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한 주도 무사히 잘 보내셨나요?
저는 마치 한 달 같은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만큼 설레이고 다채로운 한 주였습니다.
저의 하루는 강아지 산책으로 시작합니다. 여행을 간 이웃집 가족의 개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유독 성깔이 ...강한 강아지의 산책은 산 넘어 산입니다.
공을 던져주면, 다시 가져오지 않고 저 멀리에 놓은 채 제가 갈 때 까지 짖기를 멈추지 않는다거나, 그런 식입니다.
그리고 오후엔 페인트 칠을 합니다. 또 다른 이웃집 아주머니의 집 전체를 페인트칠하는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죠.
페인트 칠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그저 편안하게 일하고 수다떨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나면 저녁이 옵니다. 저에게 주어진 5번의 혼자 보내는 밤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내면 좋을 지를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결국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번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넓은 침대와 주방, 맛있는 것들이 가득 차 있어도 혼자 있어선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차리고는 은근한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사람들과 시끌벅적한 밤을 보내고 나면 그 밤은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아직 열 여덟살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어른이 되어도 이 공허함은 유효할까요.
저는 아직도 이 글을 보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에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시에서의 일상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 편지에 이어 전하는 소소한 일상이지만, 아주 닮고도 다른 생활의 모습입니다.
집과 집의 사이 거리가 차로 10분은 족히 되었던 시골 마을 마가렛 리버와 다르게 퍼스는 꽤나 바쁜 곳이었습니다.
큰 건물들과 적당한 대중교통, 그리고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도서관 세 개까지 생활과 심심한 여가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었습니다.
다만 푸릇푸릇하고도 여유로운 도시의 모습은 서울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만큼 다른 느낌을 풍겼습니다.
처음 이 곳으로 올 때 가지고 있던 큰 큰 큰 꿈은, 플로리스트로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집 주면의 모든 꽃집에 이력서를 돌리고, '음.. 범위를 넓혀야겠다.' 하며 식물 도매상, 육묘상, 조화 꽃집까지 이력서를 돌려봤죠.
이력서를 돌리는 것은 정말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떨릴 만큼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연락을 받는 것은 더욱 어려웠죠. 이력서를 검토하고 연락을 주겠다는 사장들 중 몇몇은 악수를 하고 이름을 물으며 기대를 하게 만들었지만, 역시나 호주인들의 친절에 넘어가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경력이라고는 -풀무 농고 졸업-과, -마가렛 리버 정원 봉사(한 달)-정도가 전부였던 저는 아쉽게도 범위를 더 더 넓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기 싫었던 일 1순위에 있던 한식당 주방에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식당에서는 모든 것이 수상할 정도로 빠르고 순탄하게 흘러갔습니다.
처음 이력서를 돌린 날 면접을 보고, 급여를 확정짓고, 다음 날 부터 시험 기간을 가지더니 바로 그 다음 날엔 출근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겠어요.
처음 사장을 본 날, 그 때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건넨 첫 마디는 "너도 1주일 하고 그만둘거지?" 였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면접자에게 하는 첫 마디가 이렇다니,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아니요? 세 달은 할건데요?" 하며 눈 똑바로 뜨고 대들었죠.
결국 그 호언장담은 지키지 못했지만, 기싸움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업소용 식기세척기를 써본 적 있냐고 묻는 질문에 아니라고 하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식당 알바 경험은 없는데요, 기숙사 학교에서 학생들이 설거지를 다 해서 당연히 써본 적 있습니다(프로페셔널하게 웃으며)."라고 답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니,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주방에 들어가 제가 해야했던 일은 설거지였습니다. 유튜브로 식기세척기 사용 방법을 보고 갔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설거지를 끝낸 뒤에는 비빔밥 만드는 법, 치킨 튀기는 법, 국 토핑하는 법 따위 까지도 금새 알려주시더군요.
물론 하루 정도가 지나니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성에 맞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사장.. 50대 중년 남성 한국인이었던 사장은 차암.. 힘들었습니다.
예, 옙, 넹, 네에, 응응(가끔씩) 등으로 대답할 때 마다 한숨을 푹 쉬며, "내가 딸같아서 알려주는거야~ 너 어디 가서 그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니까?"라고 말하시다가 급기야 "네 남자친구한테나 가서 그렇게 말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채 : "아느이,.. 사장님....이건 제,,,말투인데....이것까지 뭐라거 하시능건....." 기가 팍 죽어버린 것이죠. 이렇게 세 달을 있다가는 꿈과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직장을 빠르게 떠나고, 저는 무언가를 찾고자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하고싶었던 것은 봉사활동이었습니다. 퍼스 시내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정원인 킹스파크에서 봉사를 시작하고 난 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일곱시에 집을 나서 꽤나 전문적인 산림 복원에 대해 배우러 갔습니다. 모든 정원과 산림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는데, 3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져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산림 복원 그룹이 하는 일은 주로 작은 나무들을 돌보거나, 호주 고유종의 나무들을 빈 곳에 심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가든케어 조와 산림복원 조가 토론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었습니다. 보기에 지저분해 보이는 큰 죽은 나무들을 치울 지 말 지에 대한 토론이었는데, 가든케어 조는 미관을 위해 치우는게 좋겠다는 의견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산림 복원 조의 몇몇의 의견은, 그 안에 살고 있는 미생물과 곤충들을 위해 그대로 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곤충들과 미생물을 고려하는 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여유로운 어느 날에는 도서관에 갑니다. 큰 통유리 사이로 자연이 잔뜩 보이는 아름다운 도서관은 그저 앉아서 읽히지 않는 영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일주일 중 몇일은 영어 회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들르곤 했습니다. 이탈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부탄, 또 처음 들어보는 여러 나라들에서 모인 청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 못하니까 괜찮다는 마음으로 마구 영어를 내뱉다 보면 마음이 참 편안했습니다. 대부분의 도서관이 갖고 있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영어 회화 프로그램은 관계를 쌓기에도, 영어를 연습하기에도 많은 도움이 되니 기회가 된다면 참여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우프(WWOOF)를 하며 살고 있던 덕이라고 확신합니다. 오전 약 세시간가량 집안일과 정원일, 강아지 산책 등을 하고 나면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떄문에 돈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나눠 먹고, 일상을 나누고, 가족으로 부를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상은 감정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꽤나 편안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우프를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수많은 부작용과 우려점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 집의 가족으로 살아가다가 만난 마을과 이웃들, 그들의 친구들까지 많은 것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큰 연결고리가 우프였기 때문입니다.
박완선생님과 전화를 하며 ‘돈과 커리어, 경험, 관계 따위의 것들 중 어느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하소연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해보되,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에 얽매이는 순간 나를 잃어버린다고요. 역시 옳은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나니, 돈은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을 통해 절로 따라오는 것들 중 일부일 뿐이었고, 경험과 인연들은 돈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했습니다.
세 달간 설거지를 했다면 얼마나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을지, 휴. 그만두길 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를 달리며 글을 끄적이고 있습니다.
우연히 떠나게 된 로드트립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 아름다운 곳들의 이야기를 적어 보낼 생각에 벌써 두근거립니다.
모두 평안하고 아름다운 한 주 보내세요.
사랑 담아,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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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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