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그랬을 거다. 지금의 한나였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빤히 쳐다보며, 당돌한 말투로, 이거 어떻게 먹으면 돼요, 라고 물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럴 수 있을 만큼 뻔뻔해지고 여유도 생겼으니까.
그렇지만 그 해의 그녀는 어렸다. 어른이라면 어른이고 어리다면 어린 시기였지만, 또래 중에서도 유난히 어렸다. 게다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일탈을 할 배짱은 없었으며, 친구들과 몰려다니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정체성이 애매했다.
그때 그녀는 정말로 촌티의 최전선을 달리는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게 언밸런스하게 컬이 진 머리와, 그 당시 유행하던 구제 청바지를 어설프게 흉내 낸 후줄근한 바지, 제일 조잡한 톤의 빨간 스니커즈까지. 화장도 해본 적 없었고, 잡지를 보거나 친구들과 옷을 사러 가본 적도 없었던 고3이 수능 끝나니 꾸며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친 꼴이라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날 홍대 앞이라는 곳에도 처음 와봤다. 전날 밤에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왠지 그곳은 굉장히 굉장하고 대단히 대단한 곳일 거라는 막연한 환상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가는 길과 교통편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고도, 마치 외국에라도 처음 나가는 듯 들뜨고 걱정되는 심정으로, 그녀는 아침을 기다렸다.
N은 그녀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다. 스물일곱의 독문과 대학원생. 그녀도 무슨 말만 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만 푹 숙이기 일쑤인 생일 빠른 열아홉 살을 데리고 뭘 해야 할지 적잖이 고민했을 게 분명했다. 일단 점심으로 고소한 치즈가 잔뜩 얹힌 피자를 먹고, 한나를 조용하고 예쁜 카페로 데려갔다. N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아무것도 몰랐던 한나는 뭔가 있어 보이면서 적당히 비싼―N은 비싸고 맛있는 거 먹으라고 계속 권했다―아포카토를 골랐다.
그때까지 카페라는 곳을 거의 가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당연하게도 아포카토가 뭔지 몰랐다. 문제의 아포카토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그녀는 당혹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커다란 유리그릇에 담긴 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고, 작은 잔에 나온 액체가 커피라는 건 알겠는데, 무슨 커피가 저렇게 칙칙한 색을 띠고 있는지, 양은 왜 이렇게 적은지 알 수가 없었다. 얼핏 보면 간장과 밥처럼 생기기도 했다. 아, 그럼 아이스크림 한 입, 커피 한 모금 번갈아 먹으라는 건가? 아니면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커피를 찍어먹는?
그녀는 ‘아포카토 정도는 당연히 먹어봤다’는 표정을 최대한 지으려고 애쓰면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혀가 오그라드는 듯한, 믹스커피와는 격이 다른 강렬한 맛이 입 안을 엄습했다. 아마도 사극에 나오는 이런 맛일까 싶었다. 서둘러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털어 넣어 쓴맛을 가라앉히려는 그녀를 보고, N은 귀엽다는 듯 살짝 웃었다.
“이렇게 먹는 거야.”
그녀의 손에서 잔을 건네받은 N은 커피를 아이스크림 위에 끼얹었다. 그녀는 초콜릿색으로 바뀐 아이스크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괜찮아. 너무 녹아서 퍼지기 전에 먹어봐.”
N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스푼을 들어 커피가 뿌려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머금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외계에서 온 디저트 같은 맛이었다. 에스프레소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감싸는 오묘한 조화, 차갑다가도 따뜻하고, 씁쓸하면서도 달착지근했다. 커피의 쓴맛 때문에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더 입에 감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순식간에 유리그릇을 비웠다.
그날 N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을 때, N의 혀가 그녀의 혀와 엉켰을 때, 그녀가 자신의 입술이 닿은 N의 입술을 핥았을 때, 희미하게 달콤쌉싸름한 아포카토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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