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배우 정혜안입니다.
몇 달 전부터 제 안에서 맴돌고 있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유행이란 무엇일까?’
단순한 패션이나 밈처럼 표면적인 흐름을 넘어서, 보다 넓은 범주에서의 유행이요. 삶의 방식이나 문화,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유행이랄까요? 무언가 확 타오르고, 그 영향으로 많은 요소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묘한 감정이 듭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응집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요.
물살이 너무 세서 자칫하면 금세 휩쓸려갈 수도 있겠구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저는 유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주 무시하지도 못하는 사람 같습니다. 맨 앞에 설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맨 뒤에 서기도 싫은 마음일까요? 그래서 중간에 샛길로 새는 사람입니다. ‘애매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사실, 저는 애매함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입니다(이었습니다). ‘모 아니면 도’, ‘극단값의 사람’이라는 수식어로 종종 스스로를 표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요. 확실하지 않고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감정이 늘 불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애매함’에 대한 가치 판단이 조금씩 달라진 기분입니다. 애매한 게 뭐 어때서?
선택과 취향마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물살이 셀수록 중심은 흔들리기 쉽잖아요.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싶은 조급함도 생기고요. 그럴수록 저는 애매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꺼내들고자 합니다.
저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서요.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오히려 더 큰 화를 입게 된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망설임으로 보이더라도, 나는 나의 속도를 지키며 걸어가자고, 매번 다짐하며 노력 중입니다.
계속해서 양극화가 일어난다면, ‘애매함’이 오히려 특별함이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라고 합리화를 하며 스스로를 달래봅니다. 애매함은 어쩌면 가능성을 열어두는 행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거센 물살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터득하는 거라고요.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깨달을수록, 서둘러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샛길로 새다 보면 어딘가에는 닿게 되지 않을까요? 길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길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속에서 나의 레이더를 예민하게 세우고, 위치를 끊임없이 탐지해가며 묵묵히 노를 저어 보렵니다.
어쩌면 그게, 지금 저에게는 유일한 확신일지도 모르겠어요. 도달은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오늘도 어딘가에 미친 듯이 도달하고 싶은 마음의 모순을 꾹꾹 눌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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