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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으로부터 11호
칭찬이 필요해? 예니오! 이야기를 보냅니다.
2024-07-20
좋은 친구, 자녀, 직장 동료가 되고 싶은 마음은 때로는 나를 성장 시키면서, 반대로 나의 내면 고민이 되어 커다란 감정 소용돌이를 만든다. 상사로부터 칭찬을 기대하고 48시간을 꼬박 밤을 새워 일을 했을 때, 기대만큼 큰 칭찬을 받지 못해 외롭고, 당장 그만두고 싶고, 나라는 사람의 효용을 의심했다. 글을 잘 쓰는 멋진 나로 스스로를 이미지화 하고 싶은 마음, 후배들에게 꼰대가 아닌 웃기고 편안한 선배로 불리고 싶은 마음. 이곳에 다 적어내기엔 너무 많은 마음들이 나의 일상 타임라인에 일분일초마다 숨을 쉬고 있다. 이런 내가 이상한가?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나 말이다.
어느 날, 비행 중 회사 동료에게 화가 났던 적이 있다. 업무적인 태도가 좋지 않았다면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말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다. 선을 넘을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장난을 치는 동료의 말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뾰족하게 날이 섰다. 내가 너무 느슨한 선배 같나? 나 좀 만만해 보이나? 방어기제가 자동으로 발동 된다. 그렇다고 또 사소한 것으로 기분 나빠하는 스스로가 좀생이 같아 꾹 참는다. 결국 나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 착한 선배인 척 퇴근을 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입국장을 향해 걸어가며 ‘이런 사소한 일은 그냥 나 혼자 참고 지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 다 잊자. 저 후배가 무슨 잘못이라고. 속 좁은 내가 잘못이지’ 생각하며 감정을 애써 버리려 했다.
7시간 후.
열 받아서 잠도 안 온다. 아까보다 더 화남. 나의 생각 열차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생각 열차의 머리 칸은 상대를 향한 원망, 그다음 칸은 ‘아니, 누가 봐도 걔가 잘못한 거 맞잖아~!’ vs ‘그래도 지금까지 삐져 있는 내가 잘못 됐어.’. 비난의 정당성 찾기와 나를 향한 셀프 비난이 열차 칸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지막 꼬리 칸. 야 인마. 너 이렇게 소인배였냐. 정신력 챙겨~! 나를 향한 채찍질. 생각 열차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 유튜브 같은 다른 자극으로 나를 잠재우다가도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을 억지로 덮으려고 또 애쓴다.
사소했던 부정적 감정은 그냥 외면해도 된다고. 내면의 소심이를 저기 동그라미 원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둔 채로 말이다. 그렇게 내 안의 소심이, 불안이는 잠잠해진 줄 알았다.
다음날, LA 호텔 방 안, 비대면 명상 지도자 수업 시간.
“오늘은 내려놓음 명상에 대해 수련하고, 이 명상을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안내할지 알아볼 거예요. 각자 종이를 꺼내고,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사건을 적어보세요. 사소한 일도 괜찮아요. 당신을 불편하게 했던 사람, 장소, 감정을 최대한 적나라하게 종이에 써 내려가 보세요.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생겼던 나의 반응 역시 적어보세요. 떠오른 생각, 신체적 반응. 다 써보자고요. 우리.”
나는 아주 작고 사소해 참고 지나가면 그만이라 치부 했던 어제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길게 적힐 사건은 아니니… 손바닥 크기의 작은 종이를 꺼내어 둔다. 책상에 올려진 작은 종이에 불편했던 모든 일을 적어 내려간다. 서두는 대충 홍길동 씨의 어쩌고저쩌고 말이 나를 짜증 나게 했다고 시작한 글은 점점 길어진다. 다 잊고 끝냈다고 생각했던 사건과 감정은 여전히 나의 속 안에 정리되지 않은 채 있었다.
선생님 : “자, 이제 어느 정도 다 썼지요? 그럼 우리 이제 명상 시작 할게요.”
나 : (계속 쓰는 중)
선생님 : “자~ 이제 펜 내려놓고~. 우리 이제 수련 할게요~”
나 : (아. 이것도 짜증 났어. 이것도 써야지.)
선생님 : “자! 예은님~~!!! 예은님도 인제 그만 쓰고~~!!!!!”
나: 느에?????????
그렇다. 화면 속 선생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종이에 토해 낼 감정이 많았다. 급하게 고개를 들고 펜을 내려둔다. 종이의 내용을 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두 눈을 감았다. 선생님의 명상 안내에 집중한다.
“내려놓음 명상은 힘들었던 상황에 일어난 불안한 감정, 분노. 나의 반응을 자각하는 명상입니다. 나의 감정을 자극한 상황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누르고,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계속 바라봅니다.
‘아, 내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어.’
‘내가 지금 슬퍼.’
‘나는 지금 불안해.’
있는 그대로 감정의 반응을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반응에 이름을 붙여줍니다.
‘짜증’ , ‘분노’, ‘불안’, ‘슬픔’, ‘억울함’.
애써 누르고 무시해 왔던 감정을 알아차려 봅니다.
이름 붙인 감정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자, 이제 이 감정을 내려놓습니다. 분노, 짜증, 불안에 따라오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 미움들.
떠오르는 감정들을 판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흘려보내 줍니다."
사실, 수년간 내려놓음 명상을 할 때마다 나는 매번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껴왔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이미 다 지난 일,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왜 내가 먼저 나서서 이렇게 불편한 감정을 자각해야 하는지, 감정 자각이고 뭐고 그냥 모두 다 무시하고 머리에서 지우면 그만인 걸. 그런데 이번 수련은 전과 달랐다. 처음으로 괴롭지 않고 명료하게 감정 관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대 8.
2.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 대한 짜증 수치.
8.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미움 수치.
그래. 그러니까 나는 여태까지 후배 때문에 괴롭지 않았다. 타인에게 너그러이 관용을 베풀지 않는 나, 타인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나, 후배에게 좋은 선배이고 싶은데 속으론 그렇지 못했던 나. 그런 나를 미워해서 짜증이 났던 거다. 그렇다고 이런 나를 안아주고, 위로하지 않았다. 아, 이만큼 나에 대해 관용이 없었구나. 타인에게 착한 아이라고 인정받고 싶고, 칭찬 받고 싶어 하는 그 인정욕구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구나. 제삼자의 시선으로 난생처음 내면의 웅크린 나를 바라보게 된 순간이었다.
또 다른 어느 날, 명상 지도자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들과 문답을 나누던 시간이다.
“객실 승무원 동료들 중 심리적으로 힘든 경우가 있어요.
저는 명상을 통해서 회복 탄력성을 많이 기르게 됐는데,
명상 지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리 동료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싶어요.
초심자에게 어떤 수련법이 가장 효과적인 전달법이 될까요?”
“예은님. 명상을 잘 전달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첫 번째예요..
예은님은 그저 안내자일 뿐, 전달받고 그 내용을 잘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에요.”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얼굴이 화끈 해졌다. 문득, 불과 1초 전까지도 알지 못했던 나를 또다시 마주하게 된다. 내가 맞다 생각했던 과거의 것들이 한순간 뒤집혀 나를 불안하게 하다가도, 제삼자의 시선으로 또다시 강렬한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깨달음. 충격파. 이 고요하고도 강렬했던 성장의 경험은 나를 울리고, 부끄럽게 했다. ‘명상 수련법’이라는 주제를 지워 놓고, 나의 일상을 대입해 보면 일, 사랑, 우정 모든 관계 속에서 나는 늘 책임감과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선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다는 욕구. 그리고 내가 잘 전달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나를 착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지 자꾸 확인하려고 하고, 인정 받으려고 하는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욕구를 이제 서야 어느 정도 자각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정 욕구는 잘못된 걸까? 내가 칭찬 받고 싶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말이다. 아니다. 인정 욕구는 모든 개인이 지니고 있는 본성이다.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본 욕구로 인정과 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자기 존중, 성취감, 관심과 인정으로 자아를 만들고 결핍감 느끼기도, 만족해 성장하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회를 살아 왔다. 자신의 만족감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만족도 까지 신경 쓰며 평생을 살다 보니 무의식중에 타인의 시선이 비집고 들어온다. 언행 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염두하고 끊임없이 만족과 실망을 반복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상대방과 관계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그 모습을 바꿔가며 미움받지 않으려 한다. 정말 좋아하는 과자가 딱 한 개 남았을 때, 이기적인 애야 라는 소리를 들을까 콩 한 쪽도 나눠 먹기도 하거나 남몰래 가방에 숨겨두고 방에서 혼자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타인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인정욕구는 잘못된 건가? 그것도 아니다. 사회에 좋은 일원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규범을 지키고, 공공예절을 지켜 매일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으니.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는 결국 필요한 마음이다.
좋은 친구, 자녀, 직장 동료가 되고 싶은 마음은 때로는 나를 성장 시키면서도, 나의 내면에 커다란 감정 소용돌이를 만든다. 인정욕구는 나에게 이롭고 또 해롭다. 식물을 기를 때 물이 꼭 필요하지만 또 너무 적거나 많은 물을 줘버리면 금세 시들어버리듯, 인정욕구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다.
요즘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다룰 수 있을지 스스로 연습 중이다. 마음에 불쑥 고개를 내미는 나의 꿈틀거리는 인정 욕구들을 내어두고 바라본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쓰기 보단 그저 매 순간 진정성 있는 사람이 되기. 나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님을 되뇌기. 그 사람의 판단을 억지로 바꾸려고, 풀려고 하지도 않기.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고 싶을 때면 이 선의가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혹은 나의 선한 마음 채우기 용도인지 자신에게 물어보기. 직장에서 상사에게 업무적 피드백을 듣거나, 혹은 반대로 후배에게 업무적 피드백을 줄 때도 마찬가지다. 조언을 해주는 선배의 진정성을 그대로 경험으로 수용하기. 후배에게 건네는 나의 말이 후배의 경험 중 아주 작은 일부라고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말하기.
아마 할머니가 되서 까지 나는 울렁거리는 나의 칭찬 받고 싶은 이 욕구를 마주할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때가 되면 이 욕구는 나의 접이식 지팡이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접었다, 펼쳤다, 꺾었다, 연결 했다를 반복해서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녀석으로 말이다.
✏️
글을 쓰면서 잘 쓰고 싶어 죽겠는 마음이 소용돌이 치더군요.
주제가 어렵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피로한 감정이 모두 쏟아져
읽는 이들이 지치진 않을까 염려가 컸습니다.
소용돌이 치는 마음을 그대로 두고, 그냥 또 보냅니다.
이래봬도 진정성은 꽉- 꽉 눌러담은 글이니까요. :)
오늘 편지엔 문답 코너를 없애볼까 합니다.
각자의 마음 속 칭찬 받고 싶은 구독자 을 두팔 가득 안아주시길 !
야! 너 여기 내 마음에 있어도 되는 녀석 맞아! 라고 한번 말해주시길 !
그럼 열두번째 편지에서 만나요 :)
24년 07월 20일 토요일.
예은으로부터.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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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슈
영화 퍼팩트데이즈 봤어? 똑같지 않지만 모두 비슷하게 보이는 패턴들, 혹은 조각들. 우리들은 모두 이런 조각들을 닮았어. 서로의 작은 다름 혹은 비슷함 때문에 서로 영향을 받아. 내가 인정받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은 조그맣게 다르고 싶은 욕망이고, 이런 욕망을 자제하고픈 것은 비슷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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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
꾸준히 뉴스레터 보내주셔서 감사하구욘,, 넘나 칭찬합니다~~~글을 잘쓰는것도 중요한데 꾸준한게 정말 정말 어려운 거 같아요 ! 근데? 둘다 잘하시네요~ 여름도 다 갔네요~ 가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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