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스키 두 거장과의 인터뷰

마사타카 타케츠루와 신지로 토리의 만남

2025.03.04 | 조회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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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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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술 이야기 네 번째 뉴스레터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여정을 떠나볼까 해요. 시간을 넘어,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위대한 인물이 만나 나누는 대화를 상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일본 위스키의 역사를 써내려간 두 거장, 산토리의 창업자 신지로 토리와 니카 위스키의 아버지 마사타카 타케츠루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일본 위스키의 영혼을 만나보세요.

 

두 거장의 첫 걸음

 

꼬꼬술: 오늘 이 자리에는 일본 위스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모셨습니다. 산토리의 창업자 신지로 토리 님과 니카 위스키의 아버지 마사타카 타케츠루 님입니다. 두 분은 생전에는 라이벌이었지만, 오늘은 시간을 초월해 함께 자리하셨네요. 이렇게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리: 타케츠루 군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참 감회가 새롭군요.

타케츠루: 저도 토리 사장님과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생전에는 너무 바빠서 이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꼬꼬술: 오늘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두 분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토리 님, 먼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토리: 네, 저는 1879년 시가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가족은 대대로 청주(사케) 양조업을 해왔어요. 20살에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전통적인 일본 술에만 안주하고 싶지 않았죠. 1899년에 토리 상점, 지금의 산토리의 전신을 설립했어요. 처음에는 와인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곧 위스키에 매료되었습니다.

꼬꼬술: 일본에서 최초로 위스키 증류소를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1923년, 야마자키 증류소
1923년, 야마자키 증류소

 

토리: 맞습니다. 1923년, 44세 때 야마자키 증류소 건설을 시작했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저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일본만의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저희 회사의 모토인 "やってみなはれ(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이런 제 철학을 담고 있어요.

꼬꼬술: 1929년에 일본 최초의 국산 위스키를 출시하셨죠?

 

Suntory Shirofuda (White Label)
Suntory Shirofuda (White Label)

 

토리: 그렇습니다. '산토리 화이트'를 출시했고, 이후 1937년에는 프리미엄 위스키 '올드 산토리'도 선보였어요. 위스키뿐만 아니라 맥주 사업도 시작했고, 일본의 음료 문화 전반에 혁신을 일으키고자 노력했죠.

꼬꼬술: 타케츠루 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타케츠루: 저는 1894년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어요. 토리 사장님과 달리 저는 학자 기질이 있었습니다. 도쿄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대일본주조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어요. 1918년, 회사가 저를 스코틀랜드로 유학 보내면서 제 인생이 바뀌게 되었죠.

꼬꼬술: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이 어떠셨나요?

타케츠루: 글래스고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스코틀랜드 증류소에서 위스키 제조 기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제 아내 리타를 만났죠. 그녀는 스코틀랜드 여성으로, 이후 일본에서 '니카의 어머니'로 불리게 됩니다.

꼬꼬술: 리타 씨는 일본 위스키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타케츠루 마사타카(왼쪽)와 타케츠루 리타(오른쪽)
타케츠루 마사타카(왼쪽)와 타케츠루 리타(오른쪽)

 

타케츠루: 맞아요. 리타는 제 인생과 사업의 든든한 파트너였어요. 1920년에 저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함께 왔는데,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 여성과의 결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문화와 위스키에 대한 이해를 제게 전해주었고, 니카의 설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꼬꼬술: 1920년에 일본으로 돌아오신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타케츠루: 일본으로 돌아온 후, 저는 토리 사장님의 회사인 코토부키야(현 산토리)에 합류했어요.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 증류소 설립에 참여했죠. 하지만 1934년에 독립하여 홋카이도 요이치에 제 증류소를 세웠어요. 이것이 니카 위스키의 시작이었습니다.

꼬꼬술: 독립하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타케츠루: 여러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가진 위스키에 대한 비전과 철학을 온전히 실현하고 싶었죠. 또한 일본 사회에서 리타에 대한 편견도 있었고, 독자적인 연구와 실험을 더 자유롭게 하고 싶었습니다. 1934년에 '대일본과실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이후 '니카 위스키'로 알려지게 되었죠.

꼬꼬술: 두 분은 일본 위스키 산업의 개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통해 그 여정을 더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위스키와의 첫 만남

 

꼬꼬술: 두 분 모두 위스키와의 첫 만남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을 텐데요. 어떻게 위스키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토리: 내가 처음 위스키를 접한 건 1900년대 초반이었어요. 당시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던 시기였죠. 나는 우리 가문이 오랫동안 해온 사케 양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먼저 와인 사업을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스키에 빠지게 되었어요.

꼬꼬술: 어떤 점이 토리 님을 매료시켰나요?

토리: 위스키의 복합적인 향과 깊이 있는 맛이 가장 큰 매력이었어요. 그리고 위스키가 가진 문화적 배경도 흥미로웠고요.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모두 수입 위스키였고, 가격이 매우 비쌌어요. 그때 생각했죠. '왜 일본에서는 위스키를 만들지 않을까?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일본에서 만들면 어떨까?'

타케츠루: 제 경우는 좀 달랐어요. 저는 화학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위스키 제조 과정의 과학적 측면에 매료되었어요. 발효와 증류, 숙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가 너무나 흥미로웠죠. 특히 스코틀랜드 유학 시절, 현지 증류소를 방문했을 때 위스키 제조의 과학과 예술이 결합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토리: 타케츠루 군은 학문적 접근을 했군요. 나는 더 직관적이었던 것 같아요. 위스키가 일본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했어요. 일본인이 위스키를 마시지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타케츠루: 저도 많은 회의적인 시선을 받았어요. 일본의 기후가 위스키 제조에 적합하지 않다거나, 일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 많았죠. 하지만 저는 일본의 환경에 맞게 제조 방법을 조정하면 충분히 좋은 위스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꼬꼬술: 타케츠루 님, 스코틀랜드에서 리타 씨를 만나신 것도 위스키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요.

 

타케츠루 마사타카(왼쪽)와 타케츠루 리타(오른쪽)
타케츠루 마사타카(왼쪽)와 타케츠루 리타(오른쪽)

 

타케츠루: 정말 그래요. 리타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글래스고에서 공부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만났는데, 그녀의 가족은 위스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어요. 리타를 통해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문화와 전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죠. 그녀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제 위스키 여정의 동반자였습니다.

꼬꼬술: 두 분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토리: 1920년에 타케츠루 군이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지식이 우리 회사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나는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 증류소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의 스코틀랜드 경험이 매우 귀중했죠. 그래서 그를 우리 회사에 영입했어요.

타케츠루: 네,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한 후 귀국했을 때, 토리 사장님의 회사인 코토부키야(현 산토리)에 합류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위스키 증류소를 함께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흥분되는 기회였어요.

토리: 타케츠루 군은 매우 재능 있는 과학자였어요. 그가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위스키 제조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었죠. 그의 전문 지식 덕분에 야마자키 증류소는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어요.

꼬꼬술: 그런데 결국 타케츠루 님은... 독립하셨죠?

 

1934년, 홋카이도 요이치 증류소
1934년, 홋카이도 요이치 증류소

 

타케츠루: 네, 1934년에 독립했습니다. 산토리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저만의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홋카이도 요이치에 증류소를 세웠죠. 솔직히 말하면, 제 독립은 토리 사장님께 실망을 안겨드렸을 수도 있어요.

토리: 처음에는 정말 아쉬웠어요. 타케츠루 군은 뛰어난 인재였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결정을 존중했습니다. 위대한 장인은 언젠가 자신만의 길을 가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의 독립은 일본 위스키 산업 전체에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타케츠루: 저도 토리 사장님의 비전과 추진력에 항상 감명받았어요. 사업가로서의 직관과 결단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죠. 우리는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일본에서 훌륭한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같았어요.

꼬꼬술: 그래서 두 분은 스승과 제자에서 라이벌이 되셨군요.

토리: 그렇습니다. 우리는 라이벌이 되었지만, 동시에 같은 꿈을 꾸는 동료이기도 했어요. 일본 위스키 시장을 함께 개척해 나갔으니까요.

타케츠루: 맞아요. 건전한 경쟁은 우리를 더 나은 위스키를 만들도록 자극했고, 결과적으로 일본 위스키 전체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일본 위스키의 탄생

 

꼬꼬술: 두 분 모두 일본 위스키의 선구자로서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겪으셨을 텐데요. 첫 증류소를 세우고 첫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은 어땠나요?

토리: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울 장소를 찾는 것부터가 큰 도전이었어요. 위스키 제조에는 물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결국 교토 근처 야마자키를 선택한 이유는 물의 품질 때문이었어요. 그곳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웠죠. 게다가 기후도 적합했고요. 습도가 높고 온도 변화가 커서 위스키 숙성에 이상적이었어요.

 

스코틀랜드 캠벨타운(위) 홋카이도 요이치(아래)
스코틀랜드 캠벨타운(위) 홋카이도 요이치(아래)

 

타케츠루: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어요. 요이치를 선택한 이유는 홋카이도의 기후가 스코틀랜드와 유사했기 때문이에요. 특히 겨울의 추위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위스키 숙성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꼬꼬술: 장소 외에도 기술적인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토리: 증류소를 건설하고 나서도 문제는 계속됐어요. 일본에는 위스키 제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난 스코틀랜드에서 기술자를 데려왔어요. 마사타미 다케츠구 석사를요. 그의 공헌은 정말 컸어요. 그가 없었다면 일본 최초의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을 거예요.

꼬꼬술: 마사타미 다케츠구는 어떤 분이셨나요?

토리: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증류 기술을 배운 뛰어난 양조가였어요. 야마자키 증류소의 설계부터 장비 선택, 초기 제조 과정까지 그의 지식이 핵심적이었죠. 그는 일본에서 10년 가까이 머물며 우리 직원들에게 위스키 제조 기술을 가르쳤어요. 그의 공헌이 없었다면 산토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타케츠루: 저는 직접 스코틀랜드에 가서 배워왔지만, 그 지식을 일본 환경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어요. 보리 맥아 확보부터 어려웠죠.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들었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장비도 부족했고, 숙성에 필요한 오크통도 구하기 어려웠어요.

토리: 그렇죠. 가장 큰 도전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개발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1929년에 출시한 '산토리 화이트'는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모방하려고 했지만,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계속 실험하고 개선했죠.

타케츠루: 저희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지만, 곧 일본의 환경과 문화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특히 발효 과정과 숙성 방법에서 많은 실험을 했죠.

꼬꼬술: 타케츠루 님의 경우, 리타 씨의 존재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타케츠루: 물론입니다. 리타는 제가 니카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일본에 적응하면서도 스코틀랜드의 감각을 잃지 않았죠. 처음에는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 여성으로서 많은 편견에 직면했지만, 그녀의 강인함과 열정으로 이를 극복했어요. 위스키 시음과 품질 평가에서 그녀의 의견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꼬꼬술: 그렇게 개발된 일본만의 위스키 특성은 무엇인가요?

토리: 일본 위스키의 특징은 부드러움과 섬세함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스코틀랜드 위스키보다 좀 더 부드럽고 균형 잡힌 맛을 추구했어요. 이는 일본 음식 문화와도 연관이 있죠. 일본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을 중요시하잖아요. 위스키도 마찬가지로 원료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조화롭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타케츠루: 맞아요. 그리고 우리는 물의 품질에 특별히 신경을 썼어요. 일본은 물이 좋은 나라니까요. 또한 숙성 과정에서 일본의 계절 변화를 활용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뚜렷한 온도와 습도 변화가 위스키에 독특한 깊이를 더해준다고 생각했어요.

토리: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블렌딩 기술이었어요. 우리는 다양한 원액을 섬세하게 블렌딩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죠. 이것도 일본의 장인 정신과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타케츠루: 그리고 우리는 점차 일본산 오크를 실험하기 시작했어요. 미즈나라 오크가 위스키에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지 연구했죠. 이는 나중에 일본 위스키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가 되었어요.

꼬꼬술: 초기에는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산토리 하이볼
산토리 하이볼

 

토리: 솔직히 처음에는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일본인들은 위스키에 익숙하지 않았고, 맛이 강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우리는 소다와 함께 마시는 '하이볼' 문화를 장려했어요. 이는 일본 위스키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죠.

타케츠루: 저희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소비자 교육이 중요했죠. 위스키의 역사와 문화, 다양한 음용법을 소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리고 점차 일본인들도 위스키의 매력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토리: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위스키 소비가 크게 증가했어요. 서구 문화의 영향과 함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생활 수준 향상이 위스키 소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타케츠루: 그렇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일본 위스키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오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시기였죠.

 

두 거장의 위스키 철학

 

꼬꼬술: 두 분 모두 위스키 제조에 있어 장인정신을 중요시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각자의 위스키 철학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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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내 위스키 철학은 '품질에 대한 타협 없는 추구'였어요. 나는 항상 최고의 재료와 최상의 기술을 사용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혁신하고 개선하는 것을 중요시했죠. "やってみなはれ(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내 삶의 철학이었어요.

타케츠루: 저는 과학과 예술의 균형을 중요시했어요. 위스키 제조는 화학적 과정이면서도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작업이니까요. 저는 항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확한 제조 과정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감각적인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했죠. 위스키는 물, 곡물, 효모, 공기, 나무 등 자연의 선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꼬꼬술: 타케츠루 님, 리타 씨는 위스키 제조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타케츠루: 리타는 제 위스키 철학에 스코틀랜드의 전통과 정신을 접목시켜 주었어요. 그녀는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진정성과 장인정신을 잘 이해하고 있었죠. 시음 과정에서 그녀의 의견은 매우 소중했고, 품질 평가에 있어서도 타협하지 않았어요. 일본과 스코틀랜드 문화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토리: 타케츠루 군의 과학적 접근은 정말 존경스러웠어요. 나는 좀 더 직관적인 편이었지만 점차 과학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특히 블렌딩 과정에서는 정확성과 일관성이 중요하니까요.

타케츠루: 토리 사장님의 비전과 추진력은 저에게도 큰 영감이 되었어요. 사업가로서의 감각과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셨죠. 저는 연구실에 갇혀 있을 때가 많았지만, 토리 사장님은 항상 시장을 보고 계셨으니까요.

꼬꼬술: 두 분의 대표적인 위스키와 그 개발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산토리 올드 위스키
산토리 올드 위스키

 

토리: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위스키는 '산토리 올드'예요. 1940년에 출시된 이 위스키는 일본 위스키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생각해요. 개발 과정은 쉽지 않았어요.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쳤죠. 특히 블렌딩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일본인의 입맛에 맞으면서도 국제적인 품질을 갖춘 위스키를 만들어냈죠.

 

니카 슈퍼 위스키
니카 슈퍼 위스키

 

타케츠루: 저에게는 '니카 슈퍼'가 특별해요. 1962년에 출시된 이 위스키는 제가 스코틀랜드에서 배운 기술과 일본에서의 연구를 완벽하게 조화시킨 결과물이었어요. 특히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의 블렌딩 비율에 많은 공을 들였죠. 그리고 숙성 과정에서 일본의 계절 변화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어요.

토리: '니카 슈퍼'는 정말 훌륭한 위스키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경쟁자로서 조금 질투도 났죠. (웃음)

타케츠루: 과찬이십니다. '산토리 올드'도 정말 훌륭했어요. 사실 저는 종종 몰래 산토리 위스키를 마시기도 했어요. 연구 목적으로요. (웃음)

꼬꼬술: 두 분 모두 위스키 제조 과정에서 많은 혁신을 이루셨는데, 가장 자랑스러운 기술적 혁신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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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나는 다양한 형태의 증류기를 실험한 것이 가장 자랑스러워요. 우리는 스코틀랜드식 증류기를 기본으로 하되, 일본 위스키의 특성에 맞게 수정했어요. 특히 목 부분의 각도와 길이를 조정해서 더 부드러운 증류액을 얻을 수 있었죠. 이것이 일본 위스키의 특징적인 부드러움에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타케츠루: 저는 발효 과정에서의 혁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우리는 일본의 고유한 미생물 환경을 활용한 발효 방법을 개발했어요. 이를 통해 일본만의 독특한 향미를 가진 위스키를 만들 수 있었죠. 또한 물의 경도를 정밀하게 조절하는 방법도 개발했어요. 이는 위스키의 맛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으니까요.

꼬꼬술: 두 분 모두 일본 위스키에 일본만의 특성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셨군요.

토리: 그렇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모방하려고 했지만, 결국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일본의 문화와 환경, 그리고 일본인의 감성을 담은 위스키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타케츠루: 맞아요. 우리는 스코틀랜드의 기술을 배웠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재해석했어요. 이것이 오늘날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전쟁 속에서도 피어난 위스키

 

꼬꼬술: 두 분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으셨습니다. 전쟁 중 위스키 생산은 어떻게 이어나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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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전쟁 시기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요. 원료 확보부터 어려웠죠. 보리와 같은 곡물은 식량으로 우선 사용되었고, 위스키 생산에 필요한 자원은 배급 제한을 받았어요. 심지어 위스키 제조가 사치품 생산으로 간주되어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했습니다.

타케츠루: 맞아요. 요이치 증류소도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우리는 생산량을 크게 줄일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어요. 최소한의 설비와 인력으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그것이 전후 빠른 복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해요.

토리: 우리는 위스키 생산을 줄이는 대신,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하기도 했어요. 알코올은 의약용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증류 설비를 이용해 의료용 알코올을 생산했죠. 이것이 회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꼬꼬술: 리타 씨는 전쟁 중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요?

타케츠루: 리타는 적국인 영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의심과 차별을 받았어요. 일부 일본 관리들은 그녀를 스파이로 의심하기도 했죠. 심지어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굳건히 저를 지지해주었고, 니카의 운영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녀의 강인함이 없었다면 그 시기를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꼬꼬술: 전쟁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토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의 숙성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어요. 공습이 있을 때마다 직원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며 화재를 방지했어요. 수년간 숙성해온 위스키 원액은 그야말로 우리의 보물이었으니까요. 다행히 야마자키 증류소는 큰 피해 없이 전쟁을 견뎌냈어요.

타케츠루: 요이치는 상대적으로 공습의 위험이 적었지만, 그 대신 물자 부족과 인력 문제가 심각했어요. 많은 직원들이 징집되어 갔고, 남은 사람들로 증류소를 운영해야 했죠. 저는 그때 고령이었지만, 직접 증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또한 우리는 귀중한 레시피와 연구 자료를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어요.

꼬꼬술: 전쟁이 끝난 후, 위스키 산업의 재건 과정은 어땠나요?

토리: 전후 재건은 또 다른 도전이었어요. 경제가 피폐해진 상태에서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위스키를 다시 생산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 후 일본인들의 서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는 위스키 수요 증가로 이어졌죠.

타케츠루: 그렇습니다. 특히 주둔한 연합군의 영향으로 위스키 문화가 더 널리 퍼졌어요.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하지만 초기에는 원료와 장비 확보가 여전히 어려웠어요. 저는 과학자로서 대체 원료와 효율적인 생산 방법을 연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꼬꼬술: 리타 씨는 전후 니카의 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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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츠루: 전후에 리타는 더욱 적극적으로 회사 운영에 참여했어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들면서 그녀는 니카의 국제 비즈니스 관계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서양의 위스키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고, 니카가 국제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죠. 그녀는 196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와 니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토리: 우리는 전쟁 이전보다 더 대중적인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가격을 낮추고 더 부드러운 맛의 위스키를 개발했죠. 195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 성장과 함께 위스키 시장도 크게 성장했어요. 이 시기에 우리는 제품 라인업을 다양화하고 생산 시설을 확장했습니다.

타케츠루: 저는 1946년에 '니카 위스키 연구소'를 설립했어요. 전쟁 중에 중단된 연구를 재개하고, 일본 위스키의 품질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였죠. 이 연구소는 나중에 일본 위스키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꼬꼬술: 전쟁 경험이 두 분의 위스키 철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토리: 전쟁은 모든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깨닫게 해줬어요. 그래서 더욱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죠. 이는 위스키 제조에도 반영되었어요. 우리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항상 최고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타케츠루: 저는 전쟁을 통해 지식과 기술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깨달았어요. 한번 잃어버린 기술을 복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했으니까요. 그래서 지식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니카 위스키 연구소'를 설립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토리: 그리고 전쟁은 우리에게 협력의 중요성도 가르쳐줬어요. 비록 우리가 경쟁사였지만, 일본 위스키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실제로 전후에는 업계 전체가 함께 노력하여 일본 위스키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시장을 확대했어요.

타케츠루: 맞아요. 전쟁은 모든 것을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본 위스키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더 이상 스코틀랜드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만의 독특한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니까요.

 

대중성과 장인 정신, 서로 다른 접근

 

꼬꼬술: 산토리와 니카는 일본 위스키 시장에서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이 경쟁 관계가 두 분과 각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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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경쟁은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었어요. 니카의 제품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우리도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라이벌이 있다는 것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어요. 만약 니카가 없었다면, 산토리도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타케츠루: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산토리의 존재는 우리에게 항상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어요. 특히 토리 사장님의 사업적 수완과 마케팅 능력은 정말 놀라웠죠. 우리는 더 나은 품질의 위스키를 만드는 데 집중했지만, 산토리의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도 많이 배웠어요.

꼬꼬술: 경쟁 관계 속에서도 협력의 순간이 있었나요?

토리: 물론이죠. 일본 위스키 산업 전체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종종 협력했어요. 특히 일본 정부의 주세법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함께 목소리를 내곤 했죠. 그리고 해외 수출을 시작할 때도 '일본 위스키'라는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업계가 협력했어요.

타케츠루: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간접적인 협력이 있었어요. 우리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면, 산토리도 그것을 연구하고 발전시켰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요. 이런 선의의 경쟁은 결국 일본 위스키 전체의 품질 향상으로 이어졌어요.

꼬꼬술: 두 회사의 영업 전략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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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산토리는 항상 대중적인 접근을 중요시했어요. 위스키를 일본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것이 목표였죠. 그래서 우리는 하이볼과 같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음용법을 적극 홍보했어요. 또한 광고와 마케팅에 많은 투자를 했고, 일본 전역에 유통망을 구축했죠.

타케츠루: 니카는 조금 다른 접근을 했어요. 우리는 품질과 장인정신에 초점을 맞췄죠. 대량 생산보다는 정교한 공정과 독특한 풍미를 중시했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갔죠. 또한 '니카 위스키 연구소'를 통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도 펼쳤어요. 리타의 역할도 컸어요. 그녀는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위스키에 대한 진정성을 전달했고, 이것이 니카의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토리: 그런 차이가 있었기에 두 회사가 시장에서 공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각자의 강점을 살리면서 서로 다른 소비자층을 공략했으니까요.

꼬꼬술: 개인적으로 라이벌의 어떤 점을 가장 높게 평가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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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타케츠루 군의 과학적 접근 방식과 끈기 있는 연구 정신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그는 단순히 맛있는 위스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맛이 나오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죠. 이는 일본 위스키의 과학적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또한 그가 스코틀랜드 문화와 일본 문화를 융합시키는 능력도 대단했습니다. 특히 그와 리타의 국제결혼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죠.

타케츠루: 저는 토리 사장님의 비전과 결단력을 높이 평가해요. 아무도 믿지 않을 때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었죠.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정신은 저에게도 큰 영감이 되었어요. 또한 대중의 취향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는 그의 능력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꼬꼬술: 경쟁 속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토리: 1954년 산토리가 '올드 산토리 위스키'로 국제 대회에서 처음 수상했을 때예요. 당시 일본 위스키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어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니카의 반응이 궁금했죠.

타케츠루: 저희는 그 소식을 듣고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어요. 솔직히 부럽기도 했지만, 일본 위스키가 세계에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자극이 되었죠. 실제로 그 후 니카도 국제 대회 출전을 늘렸고, 1969년에 첫 수상의 영광을 안았어요.

토리: 그 때 저도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우리의 경쟁이 결국 일본 위스키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진 것이 기뻤으니까요.

꼬꼬술: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 위스키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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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 위스키에게 전환점이 되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많은 방문객들이 왔고, 그들에게 일본 위스키를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죠. 우리는 산토리 올드와 특별 블렌드를 준비했고, 국제 미디어의 관심도 받았어요.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 위스키의 국제적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타케츠루: 맞아요. 올림픽은 일본이 국제 무대에 복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일본 위스키도 그 흐름을 타게 되었죠. 니카도 올림픽 기간에 특별 판촉 활동을 했고, 해외 바이어들과 중요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어요. 또한 올림픽을 위해 개선된 인프라 덕분에 국내 유통망도 강화되었습니다.

꼬꼬술: 두 분이 생각하시는 건강한 경쟁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토리: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단순히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비자에게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한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어야 하죠.

타케츠루: 저도 동의해요. 그리고 각자의 강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면에서 경쟁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찾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죠. 산토리와 니카가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에게 자극이 되었던 것처럼요.

토리: 또한 시장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우리의 경쟁은 시장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위스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업계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졌으니까요.

타케츠루: 맞아요.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도 필요하죠.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업계 전체의 미래를 생각하며 경쟁하는 것이 건강한 경쟁의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위스키의 세계 정복

 

꼬꼬술: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까지의 여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 과정에서 어떤 도전들이 있었나요?

토리: 일본 위스키가 세계, 특히 스코틀랜드와 같은 전통적인 위스키 생산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진짜 위스키가 아니다'라는 편견에 부딪혔죠. 많은 서양 사람들이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든다는 사실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타케츠루: 맞아요. 우리는 항상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받았어요. 특히 국제 대회에 출품했을 때는 더욱 그랬죠. 심사위원들은 처음에는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우리 제품을 대했어요.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맛으로 증명해 나갔습니다.

토리: 가장 큰 도전은 일본 위스키의 독특한 특성을 인정받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만의 위스키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 '다름'이 처음에는 단점으로 여겨졌죠.

꼬꼬술: 해외 시장에서 '일본 위스키'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타케츠루: 그렇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본 위스키'의 법적 정의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 도전이었습니다. 최근 2021년에야 일본 위스키 협회가 '일본 위스키'로 표기하기 위한 기준을 발표했어요. 그 전까지는 일부 제품이 외국에서 수입한 원액을 사용하기도 했죠. 이런 불명확함이 국제 시장에서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토리: 맞아요. 저희도 초기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수입한 원액을 일부 사용했지만, 점차 자체 생산 비율을 늘려갔습니다. 사실 이런 과정은 많은 신생 위스키 국가들이 겪는 발전 단계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에요.

꼬꼬술: 그런 편견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토리: 끊임없는 품질 향상과 국제 대회 참가였어요. 1954년 산토리가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서 수상했을 때, 세계는 일본 위스키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제품을 개선하고, 더 많은 국제 대회에 참가했죠.

 

니카 요이치 증류소
니카 요이치 증류소

 

타케츠루: 또한 우리는 해외 전문가들을 초청해 일본의 위스키 제조 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노력도 했어요. 특히 1960년대부터는 세계적인 위스키 평론가들을 요이치 증류소로 초청해 일본 위스키의 특성과 제조 과정을 설명했죠. 그들이 돌아가서 쓴 호의적인 리뷰가 일본 위스키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토리: 세계 시장 진출도 중요한 전략이었어요. 처음에는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수출을 시작했고, 점차 미국과 유럽으로 확대해 나갔죠. 물론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수출 규제부터 현지 유통망 구축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으니까요.

타케츠루: 국제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우리는 제품 포트폴리오도 다양화했어요. 각 국가와 지역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개발했죠. 예를 들어, 미국 시장에서는 좀 더 강한 풍미의 위스키가 인기가 있었고, 유럽에서는 섬세한 맛이 선호되었어요.

꼬꼬술: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큰 인정을 받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나요?

 

요이치 20년 숙성(좌) 야마자키 12년 숙성(우)
요이치 20년 숙성(좌) 야마자키 12년 숙성(우)

 

토리: 2001년 산토리의 '야마자키 12년'이 국제 위스키 대회에서 최고 상을 받았을 때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수상은 일본 위스키가 단순히 '좋은 위스키'가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위스키'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죠.

타케츠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2000년대 초반부터 국제 대회에서 일본 위스키가 연이어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특히 2008년 위스키 전문지 '위스키 매거진'에서 니카의 '요이치 20년'을 '세계 최고의 싱글 몰트 위스키'로 선정했을 때는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죠.

토리: 그 때 산토리에서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것은 일본 위스키 전체의 승리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후로 일본 위스키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꼬꼬술: 세계적 인정을 받게 된 일본 위스키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토리: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는 '세심함'이에요. 일본의 장인 정신이 위스키 제조 과정 전반에 녹아들어 있죠. 둘째는 '혁신'이에요. 우리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어요. 셋째는 '조화'예요. 일본 위스키는 강렬함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고, 이것이 세계 시장에서 독특한 매력으로 작용했죠.

타케츠루: 저는 '과학과 예술의 결합'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데이터와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접근과 오감을 활용한 예술적 감각을 모두 중요시했어요. 또한 '일본만의 자연환경'도 중요한 요소였죠. 물의 품질, 기후 조건, 심지어 공기 중의 미생물까지 모두 일본 위스키만의 특성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으니까요.

토리: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비자 중심의 사고방식'이에요. 우리는 항상 소비자가 어떤 위스키를 원하는지 고민했고, 그에 맞춰 제품을 개발했어요. 이는 세계 시장에 진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각 지역의 문화와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일본 위스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균형을 찾았어요.

꼬꼬술: 두 분이 생각하시는 일본 위스키만의 독특한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타케츠루: 일본 위스키의 정체성은 '섬세함'과 '정밀함'에 있다고 생각해요. 스코틀랜드 위스키가 종종 강렬하고 풍부한 맛을 자랑한다면, 일본 위스키는 더 미묘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죠. 이는 일본 음식 문화와도 연결되는 부분이에요. 우리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도 조화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을 중요시했으니까요.

토리: 저는 '개방성'과 '적응력'도 일본 위스키의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어요. 이런 유연한 사고방식이 일본 위스키가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었죠.

꼬꼬술: 국제 시장에서 일본 위스키를 마케팅하는 전략은 어땠나요?

토리: 우리는 '일본의 장인정신'과 '문화적 특성'을 강조했어요. 일본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차분하고 세심한 장인 정신, 그리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마케팅의 핵심 요소로 삼았죠. 또한 일본 위스키의 품질과 국제 대회 수상 경력도 적극적으로 알렸고요.

타케츠루: 저희도 비슷한 접근을 했어요. 특히 일본 위스키의 과학적 기반과 연구 개발 노력을 강조했죠. 그리고 요이치 증류소의 독특한 지리적 위치와 기후 조건이 위스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어요. 이런 스토리텔링이 해외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토리: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접근성'이었어요. 일본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해외 소비자들을 위해 다양한 음용법을 소개했죠. 특히 하이볼은 일본 위스키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어요.

꼬꼬술: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타케츠루: 가장 큰 변화는 일본 위스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었어요. 특히 숙성된 위스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죠. 이로 인해 빈티지 일본 위스키의 가치가 크게 상승했고, 심지어 몇몇 제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어요.

토리: 또한 일본 국내에서도 위스키에 대한 인식이 변했어요. 과거에는 단순히 '서양의 술'로 여겨졌던 위스키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적 상품'으로 재평가받았죠.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위스키의 인기가 높아졌고요.

타케츠루: 그리고 세계적인 인정은 우리에게 더 큰 책임감을 안겨주었어요. 이제 우리는 단순히 '일본의 위스키 제조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위스키 제조사'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했죠. 이는 품질 관리와 혁신에 더욱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토리: 맞아요. 그리고 이런 성공은 다른 일본 주류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어요. 일본 크래프트 진, 일본 크래프트 맥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죠. 일본 위스키의 성공이 다른 분야에도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에요.

 

두 거장의 유산

 

꼬꼬술: 오늘 두 분과 나눈 대화는 일본 위스키의 역사와 미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지로 토리와 마사타카 타케츠루는 각각 산토리와 니카라는 회사를 통해 일본 위스키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들의 열정과 비전, 끊임없는 도전 정신은 오늘날 일본 위스키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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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는 현재도 야마자키, 하쿠슈, 치타 등의 증류소를 운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야마자키 싱글 몰트, 하쿠슈 싱글 몰트, 히비키 블렌디드 위스키 등은 국제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2015년에는 산토리의 '야마자키 싱글 몰트 셰리 캐스크 2013'이 세계적인 위스키 평론가 짐 머레이의 '위스키 바이블'에서 '세계 최고의 위스키'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니카 위스키도 요이치 및 미야기쿄 증류소에서 뛰어난 품질의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이치 싱글 몰트'는 세계 위스키 대회에서 여러 차례 최고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타케츠루가 설립한 '니카 위스키 연구소'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인 연구 개발과 품질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거장이 남긴 유산은 그들의 가족을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토리의 아들 케이조 사카와 그 후손들은 산토리를 이끌며 아버지의 비전을 계승했고, 타케츠루와 리타의 양자인 타케지 다케츠루도 니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리타의 영향력은 그녀가 1961년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니카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은 산토리와 니카를 넘어 일본 위스키 산업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현재 일본에는 가고시마의 '마스' 증류소, 시즈오카의 '가이란' 증류소 등 수십 개의 위스키 증류소가 운영되고 있으며, 각자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스타일의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소규모 크래프트 증류소들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치치부의 '벤처 위스키', 나가노의 '마스 시즈오카' 등 새로운 증류소들이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린 독창적인 위스키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토리와 타케츠루의 개척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방식과 재료를 실험하며 일본 위스키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두 거장이 오늘날의 일본 위스키를 볼 수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꿈이 이렇게 큰 산업으로 성장한 것에 놀라워하며, 동시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본 위스키의 두 거장, 신지로 토리와 마사타카 타케츠루와의 가상 인터뷰를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단순한 위스키의 역사를 넘어, 열정, 도전, 혁신, 그리고 장인 정신이 어떻게 하나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여러분의 다음 한 잔은 어떤 위스키가 될까요? 혹시 일본 위스키를 선택하신다면, 그 한 잔 속에 담긴 두 거장의 꿈과 열정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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