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호] 전쟁과 혐오 속 예술적 저항: 우크라이나 유일한 퀴어영화제 써니버니영화제

💌 뉴스레터 109호

🏳️‍🌈이번 호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유일한 퀴어영화제, 써니버니 영화제를 통해 예술과 영화가 어떻게 혐오와 폭력에 맞서 연대와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를 조명합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극우 시위와 공습 경보 속에서도 꿋꿋이 열린 영화제의 현장을 통해, 퀴어 공동체의 용기와 문화적 실천의 힘을 생생히 전합니다. 한국퀴어영화제 집행위원장 신효진 활동가의 글을 통해, 단지 ‘영화’를 넘어서 존재를 증명하고, 평등을 상상하는 축제의 의미를 함께 나누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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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혐오 속 예술적 저항

: 우크라이나 유일한 퀴어영화제 써니버니영화제(SUNNY BUNNY Film Festival)

인류의 역사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고 공동체를 나누며 이질적인 존재를 배척하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된 기록이다. 이러한 배제와 경계의 역사는 전쟁과 혐오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는 슬프게도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구조적이고 일상적인 사회 현상이다. 낯선 존재를 배제하거나 소수자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과정은 단지 전근대적 과거의 일이 아니라, 근대 이후에도 민족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성소수자 혐오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왔다. 동시대 사회 역시 이 같은 폭력과 배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전 세계 곳곳에서 타자성을 지닌 존재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차별과 폭력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반복됐으며, 깊숙이 뿌리내린 역사적 패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폭력적 역사 속에서도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가능성을 탐구하며 저항과 연대의 지평을 열어 왔다. 예술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그 가능성을 미리 보여주는 선취적 행위로 기능해왔다. 특히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집단적 목소리를 형성하고, 이를 문화적 실천으로 가시화함으로써 배제된 존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했다. 2023년부터 우크라이나에서 개최된 써니버니(Sunny Bunny) 영화제는 예술을 통한 저항과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 써니버니 영화제 홈페이지 캡쳐 화면

써니버니 영화제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2023년 시작된 동유럽 최초의 LGBTQIA+ 영화제로, 2001년부터 우크라이나의 대표적 국제영화제인 몰로디스트(Molodist)의 특별 부문으로 시작되었다. 몰로디스트 영화제는 1970년에 창립되어 베를린 국제 영화제의 테디상(Teddy Award)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LGBTQIA+ 주제를 다룬 영화에 특별상을 제정한 역사적 영화제였다. 몰로디스트는 LGBTQIA+ 작품을 전담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장편 극영화 경쟁 부문과 더불어 다큐멘터리, 단편 영화, 그리고 퀴어 고전작품을 상영하는 비경쟁 부문까지 확대했다. 이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안드리 할팍치(Andriy Khalpakhchi)와 아나톨리 예레마(Anatoliy Yerema)의 노력은 써니버니가 우크라이나는 물론 동유럽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퀴어 예술 행사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2025년 4월, 3년 차를 맞이한 써니버니 영화제는 러시아의 침략과 지속적인 공습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개최되었다. 전쟁이라는 전례 없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치러진 영화제였지만, 풍성하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을 맞이했다. 국제 경쟁 부문에서는 11편의 장편영화와 14편의 단편영화가 소개되었고, 영화제의 인기 있는 섹션 중 하나인 '파노라마' 섹션에서는 퀴어 영화를 주제로 한 6편의 작품이 상영되었는데, 해당 섹션에서는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거나 인지도가 높은 감독들의 작품들로 꾸려졌다. 'New Colors' 섹션에서는 전 세계에서 온 단편 데뷔작 또는 두 번째 작품이 포함된 6편이 상영되어 신선한 작품들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편, '다큐멘터리' 섹션에서는 6편의 감동적이고 심도 깊은 다큐멘터리들이 소개되었고, 자국 내에서 제작된 단편 영화를 다룬 'UA Shorts' 섹션에는 5편의 작품이 상영되어 우크라이나의 현재와 문화를 담아냈다. 특히, 'Queerby' 섹션에서는 성소수자 어린이와 청소년, 가족을 위한 특별한 작품들이 3편 상영되어, 다양한 관객층을 배려한 프로그램이 돋보였다.

그 외 동유럽과 중부 유럽 국가들의 퀴어 서사를 다룬 ‘Neighborqueer’ 섹션부터, 영국 퀴어 영화사의 흐름을 조망한 ‘UK Queer Retrospective’에 이르기까지, 관객의 감각과 인식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이 써니버니 영화제를 채우며 상영작은 장르와 지역을 가로지르는 섬세한 기획력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화려하고 풍부한 프로그램의 이면에는, 영화제 개최 자체가 당연하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이 버티고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사회에서도 성소수자를 향한 조직적인 혐오와 물리적 위협은 여전히 일상처럼 존재하고 있으며 써니버니 영화제는 단지 영화를 즐기는 축제를 넘어 존재를 증명하고 연대를 모색하는 방식으로서, 오늘의 투쟁의 결과를 미래의 일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였다.

일례로 영화제 개막을 하루 앞두고, 극우 성향의 단체 ‘Prava Molod’가 상영관 앞에 집결해 시위를 벌였고, 이에 따라 현장에는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경찰이 즉각 배치되었지만, 시위대와의 대치 과정에서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며 일시적인 혼란이 이어졌다. 이번 시위는 영화제 개최가 공식 발표된 이후 줄곧 이어진 온라인 상의 위협과 혐오 발언의 연장선이었다. 실제로 개막 당일에는 한 관객이 반(反)성소수자 인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리적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관객과 조직위원들 모두가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여기에 전쟁 상황이 겹치며 상황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4월 19일, 개막 이튿날 저녁에는 공습경보가 발령되어 진행 중이거나 시작된 상영이 긴급히 중단되었고, 관객들은 대피소로 향해야 했다. 영화제는 잠시 멈췄지만, 그 공백은 오히려 모두의 결의를 다지는 시간이 되었고, 다시 시작된 상영은 더욱 뜨거운 열기로 채워졌다고 전해진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현실과 뿌리 깊은 성소수자 혐오라는 이중의 압박 속에서도 영화제가 꿋꿋이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써니버니가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영화제가 즐기기 위한 장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증명하고 억압에 맞서 연대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써니버니는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통해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고 생각한다. 우크라이나 관객들은 공습의 공포 속에서도 극장 안에 모여 조용히 영화를 감상(공유)했고, 그 평화로운 행위를 통해 전쟁과 혐오에 저항하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실천했다. 써니버니가 지켜오고 있는 그 자리는, 전쟁과 차별, 혐오처럼 여전히 반복되는 구조적 폭력 앞에서 예술 그리고 영화가 어떻게 응답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써니버니 영화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미래는 이 영화제 자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아닐까 싶다. 지금 써니버니 영화제가 절실하고 중요한 이유는, 여전히 LGBTQIA+ 커뮤니티가 차별과 배제의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써니버니가 꿈꾸는 미래는 퀴어라는 정체성이 더 이상 논쟁이나 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고, 누구든지 성지향성이나 젠더 정체성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다. 자신의 존재를 특별히 증명하거나 고통받지 않고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 그러한 이상적 현실이 실현될 때, 퀴어 영화제는 더 이상 저항의 전선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조용히 기념하는 일상의 축제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써니버니 영화제가 걸어온 여정을 바라보며, 이러한 현실은 결코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국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더욱 깊이 실감했다. 한국퀴어영화제 역시 2025년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이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극장 대관을 거부당해 개최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깊게 뿌리내린 사회 속에서 한국 퀴어영화제는 25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자리를 지켜왔다. 우크라이나의 써니버니 영화제 또한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버텨내며, 연대와 존엄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해줄 것이라 믿는다. 써니버니 영화제가 펼쳐나갈 용기 있는 행보와 영화가 만들어낼 자유로운 세상을 우리는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한다

🌈 글쓴이. 신효진

한국퀴어영화제에서 2014년부터 활동하고 있으며 집행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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