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열일곱 번째 한 권, 소개 편지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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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번째로 고른 책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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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해드릴 책은 소개하는 일 자체가 어딘지 슬프게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을 지적하듯 책 표지에는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군요.
이번 책,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는 일종의 유고작입니다.
그가 암투병을 거치는 동안 남긴 일기가 사후에 출간된 것이 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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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지는 꽤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듯한데, 개인적으로 김진영 선생님은 제 청춘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준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로 넓힌다면, 저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들로 헤르만 헤세라든지, 알베르 카뮈라든지,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철학자와 문인들을 읊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서 제가 가장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배움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역시 김진영 선생님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제가 김진영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21살 가을이었습니다.
문학과 철학에 대한 열망으로 처음 휴학을 하고, 저는 철학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몇 년 동안 당시 장충동에 있던 철학아카데미는 제 청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죠.
그곳에서 가장 많은 수업을 찾아듣고, 영향을 받았던 게 김진영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다 이후에 대학원에 가고, 또 청춘 후반기의 방황이 시작되면서는 점점 철학아카데미에는 갈 일이 없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대학원 공부와 조교 생활만으로도 벅찬 데가 있었고, 또 나중에는 철학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고민들을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다시 김진영 선생님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 한 SNS에서였습니다.
몇 년만에 본 얼굴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고, 알고 보니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급하게 인사를 전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작고하시게 되었고, 이 책이 나오게 되었죠.
제가 로스쿨 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거의 유일하게 수험생활 공부 중 힘겨울 때 중간중간 열어보는, 나의 성서 같은 책으로 수험생활을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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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연이 길었는데,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추억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저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제가 수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남은 문장 열 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들어갈 법한 구절입니다.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이 구절은 두고두고 저에게 되돌아오곤 했던 구절입니다.
어쩌면 이 책을 만난 이후, 저는 제가 강해지는 법에 대해 알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오로지 저만 생각하기 보다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 저의 가족, 나아가 내가 도울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생각할 때 강해진다는 것을 말이죠.
제 삶에서는 아주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던 구절이었습니다.
이 문장을 새긴 뒤로, 저는 삶의 많은 게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타자를 지키거나 위하고, 고려하고자 하면서 강해지는 법을 배웠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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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구절도 제게는 충격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돌보지 않았던 몸이 깊은 병을 얻은 지금, 평생을 돌아보면 만들고 쌓아온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것들뿐이다. 그것들이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그것들이 무너지는 나의 육신을 지켜내고 병 앞에서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나의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왜냐하면, 저는 당시 로스쿨을 다니면서 비슷하다고 할 법한 생각을 하나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이제까지 만들고 쌓아온 '정신적인 것'을 시험하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10년 넘게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인생의 진리와 살아갈 방법을 익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현실로 들어서고, 돈을 벌고 일을 하며 그 모든 것이 '증명'될 때가 왔던 것이죠.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믿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생 그 자체를 살 때가 왔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잘 살아간다면, 저는 문학과 철학에 천착한 지난 10년을 허비한 게 아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형편없이 살아간다면, 저는 지난 10년을 허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현실에 투신하고 있던 찰나, 병상에서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생각을 전해준 김진영 선생님의 이 이야기를 보고, 어딘지 시공간을 넘어 그의 곁에서 공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잘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습니다.
단순히 돈 많이 벌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좋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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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편지가 길었네요.
사실 저는 이 책에 대한 일종의 '주석서'를 써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모든 챕터에 대해 제 의견을 하나씩 달아서, <아침의 피아노>에 대한 책을 한 권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죠.
실제로 그렇게 쓴 글들이 몇 개 있기도 한데, 일부는 몇몇 책에 실렸을 겁니다(그 책이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였는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어쩌면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에도 실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마 구독자님께서는 한 해가 가거나 새해가 시작하는 무렵에 이 편지를 읽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든, 새해를 시작하든, 이 책이 우리 삶에 무언가 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무언가'를 한 마디로 한다면, 삶을 더 정확하게 사랑하게 하는 태도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게 이 책에 대한 추천을 마칩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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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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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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