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동생, 양양이 (4)
군대에서 나는 상사병자가 연인을 그리워하듯 양양이를 그리워했다. 이십 대 초반의 짧은 인생에서 군대는 내가 겪었던 가장 가혹한 환경이었다. 몸 성히 전역한 지도 거의 십 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내게 군대는 미스테리하다. 어떻게 군 부대의 울타리 하나만 넘으면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 울타리 밖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되었을 사람들이, 그 울타리 밖에서는 얼마든지 웃어 넘길 수 있는 자그만 것에도 왜 그렇게 핏발을 세우며 싸우는 걸까. 어느 곳이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군대는 왜 그렇게까지 부적응자에게 가혹할까.
군 생활 내내 철저한 부적응자였던 나는 온정에 목이 말랐다. 목이 마르다는 표현이 담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처절하게 목이 말랐다. 친밀한 관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채로 거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가혹한 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부대 안의 동물들을 좋아했다. 물리적 체온이나마 나눌 수 있는 것들은 동물 뿐이었기에. 군견 소대의 견사에서 밤낮 없이 짖어대는 폭발물 탐지견들이나, BX 쓰레기장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길고양이들을 나는 사랑했다. 휘발유와 신나를 넣어두는 유류보관함 지붕에 조그만 둥지를 틀었던 산새들, 밤마다 귀청이 떨어지도록 울어대는 고라니들…
외로운 마음으로 그런 풍경을 마주하는 일들은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도 비슷했다. 무릎에 올라온 길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잠깐의 미소는 지을 수 있을 지 몰라도 관계에 대한 갈급함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부대 안에서는 어디에도 내게 안정적인 애정과 체온을 주는 존재는 없었다. 생활관의 관물함에는,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양양이의 사진이 하나씩 붙기 시작했다. 심한 몸살감기에 걸렸을 때 뜨거운 물을 담은 수통에 수건을 감고, 양양이에게 팔배개를 해줄 때처럼 수통을 가슴팍에 바짝 껴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양양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지막 휴가를 나온 날이었다. 양양이가 앓기 시작해 병원에 데려갔는데 그 병원에서 오진을 한 모양이었다. 어느 늦은 밤, 양양이는 발작을 일으켰고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죽었다. 죽은 양양이의 심장은 잔뜩 부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양이의 체온이 식지도 않은 새벽, 아버지는 양양이를 동네 공원의 산책로 곁에 묻었다고 한다. 나는 군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국화 한 송이를 들고 그 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울었다. 나는 내 동생의 마지막조차도 지키지 못한 형이 되었다.
부모님은 부대에서 우울증으로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내게 양양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조심스러우셨을 것이다. 부대 안에서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을까 두려우셨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 후로 빈 집에 들어올 때마다 견뎌야 하는 침묵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 곁에는 여자친구 K가 있었다. 데이트를 하던 도중 K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벌컥 쏟는 날이 잦았다. 다행히 그 빈도는 점차 줄었다. K가 나를 떠날 즈음이 되었을 때, 나는 이제 내 동생의 빈 자리를 혼자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흘렀다. 크레바스처럼 그 깊은 부재의 구덩이에도 풍화작용이 일어났다. 양양이의 부재 때문이 아니더라도 울고 웃을 일은 많았다. 8년의 눈물과 웃음과 피땀과 흙먼지가 양양이의 빈 자리를 메웠다. 양양이는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볼 때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싱긋,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한 쪽의 페이지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차를 몰고 장을 봐오는 길에 우리는 양양이를 마지막으로 데려갔던 병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한숨처럼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양양이가 죽고 나서 어머니는 내일 반려견 장례 업체를 알아보자는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말없이 새벽에 양양이를 동네 공원에 묻고 온 것이었다. 어머니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아버지를 향한 짙은 배신감과 회한이 묻어 있었다. 심각한 부부싸움 후에 부쩍 어머니가 아버지를 흉보는 일이 많아지던 시기였다. 엄마가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니네가 좀 이해해라, 라는 취중선언 이후 어머니는 그렇게 오래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계셨던 아버지의 흉허물을 하나씩 풀어놓고는 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도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무덤덤했다. 아버지가 그랬구나. 가장 양양이를 이뻐했던 아버지가 그랬구나. 왜 그러셨을까. 서른 줄이 넘어가며 나도 아버지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양양이를 왜 마음대로 동네 공원에 묻으셨느냐고 내가 아버지의 면전에서 캐물을 일은 없겠지만,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지는 상상해볼 수는 있었다. 어머니의 조용한 폭로가 지나간 침묵 속에서 나는 상상했다.
아마 아버지는 이 조그만 강아지에게 당신이 위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결같이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고작 강아지 하나가 죽었다고 어깨가 쳐지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고작 깊은 망각 속에 서둘러 양양이를 묻어 버리는 것이 아버지가 떠올릴 수 있었던 최선은 아니었을까. 울지 않기 위해,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지금껏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던, 그러나 아버지도 피와 살과 눈물로 이루어진 인간이란 걸 이제는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이었다. 누구나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앞에서는 슬프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 상실 앞에서조차 슬퍼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군대를 전역한 후 나는 새로 강아지를 데려오자고 부모님을 오래 졸랐다. 강아지의 이름도 양동이라고 미리 지어두었다. 거기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양양이의 동생이라는 뜻이었다. 하나는 양철로 만든 양동이처럼 아프지 말고 튼튼하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한결같이 새로운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거부하셨다. 양동이를 품에 안아들 날은, 아직은 까마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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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와 피드백 설문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예정보다 길었던 8월 연재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지난 연재 때도 그랬지만, 연재 후반부가 될수록 힘이 빠지네요. 최근에는 피곤함에 억지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글쓰기가 즐거운 줄만 알았는데, 뜻밖에 고통스럽기도 하다는 걸 '짬밥'이 조금 붙고 나서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고통 끝에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상쾌하지요. 내가 이렇게나 많은 글을 써냈구나, 내 삶의 또다른 한 조각에 내가 의미를 기어코 붙이고 말았구나... 그런 감상을 느낍니다. 그 의미의 무더기가 어느덧 책 한 권을 묶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만큼이 되었네요. 많이 다듬고, 많이 덧붙여야겠지만, 오늘은 잠들기 전에 맥주 한 캔으로 자축을 좀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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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맙습니다.
당신을 비추는 낮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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