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스트가 공유하고 싶었던 단상을 에세이로 담아보았습니다. 본격적인 모임 전, 가벼운 워밍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존재의 목적은 존재!
신세계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모두 분열증을 앓는다. 특징은 환각, 망상, 와해된 언어와 행동. 무조건 죄송한 덕천, 훔치심을 느끼는 일순, 자신이 싸이보그라 믿는 영군. 영화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우습게 보지도 않는다. 그냥 둔다. 그리고 그 시선 앞에서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도 가끔 ‘말 안 됨’ 상태에 빠지지 않나. 무조건 죄송, 훔치심, 싸이보그. 그들의 언어를 조금만 일상적인 단어로 바꿔보자. 이를테면 긴장. 거짓말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하거나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을 때, '무조건 긴장' 버전의 나 자신이 된다. 거짓말이 들키면 난 끝장이야. 사회적으로 죽음이야.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인 망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긴장에 잠긴다. 덕천, 일순, 영군과 우리의 차이라면 아마 망상의 몰입도와 지속 시간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살면서 줄곧 겪게 된다.
문득 내 감정이 말이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말이 안 되는 걸까 묻게 된다. 어쩌면 세상이라는 거대한 병동 자체가 넌센스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주가지수가 출렁이고, 지구 반대편의 비극이 내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는 그저 납작한 텍스트로 소비된다. 통제할 수 없는 이해 밖의 일들이 매일 벌어지지만, 우리는 무력함을 안고 부조리한 세상과 매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모름 자체가 남는 것인지도. 다만 이것만은 안다. 영군이 그랬듯, 나를 괴롭히는 싫고 짜증나는 것들을 언젠간 다 무찔러버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품어보는 것. 그날을 막연히 기다리며, 일단은 고장 나지 않기 위해 밥을 잘 씹어 삼키고 씩씩하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어떻게든 존재하는 것. 결국 존재의 목적은 존재가 아닐까.
Editor | 주인
남자사용설명서
형광등이라면 바로바로 켜지고 환하게 방을 비출 것. 그럼 좋은 형광등이다.
자판기도 동전 안 먹고 음료가 무사히 나올 것. 그럼 좋은 자판기다.
일순의 어머니가 훔쳐 간 전동칫솔도 그 쓰임새는 분명하다.
하물며 틀니는 어떤가. 깨지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 물건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아무리 돌이켜봐도 태어날 때 제품 설명서 같은건 동봉되어 있지 않다. 애초에 메뉴얼은 없다는 사실은 사람을 오작동하게 만든다. 이 오작동은 환자들에게 지독한 방어기제로 이어진다. 오설미의 ‘작화증’이 그렇다. 그녀 이야기의 묘사는 가히 폭력적이다. 윤간을 당해 항문을 꿰맸다거나, 송아지 ‘정이’를 사랑했다거나, 세일러복을 입고 아내를 살해했다거나. 그렇지만 더욱 폭력적인 건 상대의 진짜 상처를 무시하고 허구를 끼워 넣는 것이다. 동시에 서글프다. 알 수 없음의 공포를 해소하려는 발버둥으로 보인다.
우리도 종종 ‘모른다’라는 공포를 빌미로 이야기를 만든다. 지구평평설이나 사람은 달에 갔다 온 적이 없다는 음모론들만 봐도 그렇다. 오설미의 병은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오작동 중 하나일뿐이다. 그런 오설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설미는 일군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억지스러운 긍정보다는 어쩌면 체념에 가까운. 그냥 고장 난 상태 그대로 버텨보자는 텁텁한 위로이지 않을까.
Editor | 고블린
건전한 질문
건전비디오는 감상을 충분히 나눈 뒤, 준비된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나만의 답을 슬쩍 고민해 온다면, 대화의 즐거움이 깊어집니다!
- 일순은 영군을 고치려 하지 않고 함께 망상합니다. 때로 망상은 공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돌볼 때, 그 사람의 세계에 맞춰주는 것과 현실로 데려오려는 것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나요.
- 신세계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말 안 됨'ㅡ훔치심, 싸이보그, 무조건 죄송ㅡ을 겪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 상태를 마주하죠. 각자의 '말 안 됨'이 궁금합니다.
- 영화 속 라디오는 싸이보그가 가져선 안 될 7가지 덕목으로 '동정심, 슬픔, 설렘,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을 꼽습니다. 영군은 상처받기 싫어 이 감정들을 지우려 했지만, 사실 이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7가지 감정 중, 나를 가장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나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호스트 주인은 울산으로 출근을 하게 되어, 6월 모임은 고블린 단독 호스트로 진행합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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