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스트가 공유하고 싶었던 단상을 에세이로 담아보았습니다. 본격적인 모임 전, 가벼운 워밍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당신인 채로
어떻게 살 거냐고? 이 질문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손가락으로 누군가의 삶을 넘겨볼 수 있는, 구실 없이도 연락하기 쉬워진, 무한한 연대의 세상이다. 그런데 차갑도록 푸르른 오피스텔의 단칸방, 싱글 사이즈의 침대, 얇은 이불 속만이 내 세상인 날이 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몸을 웅크리면,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산실에서 잠든 나츠코처럼.
마히토는 그런 나츠코를 찾으러 고행길을 나선다.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른 적 없는 새엄마를, 굳이. 갖은 고생 끝에 마주한 나츠코는 마히토에게 소리를 지른다. 자기를 구하러 온 아들에게 하는 말이 '꺼져, 너 따위는 싫어'라니.
나라면 됐다 싶어 그대로 탑을 나왔을 테다. 그런데 우리의 올곧고 올곧은 마히토는 다르다. 산실을 둘러싼 하얀 종잇장이 파닥이며 아무리 할퀴어도 버틴다. 악을 쓰며 밀어내는 사람을 향해, 처음으로 '나츠코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냥 엄마도 아니고, 나츠코 엄마. 돌아간 엄마의 자리에 당신을 끼워 넣는 게 아니라, 당신을 당신인 채로 엄마라 부르겠다는 선언이겠지.
마히토는 미련하다. 나는 그 미련함이 부럽다. 어차피 아무도 날 찾지 않는다고 웅크린 채 믿어버리고 이불 속으로 숨는다. 이불 속은 안전하다. 다만 그 안에선 아무도 나를 부르지 못하고, 나도 아무도 부르지 못한다. 꺼지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미리 꺼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 거냐고. 그 답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다만 사는 건 대단한 각오가 아니라, 꺼지라는 소리를 듣고도 기어이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버튼만 누르면 누구에게든 닿는 세상에서, 정작 나는 혼자이길 택해 왔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나를 밀어낼 게 뻔한 이름 하나를 한참 들여다본다.
Editor | 주인
말년과 바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이번 영화의 제목이다. 장엄한 걸 넘어서 도발적이기까지 한 미야자키의 은퇴작(지금은 번복했다) 제목.
누구라도 이 제목을 보고 영화를 감상한다면 미야자키의 삶의 깨달음 따위를 상상하게 된다. 감독은 초기작부터 그가 발견했던 숭고한 가치들을 노래해 왔다. 우리는 이번 작품에서도 그럴 것이라 기대한다. 탑의 주인은 마히토를 통하여 우리를 물의 도시로 초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그 기대에 답하지 않는다. 상징은 넘칠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영화는 생각할 여지를 주기 전에 다음 장소로 향한다. 세계에는 확실한 법칙도 없다. 세계를 만든 노인과 여러 주민이 있을 뿐이다. 관객이 느끼는 이 불친절함은 마히토에게서 정점을 찍는다. 세계에서 겪는 여러 일에도 마히토는 어린아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무덤덤하고, 영화는 그가 왜 자기 머리를 돌로 찍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가 유일하게 스스로 답하는 순간이 있다. 탑의 주인 앞에 선 마히토는 그 상처가 자신이 스스로 낸 것이며, 자기 안의 악의가 남긴 흔적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흔적을 이유로, 원치 않는 세계의 후계자 자리를 스스로 거절한다.
탑의 주인이 마히토에게 바란 것은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다. 오랜 여정으로 홀로 쌓아 올린 이 세계를 자신의 믿음만큼 악의 없이 이어받을 사람이었다. 미야자키가 자신의 영화를 매개로 관객에게 바란 것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작부터 발견해 온 가치들이 그대로 전해지고, 계속 지켜지는 것. 은퇴를 선언하고 번복하면서까지 다시 붓을 든 이유도 여기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히토는 거절했다. 자기 머리에 남은 흔적, 스스로 낸 상처를 증거로 들면서. 완벽하게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물의 도시는 노인의 세계지 마히토의 세계가 아니다. 마히토는 돌아가야 한다.
마히토는 대신 돌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온다.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질 것도 없는, 이세계에 흔하게 굴러다니던 평범한 돌이다. 무너지는 세계에서 그가 가져온 전부다. 왜가리는 말한다. “다행히 힘센 돌은 아니니까, 점점 잊을 거고 그러면 돼.”
이 엔딩은 극장을 나서는 우리와 겹친다. 우리는 미야자키의 세계를 통째로 이어받지 못한다. 그의 가치가 우리를 완전히 바꾸지도 못한다. 다만 저마다 돌 하나쯤은 주머니에 넣고 나온다. 어떤 장면, 어떤 인물, 이유는 모르겠지만 잊히지 않는 무언가를.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나고 나니 제목이 다르게 보인다.훈계가 아니라 순수한 질문. 그 질문에 답을 주려고 평생을 자신의 세계를 다져온 사람이, 마지막에 와서야 고백한다. 나의 이야기가 너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저 네 세계를 이루는 작은 블럭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고. 끝을 향해가는 창작자가 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정직한 인사였다.
오늘도 다른 시간과 배경을 가진 우리가 미야자키의 탑에 모입니다. 극장을 나서며 여러분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그 평범한 돌 하나는 어떤 모양이었는지, 다가오는 건전비디오 모임에서 그 돌들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Editor | 고블린
건전한 질문
- 큰할아버지의 '악의 없는 돌 13개' 제안 — 받으시겠어요? 마히토의 거절은 옳았을까요?
- 마히토는 자기 상처를 "내 악의의 표시"라고 부르며, 그걸 이유로 완벽한 세계의 후계자 자격을 스스로 반납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 보통 영화는 주인공이 '자격 있음'을 증명하는데, 이 영화는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게 성장이에요. 자기 악의를 인정하는 것이 왜 이 영화에선 구원이 될까요?
- 마히토처럼, 나에게도 '내 악의의 표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내 못난 부분)가 있다면요? 그리고 그걸 인정했을 때(혹은 인정한다면) 뭐가 달라졌나요/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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