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보름간의 곡물창고 입하 소식 ▧
클라우스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클라우스를 찾아갔다고 하면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 클라우스, 정신 나간 성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클라우스를 잠깐 소개하는 편이 좋겠다. 성당지기였던 대머리 클라우스는 쉰을 넘긴 나이에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이상한 음성’을 들은 뒤 그 뜻을 헤아리겠다며 스스로에게 맹약하고 성기사를 자칭했다.
유리관, 겪지 않은 후일담
예술 생각 같은 것
팔레트 나이프로
불타는 커튼을 푹 떠서
전면에 바르기
시원하게 바르기
그리고 커튼
사라지기
현실은 이렇게
흔적 없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새를 위한 집 같은 것
가게 주인이
어깨에 새 한 마리 앉혀놓고
말한다
말하는 새 이백만
말 못하는 새 팔만
날 수 있는 새 오만
못 나는 새 십만
앞에 있는 새 삼백만
저 끝에 있는 새 삼만
김깃, 같은 것
대기권 밖으로
ㅍㅍ와 ㅉ는 하늘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 정수기 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준비한 돗자리 위에 나란히 누웠다. ㅉ가 ㅍㅍ에게 말했다. 넌 대체 어떻게 사니, 어떻게 이 모든 걸 감당하고 사니. ㅍㅍ가 말했다. 몰라, 이걸 다 미워할 수 있는 내가, 그러고도 살아남은 내가 너무 좋은가봐. ㅍㅍ가 빈정거렸다. ㅉ는 다시 물었다. 이걸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 거야? ㅍㅍ가 ㅉ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걸 내 눈앞에서 치워버릴 만큼 용감하지 않아서 그래. 내가 그렇게 용감했다면, 날 치워버렸겠지.
부고
내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불구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부고는 여태 익숙해지지 않는다 부고를 반으로 접어 넣으니 네가 기억나지 않는다 망각이 아니었다면 우린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네 유언이 무엇이었는진 내가 입을 열 때쯤 기억나겠지
에이미앰플, bulk
▧ 창고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랜덤 게시물 1편 ▧
2
그는 여행중이다. 떠나기 전에 내게 수요일 12시에 카페에 가서 글 한 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마치 나인 것처럼 써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집을 잠시 세놓고 간다고 했다. 그 돈으로 잠시 로마에 간다고 했다. 글을 쓰러. 그곳에 집을 빌려 살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국의 세입자가 낸 돈으로 로마에서 세입자가 될 것이고, 요즘은 한국 물가가 높아 그 돈으로 로마의 작은 아파트를 빌리고도 남을 거라고 했다. 물론 중심이 아니라 외곽에 있는 작은 아파트. 그런데 그곳에서 도심까지 가려면, 로마의 악명 높은 대중교통 시스템으로 인해 거의 세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미친풀, 수요일에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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