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수련을 시작한 지 두 달을 하루 남기고서야 드디어 첫 내담자가 생겼다.
내담자는 외국에 사는 한인 교포셨는데 비대면 상담을 받고 싶으단다. 소식을 받은 건 아침 11시였고, PT는 1시에 있었다. 당장 상담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셔서 좀 당황했다. 아니 저한테도 첫 내담자인데 그 마음의 준비라는 걸 좀 해야지 지금이 신부 증명사진만 보고 바로 결혼하는 그런 시대도 아니잖아요....?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가 이 내담자와 연결이 안 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넉넉하게 2시 40분 이후부터 가능하겠다고 했더니, 그럼 오늘 저녁은 어떠시냐고 하더라. 그건 괜찮다고 대답하고 좀 방심을 했다. 운동 갈 준비를 하면서 내담자 프로필이랑 mmpi 검사지를 받아서 슬쩍 훑어보고 있는데, 오늘 2시 20분으로 예약이 바뀌었다는 연락이 왔다. 2시 40분도 아니고 20분이란다.
몬가.... 내담자란 예측을 불허하는 존재구나.... 하긴 나도 상담을 받을 때는 그런 내담자였겠지.... 운동을 다녀와서 느긋하게 mmpi 해석부터 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헐레벌떡 운동을 가서 난생 처음 중량 스쿼트란 걸 하고, 근육이 탈탈 털린 다리로 집에 기어들어와서는 헐레벌떡 닭가슴살을 데우고, 첫 상담에는 뭘 물어봐야 할지를 헐레벌떡 정리했다. 접수 면접이라도 해봤다면 긴장을 덜었겠지만 나는 접수 면접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멘붕이 몰아치는 가운데 걱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해외에 사는 내담자고 지금 거긴 늦은 새벽이니까, 상담 시간을 당겼다는 건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상담을 하려고 했다가 자기 전에 상담을 하는 걸로 마음을 바꿨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시급했으면 하룻밤을 못 기다리고 말을 바꿨을까? 다급하고 위태로운 사람이 오는 건 아닐까? 첫 내담자인데 한 시간 동안 펑펑 울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역시 내담자는 예측을 불허하는 존재였다(2). 겨우 땀만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잔뜩 긴장해서 다리를 벌벌 떨면서(긴장을 안 했더라도 근육통으로 덜덜 떨렸을 게 분명했지만 덕분에 2배쯤 더 떨렸다) 줌을 켜놓고 내담자를 기다렸다. 울상으로 오리라고 생각했던 내담자는 뜻밖에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었던 내담자는 말을 조리있게 잘 했고, 상담을 즐거워하는 것이 목소리와 표정에서도 느껴졌다. 물론 그 편이 훨씬 낫기는 했다. 내담자가 감정적으로 고양된 상태였으면 나도 어마어마하게 당황했을 테니까.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김이 새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첫 상담은 그럭저럭 잘 해낸 것 같았다. 첫 회기에는 내담자의 대략적인 문제와 증상을 파악하고 상담의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업을 하는데, 그건 충분히 잘 해냈던 것 같다. 어설프게나마 전문가 흉내도 잘 냈던 것 같고. 하지만 역시 내담자는 예측을 불허하는 존재였다(3). 상담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내담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우울함과 공허감에 너무 압도가 되어서 힘들다고, 혹시 내일 바로 2회기 상담이 가능하냐는 질문이었다.
주 1회 1시간으로 구조화된 상담 이외의 상담이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나의 머릿속이 잠깐 하얘졌다. 첫 상담은 어떻게든 잘 넘겼지만 두번째 상담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로 어영부영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적당히 괜찮은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아시다시피 저는 수련을 하고 있는 초보 상담자고, 제가 배운 상담도 주 1회로 구조화된 상담이에요. 그래서 상담을 당겨서 하는 게 괜찮을지 제가 지금 판단이 서지는 않네요. 감독을 해주시는 교수님께 물어보고 답변을 드려도 될까요? 그런데 당장 다음 상담은 답변을 들을 때까지는 며칠 여유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행히 내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1주일은 아니었지만, 5일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담 시간을 갑자기 당기신 것을 보고, 사실 A님이 감정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오늘 당장 마음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하신 게 아닐까 하고요. 지금 마음이 많이 무거우신가요? 상담 내내 생글생글 웃던 내담자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네... 많이 힘들어요. 그러시구나. 그 마음은 제가 잘 알았어요. 내일 당장 상담을 하는 건 어렵지만, 제가 A님과 상담을 하는 동안 A님의 그 마음 잘 지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게요. 그리고 나의 첫 상담은 끝이 났다.
오늘 하루치의 기력을 그 한 시간에 다 쏟은 것 같았다. 오후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저녁에는 산책길에 나서서 친구와 전화를 했다. 애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애인이 자신에게 소홀해졌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민하는 친구였다.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아직 없는 그 친구는 내게 가까운 이를 보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물었다. 나는 밤바람을 쐬며 먼 길을 조금 먼저 가기를 선택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오래 되었고 자주 꺼내었던 이야기도 이따금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곤 한다. 나는 울컥 쏟아질 것 같은 마음을 조심조심 누르며 친구에게 말했다. 제가 상담을 하다 보면 자살을 하는 내담자도 만나게 되겠죠? 전 그게 무서워요.
전화를 끊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은 맑았고, 서울에선 보기 힘든 별빛 몇 점도 눈에 들어왔다. 태산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우리는 내담자라 부른다. 때로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러지고 마는 사람도 있지만, 상담자가 그 삶의 무게를 나눠 질 수는 없다. 상담자가 나눌 수 있는 것은 진심어린 응원과 위로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진심이 많은 사람을 살린다. 나 또한 내 나이 또래의 어리숙하고 혈기가 넘쳤던, 나처럼 수련생 신분이었던 상담자의 진심을 빌어 하루를 살아냈던 사람이었다. 어설프고 실수 투성이었던 그 젊은 상담자의 마음으로 삶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었던 내가 오늘 상담자가 되었다.
나는 오늘,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공백이 길었습니다. 바쁘고 지쳐 펜을 잠시 놓았을 뿐, 저는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답니다.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마음을 담은 글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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