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여덟 번째 편지 / 팔월 둘째 주

202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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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는 그대에게

호주에서 보내는 편지, 이채 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눈 깜짝할 새에 주말이 왔습니다.

 저는 또 한 번 휘몰아치듯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브리즈번이라는 으리으리한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왜 이별은 늘 익숙해지지가 않는지, 아직도 스쳐간 인연이라며 쿨하게 떠나보내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습니다. 세 번, 네 번을 잘 가라며 악수를 하고, 이별의 포옹을 하고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퍼스에서의 마지막을 함께 해 준 애나벨씨에게 편지를 끄적였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이 마음이 글로 옮기니 한 번, 영어로 번역하니 또 한 번 흐려지는 것 같아 그게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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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뿐일까요, 공항까지 배웅을 해준다는 한별언니와 유진언니. 미처 인사하지 못한 친구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마음이 참 헛헛한 며칠이었습니다. '조금 더 있다 갔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과 동시에 시간의 유한함 앞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관계들을 바라보며 일명 <쿨하게 이별하는 법>을 연습 중입니다.


 저는 이 곳 퍼스에서 애나벨이라는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분 집에서 약 한 달간 페인팅 일을 했습니다. 일자리를 내어주신 덕에 간식에 점심까지 아주 야무지게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친구가 놀러온다니 흔쾌히 방 하나를 새로 꾸며 둘이 잘 수 있는 아늑한 숙소 하나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우리는 왜 여행을 할까요.‘ 채완이가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행의 이유라- 그저 다른 문화를 만나보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쌓고 싶어서라고 답하기에는 너무나 허점이 많다는 생각에 나는 왜 여행을 택했을까,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느 아침, 애나벨은 내 또래의 나이였을 시절 그녀가 여행한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겪은 행복과 어려움을 모두 알기에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고 합니다. ‘여행하며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 여행하는 아이를 키운다.’ 이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신세지지 않는 여행은 불가능합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타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이들에 기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동안 신세진 많은 얼굴들이 떠올리자니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외로울 때 - 어떻게 알고 집에 초대해 밥 한 끼 대접해주던 마루나 씨, 한 달 남짓 일한 카페였지만 '너는 특별하다'며 레퍼런스를 써주겠다는 작은 카페 사장 폴 씨와 그렉 씨, 캠핑을 떠난다니 바리바리 옷가지와 캠핑 장비를 챙겨주시던 앤 씨 등.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내 또래였을 시절,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누군가에게 기대 살아간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네팔의 히말라야를 홀로 등반해 보았거나, 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을 다녀왔거나, 영국에서 남편을 만난•••. 여행에서 손 내밀어주는 이들의 소중함을 잘 알기에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신세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신세지지 않는 여행을 위해 돈을 씁니다. 돈이 있으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패키지 투어를 구매하고, 택시를 타고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비싼 호텔에 딸린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면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도 여행의 목적을 다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에는 지불한 돈에 따른 만족도로 평가되어 마음 속에 남습니다. 비교적 싼 값에 즐긴 액티비티는 '가성비 괜찮은 코스', 좋은 사람들과 시설이었지만 벌레가 나온 숙소는 '가격 대비 아쉬움' 등으로 정리되어 기억됩니다. 분명 그게 다가 아닐텐데 말이죠. 

무엇을 만나게 모르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기대와 설레임, 우연히 만난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행복까지. 낭만 젊음 사랑처럼 돈으로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으니까요.

 지난 3개월간 신세지는 삶을 살며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사랑을 갚을 수 있을 지를 많이 고민하곤 했습니다. 더 일을 열심히 해야 할 지, 예쁜 선물을 사야 할 지 말이죠. 그리고 그 답은 그들이 그랬듯, 여행하는 청년들에게 선뜻 손내밀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남보다 더 이득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회보다는 무언가를 찾아 여행하는 아이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가 낫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사회는 조금 더 신세질 줄 아는, 서로 기대어 살 줄 아는 함께 여행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실 제가 여행하는 이유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습니다.

행 복 하 니 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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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한 주는 채완이와 함께 보냈습니다. 지난 편지에 담았듯 ‘그럴 수만 있다면 호주로 날아가고 싶다’던 채완이는 정말이지 긴 시간을 날아 먼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반년 전과 변한 것이 없었고, 채완이는 조금 어색하리만치 언니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담담하고 단단하고 애틋했습니다. (채완사랑해)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꽤나 다른 속도로,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여행했습니다.

채완이를 보며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여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세계 일주가 꿈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여행은 집 앞 짧은 산책일 수도 있는 것과 같이 말이죠. 최선을 다해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 모습에 심취해 있던 저에게 여행은 이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에 갇혀 살던 사람이었는가를 깨달은 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부끄러워졌습니다.

 

어쩌면 꽤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만의 행복을 찾는 모든 여정을 응원합니다.

 

사랑 담아, 이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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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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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우식

    0
    4 months 전

    글에서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느껴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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