있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보다 더 생기가 넘쳐 보인다.

 

두 아저씨의 은퇴 계획, 혹은 은퇴 후 이야기. 내게는 그 이야기들이 곧 두 중년이 걸어온 모든 생애의 순간이 결집하여 만들어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젊은 나에게 그들의 선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결국 시간이 무르익어 각자 두 발을 붙인 이 지구 어느 곳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홀가분함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는 것. 나이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 나이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 두 중년의 용기와 집중력. 그 모든 것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에게 이제 네 이야기를 써 내릴 차례라고 말한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네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 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

 

.

.

.

.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 

 

 

 

 

 

그럼 열세번째 편지에서 만나요 :) 

 

 

 

24년 11월 02일 토요일.

예은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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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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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린다장

    0
    28 days 전

    떠나가는 예은의 글 ㅠ 아쉽지만 기대돼🤍🫶

    ㄴ 답글
© 2024 막간.예은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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