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꾸준함이란 거품이다. 닿기도 전에 부스러지곤 하니까. 지난 여름에 사놓은 프랑스 자수 키트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라. 휴양지에서 완성하겠다며 세부에 들고갔으나, 둘째날 밤 꺼내놓기만 하고 잠들었다. 결국 한 수도 뜨지 못하고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키트는 싱크대 아래 수납장에 들어간 채 어느 이집트의 미라 부럽지 않게 잘 보존되고 있다. 어쩌다 내 품으로 들어온 키트는 사실 자신이 식재료로 태어난 것아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게으른 나조차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도 무려 21년째 말이다. 바로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는 일이다.
그저 조금 더 큰 유치원인 줄 알고 들어갔던 초등학교 6년, 정신없이 지나간 중학교 3년, 수험생 이름표를 달고 살았던 고등학교 3년, 그렇게 12년을 보내고 나면 학생 꼬리표는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학교 5년, 석사 2년, 그리고 지금 밟는 박사과정까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 오래 학교에 있게 되었을까. 서정주 시인을 키운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는데, 나는 칠 할 오 푼을 학교가 키웠다. 나의 자화상에는 부끄러운 성적표과 가정통신문, 학점표와 텝스 점수가 그득하다. 잘하진 않았더라도 이렇게 오래했으니 앞으로 몇 년만 버티고 박사 학위를 받게되면 세상에 내 이름을 당당히 새길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기엔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국내만 해도 박사학위 취득자가 만 명을 넘긴지 한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년. 그렇다면 도대체 이세상에 내가 나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일까.
어렸을 때 종종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를 즐겨봤다. 거대한 한장의 그림, 그안에 빼곡하게 그려진 수많은 사람 중에 빨간색 줄무늬 스웨터를 입은 주인공 월리를 찾아야 한다. 난이도가 제법 있긴 하지만 나름 금방 찾기 위한 노하우가 있다. 일단 빨간색이 없는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친다. 그리고 월리처럼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도 X표를 친다. 이런 식으로 월리의 특징을 하나씩 찾아서 소거하다보면 마침내 곱슬머리에 빨간 산타모자, 장난끼 가득한 미소의 월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작가가 실수로, 그리고 편집자가 감수를 제대로 못해서 똑같은 월리를 두 명 그려놨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아주 닮은 월리랑 미묘한 차이를 독자가 찾아내지 못해서 엉뚱한 사람을 찾아놓고는 월리라고 굳게 믿는다면? 페이지 어디선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는 월리는 그저 주저앉아서 울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갑자기 나를 포함해서 지구촌에 있는 모든 21년차 학생들이 한 장소에 갇혔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 중 유일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자만이 이 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어떻게 이 도플갱어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 부모님이 약국에서 일하셨던 분 계신가요. 그리고 전공이 디자인과이신분? 다행히 디자인이 그렇게 유망하고 인기많은 전공은 아니라서, 그리고 동시에 부모님이 약사인 경우는 더 드물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을 것이다. 월리를 찾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반복하면 무사히 그 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겨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무한한 슬픔에 빠질것이다. 박사과정, 대학원생, 남성, 한국인, 약국집 아들, 삼남매. 이런 이름표는 나를 나답게 해주지 않는다. 나는 유일해짐으로써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분류될 뿐이다.
나는 언제 나다워지는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렇다면 반대로, 언제 나는 타인이 되는가. 나는 대부분 경우에 타인과 구분할 수 없다. 직업, 소득, 사회적 위치, 취미 같은 몇 가지 단어만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도 동일시될 수 있다. 나의 생각과 몸, 고유하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을 통해 나는 나 자신보다도 타인과 같아지기를 시도한다.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려는 노력은 결국, 타인과 같아지고자 하는 욕구로 귀결된다. 같이 트랙을 달리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은 사람, 가장 먼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 가장 잘 하고 싶어하는 개인은 결국 다수가 된다. 1등이라는 이름표는 결국 2등과 구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구분되고자 무언가를 성취한다면 나는 결국 타인의 부분합이 된다. 대전시 유성구의 디자인 연구자는 위치는 나를 특별하게 해주는 이름표지만, 동시에 나를 언제든 타인과 같게 만들 수 있다. 대전시에서 그토록 자랑하는 대덕연구단지의 일부인 것이다.
내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온전한 성질은 어디에 있는걸까.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나다움을 찾고자 하는 문제의 정답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 속에서 찾았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관계다. 차가운 현대 사회의 톱니퀴의 일부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타인의 존재는, 동시에 나와 마주하면서 다정함과 체온을 나눈다. 진짜 관계, 그것은 뜨듯미지근할 수는 없고 항상 뜨거운 것이다. 차가운 나에게서 뜨거운 눈물을 쏟게 만드는 아버지의 주름. 그것은 쌓여가는 빚더미 속에서도 오히려 우리집을 대궐같은 집도 부럽지 않게 만든다. 나에게 미운 말을 쏟아내고는 울고 있는 애인을 보면서 나의 마음보다도 다쳤을 당신의 마음을 걱정하게 만드는 것. 불완전함에서 피어나는 관계가 주는 아름다운 모순들. 이것은 타인과 같아지려고 발버둥 치면서도 특별해지고 싶은 나라는 존재도 포근하게 품어준다.
우리는 타인에게 부여받은 이름표에 안정감을 느낀다. 직장에서 얻은 직함. 학교라는 규칙 속한 학생이라는 이름표. 소득 분위에 표시할 수 있는 통장에 잔액. SNS에 표시되고 공인될 수 있는 팔로워수와 좋아요수. 이름표보다 관계는 훨씬 불완전하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우정은 흔들린다. 가족은 세상을 떠나고 정이란 꼭 눈물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거짓은 항상 진실보다 큰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부여받은 이름표를 부정하고 관계 속에서 나다움을 찾는다. 칼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말한 것처럼,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찰나만을 존재할 뿐인 나. 시스템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짧은 유영을 하면서 무한한 외로움을 느낄지, 과감히 꼬리표에 쓰인 나 자신을 부정하고 외롭지만 발버둥치면서 근육을 가진 원자가 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당신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 불타는 열의를 느끼게 하는 사람, 찢어질 것 같은 마음에 우주의 어떤 별보다 멀어져 버린 사람, 당신은 그 속에서 온전한 당신이 될 수 있다. 관계란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큰 것이다. 우리가 찾지 못한월리에게 울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위로를 전하고 싶다. 너를 뜨겁게 안아줄 그 사람이 여전히 너를 찾고 있기 때문에.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