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내가 그린 한 점의 유화 그림이 있다. 작은 캔버스에는 노을지는 바다가 들어있고, 한쌍의 남여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린 유화나 마찬가지인데, 대학시절 고향을 떠나 자취를 할 때 챙겨온 나의 유일한 보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 그림은 청년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녔는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든 드림캐처(dreamcatcher ;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만 꾸게 해준다는 토속 장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방에는 늘 바다가 걸려 있었다. 그것도 내가 한때 참으로 사랑했던, 나의 바다가 늘 나를 은은하게 지켜주었다.
사실, 그 그림 속 바다는 내가 청소년 시절 한동안 빠져 지냈던 드라마 <가을동화>의 바다였다. 사람마다 청소년기를 거치는 방식은 다르지만, 나는 대개 어떤 이야기가 있는 작품들에 깊이 빠지곤 했다. 어느 만화, 어느 드라마, 어느 소설에 한번 빠지면 그 후유증에 몇 주, 몇 달을 시달리곤 했다. 한 작품 속의 감성이랄 것이 온통 삶을 뒤덮여 버려서, 어떻게 떨쳐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그 몽글몽글한 상태를 어찌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어머니는 그런 나를 차에 태우고 '가을동화' 속 같은 길이라며, OST를 틀고, 갈대가 있던 낙동강변을 달려주기도 했다. 결국 그 그림을 그려낸 것도, 당시 어머니가 운영하던 작은 반지하 그림 교습소에서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십대를 극복하는 방법이란, 즉 그 당시 나를 취하게 했던 어느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드라마 속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만화 이야기 속 캐릭터를 소설로 쓰거나, 내가 좋아했던 게임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너무 좋아하여 빠져들어서 어찌할 줄 몰랐던 마음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면 비로소 해소가 되었다. 내 글쓰기의 출발점이랄 것도 그 지점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마음, 감정, 기억 같은 것을 그대로 두면 견딜 수가 없어서 무언가로 표현하여 만들어내면, 비로소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곧 글쓰기였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십대 내내 바다를 썼던 일도 이해가 간다. 내가 썼던 두 편의 장편소설은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십편의 단편소설들에도 수십번의 바다가 등장한다. 내가 '에세이'를 실었던 책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나는 바다를 내가 쓰는 온갖 글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 이유는 그만큼 바다가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를 담고 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내기 위해, 늘 바다를 썼을 것이다. 혹은 내가 등지고 떠났던 어린 시절 전체가 바다에 투영되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늘 글 속에 아이를 담고 있다. 일상의 이야기를 쓰자면, 대부분의 글에는 아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마 그것은 내가 어느 일상을 견뎌내는 일에서, 어느덧 아이의 존재가 가장 크게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이 이야기 만큼은 쓰지 않고서는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바다를 사랑했던 어느 시절처럼, 아이를 사랑하고 있나보다 생각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들은 그렇게 견뎌내고, 이겨내고, 떨쳐내야만 나는 이 삶을 보다 온전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소 묘하거나 신비로운 점이 있다면, 그렇게 떨쳐낸 것들이 마치 내 방에 늘 걸려있던 저 유화 한점 처럼 내 곁에 남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쓴 글들은 책이 되어 내 책장에 꽂힌다. 그렇게 삶을 사랑했던 것들을 견뎌내기 위해 부지런히 살았던 일들은 모래가 산이 되고, 먼지가 행성이 되듯이, 그렇게 내 앞에 남아 내 삶의 증거들이 된다. 살아가는 일이란 게 무엇이냐고 한다면, 바로 그런 일이 전부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방식이 있고, 바로 그 방식이 삶을 지어나간다. 그저, 그게 삶인 것이다. 그게, 삶의 전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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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의 유화 그림 한 점을 첨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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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눈물이 나는데 왜 이렇게 위로가 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어요. ㅠㅠ
세상의 모든 서재
그래도 나쁘지 않은 감정이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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