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잃고 외양간 고치기
때는 바야흐로 2017년 11월이었다. 고등학교 사상 최고의 이벤트인 수능을 끝내고서 체험학습신청서를 내고 훌쩍 제주로 떠났다. 수능이 끝나면 제주도에 가고 말겠다는 희망으로 독서실에서 내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포항 지진이 일어나 바로 전 날에 수능이 일주일 연기 된 날이 바로 나의 때였다. 미리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우울한 목소리로 수능이 연기 되었으니, 혹시 예약을 미룰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아무튼 우역곡절 끝에 제주 여행이 시작되었다.
푸릇푸릇한 고삼 여행자의 첫 행선지는 함덕 해수욕장이었다. 빨간색 버스를 타면 금방이었다. 제주에 간 이유는 '바다'가 컸다. 해안도로를 따라 빙글게 돌면 바다가 있었다. 각 해변가마다 다른 빛을 띄고 있다는 그 제주의 바다를 두 눈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정작 빨간 버스에 내려 함덕에서 맞이 한 건 바람이었다. 휘청일 정도로 강한 11월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나오던 나이가 아니던가. 워낙 추위를 타지 않은 강철 체력을 지닌 채 (그것도 코트를 입은 채로) 함덕의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온몸이 가벼웠다. 그간 다크서클과 함께 쌓인 수능에서의 압박감을 모두 벗어던진 듯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웠다. 말 그대로 정말로 가벼웠고, 나는 이내 '캐리어'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의 제주 여행의 기억은 드문드문하다. 게스트하우스 퇴실 시간이 다 되도록 늦잠을 잔 거, 오일장을 구경하면서 해안가를 걸은 것, '여름문구점' 소품샵을 구경하며 제주의 꿈을 꾸었다. 섭지코지를 혼자 오르면서 억지로 셀카를 찍으려다가 실패한 기억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기억을 꼽으라면 당연코 캐리어를 버스 짐칸에 두고 내려서 멘붕이 왔던 그때였다. 역시 시련과 고난이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가 되는 것 같다. 아직도 아름답진 않지만.
버스 짐칸에 있는 나의 캐리어는 어디까지 멀리 떠나버렸는지. 멍하니 도로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으로 버스 회사의 연락처를 알아보았다. 아무리 검색해도 버스 회사 전화번호를 인터넷상에 게시해두지 않아서, 제주도교통회사에 연락했던 거 같다. 겨우 기사님의 개인 휴대폰으로 연락이 되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밖에서 강추위를 이기며 벌벌 떨고 있었다.) 기사님은 "반대편 버스에 짐을 실어줄테니, 한 시간 정도만 기다려라. 그 정류장에서 짐을 전달해주겠다."라며, 세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할 수 있었다. 휴대폰의 배터리만 여유로웠다면. 이때 휴대폰의 배터리는 15%였고, 그마저도 추위에 벌벌 떨던 나의 휴대폰이 객사해린 거였다.
17년 당시에는 함덕 해수욕장이 크게 번화하진 않았다. 스타벅스도 없던 때였을 거였다. 휴대폰이 객사하는 바람에 연락할 창구가 아무것도 없었던 난 함덕에서 가장 큰 카페로 갔다. 안절부절, 눈치를 보며 근처 알바생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휴대폰을 빌릴 수 있을까요?" 그때 알바생의 표정은 잡상인을 보듯한 표정이었다. 아니면 그저 열심히 노동하던 무덤덤한 표정이었을까. 도움을 바라는 학생에게는 썩 따스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편의점에서 일회용 보조배터리를 구매했고, 휴대폰을 살린 채 근처 카페로 갔다. (함덕의 커다란 카페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애써 다른 카페를 찾았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거기에 책이 여러 권 있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펼쳐보기도 했다. 이미 감각조차 없는 손을 데우기 위하여 따뜻한 차를 시켰다. 세 시간이 지나 반대편에서 다시 온 버스에서 캐리어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짐옮김이' 서비스라고, 캐리어를 공항에서 숙소로 픽업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았다.
제주도에 여행할 땐 짐옮김이 서비스를 이용하자.
안그러다가 캐리어 잃고 외양간 고칠 수가 있다.
가는 날이 장날, 내가 가는 날은 휴무일
이전 글에서도 한 번 쓴 적이 있었는데 '3번의 휴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세 번의 휴무 사건 정점을 찍는 일이 오늘 일어나고야 말았다.
나는 동쪽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한 번 서쪽을 가기로 결심했다. 친구가 놀러온 김에 그간 가고 싶었던 고등어회 맛집인 '미영이네'를 가보기로 도원결의를 한 거였다. '미영이네'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미영이네가 유명해지지 않을 때부터 추천해준 맛집이었다. 어느덧 웨이팅이 엄청난 맛집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그간 제주 여행 때마다 동쪽에 머물었기 때문에 갈 여력이 있지 않았다.
한 달 사는데 서쪽 한 번 가는 게 뭐가 어렵겠나 싶었다.
서쪽에서 우리 숙소까지 2시간 30분이 걸리긴 했지만.
2시간 30분이 서울에서 대전 가는 시간이라더라? 대전 한 번 간 셈 치기로 한다.
오늘의 목표는 오로지 '미영이네'였다. 미영이네를 위해서 공항에서 애월로 갔고, 모슬포항에 있는 '미영이네'를 위해서 그 근처 카페를 찾았다. 이 모든 걸 누군지도 모를 '미영이'를 위해서 온힘을 다했던 거였다. 친구는 무려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미영이네'를 위해서 하루를 소비하기로 했다. 휴무도 체크했고, 무엇을 먹을지 메뉴도 정했고, 적당히 음주가무를 하자며 깔깔거리며 추운 바람을 헤치고 날아간 우리에게 찾아온 건.
블로그를 보니 2월 6일, 바로 전 날에 올린 포스팅도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해도 음식점을 열었던 게 아닌가. 왜 하필 오늘. 그것도 오늘. 우리가 망연자실하게 있자 그 근처로 사람들이 왔다. 우리처럼 이 맛집 횟집을 찾아온 사람들인 거 같았고, 실망한 사람들은 바로 옆집 고등어횟집으로 들어갔다. 이래서 맛집 옆에 있는 식당들도 덩달아 잘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2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미영이네'를 위해서 왔는데, 돌연 문앞에서 뻥 차진 기분.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건 사고나 다름없었다. 이보다도 더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바로 오늘 당일, 갑작스러운 휴무를 과연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여러분들은 휴무 없을 거 같으세요? 다 있을 겁니다. 저주는 아니고, 아마도.
그러니까 자나깨나 휴무 조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수험생 때의 제주 여행에 대한 그리움은 여즉 남아 한달살이까지 오게 되었다. 또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짐옮김이 서비스를 성실히 이용하고 있다. 이번 미영이네를 향한 나의 타오르는 복수심은, 서쪽에서도 숙소를 잡아 꼭 가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자라날 거였다. 억지로 교훈을 만드는 소년만화 같은 감성으로 마무리가 된 거 같다.
여러분도 제주에서 망한 썰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당시는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이렇게 다시 재미있는 썰이라며 깔깔대며 말할 수 있기를. 그러니까 여러분만의 썰이 있다면 들려주었으면 한다. 댓글이든, 답장이든, 아니면 나중에 직접 만나서든. 사실 이런 망한썰 하나 있어야 여행이 더 재미있어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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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물
헉 저 강아지 결국 그대에게 입양된겨? 넘 귀엽자너 ㅠ흑흑 제주도 망한 썰.. 이런 거 하면 제일 웃기고 싶은데 그 정도는 아닌 썰.. 저는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에 예쁜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 마시다가.. 예상보다 차가 밀려서 비행기 표 시간에 너무 촉박하게 공항에 도착했어요. 다행히 렌트카 반납 지역이 공항 맞은 편이라 이동 버스를 안타고 캐리어 들고 뛰기 시작..(난 완전 계획형인데..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땀이 나기 시작하지만 안 다급한 척, 괜찮은 척 .. 하지만 굳어가는 표정..) 집으로 돌아가는 표 짐 붙이는 데에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비행기 표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줄은 줄지를 않고.. 마이크로 직원분이 "혹시 00시 00분 비행기 타시는 분 계신가요?" 해서 다행히 먼저 하고 허겁지겁 들어가서 타긴 탔네요. 하지만 그 순간 손을 든 나를 쳐다보는 수십개의, 아니 합치면 수백이 되었을 눈동자들.. 오들오들.. 말하고 나니 재미도 없고 제주도 여행 중 썰은 아닌듯? 아 몰라, 이 망한 썰 대회를 위해 한 번 제주도 가서 망쳐올 때까지 기다려줘요
제주 한 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전 나랑 비슷한 경험... 허겁지겁 들어가는 우리... 너무 지각하는 습관(?)까지 똑같잖아요... 물론 차가 막힌 게 잘못이긴 하지만. 이건 차가 잘못했네. 사실 저도 제주도 공항 갈 때 도로가 막혀서 늦을 뻔... 아니 제주도 가서 망쳐오지 말라고요...ㅋㅋㅋㅋㅋ 행복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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