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주간, 아홉번째 편지, 환상단편.

2021.03.24 | 조회 1.16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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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정지우 작가가 매달 '한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고래가 하늘을 날던 시절, 고래의 등에 오르고 싶었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매일 해안절벽으로 나서서 수평선을 걸치고 날아가는 고래를 보곤 했다. 고래들은 심해 위의 바다만을 날아서, 가까운 해안선까지 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맑은 날이면, 해안절벽 끝에 매달려 떨어질 듯이 서서 눈에 힘을 주면, 틀림없이 고래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래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그 고래들의 여정에 언젠가 함께 오를 것을 꿈꾸곤 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자주 해안절벽을 찾아갔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보이는 고래들이 그에게 늘 위안을 주었다. 처음으로 짝사랑했던 마을의 소꿉친구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을 때도, 진로 문제로 부모와 싸우고 집을 뛰쳐 나왔을 때도,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해안절벽을 찾아갔다. 어떤 날은 흐리고 비가 와서 수평선이 보이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흔들리며 어렴풋하게 떠가는 고래가 보였다. 어딘가로 늘 부지런히 향하는 듯한 고래들을 볼 때면, 머지않아 그의 마음도 괜찮아졌다. 그의 슬픔, 아픔, 절망도 고래와 함게 알 수 없는 어떤 세계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한번은, 아버지의 배를 몰래 훔쳐 그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몇 번이나 고래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허튼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들었던 터였다. 주변의 어른들에게 '고래의 등'에 올라보고 싶다면서, 고래의 등에 올라 보았느냐고 물어도, 어른들은 그저 희미하게 웃거나, 소년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소년은 먼 바다까지 나가는 어른들은 틀림없이 고래를 가까이에서 봤을 텐데도,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직접 나서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해안절벽에 올라, 아주 맑은 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여전히 하늘에 떠있는 고래를 보고 배에 올랐다. 바람은 순조로웠고, 활짝 펼쳐진 돛이 힘을 받으며 배를 밀고 나갔다. 소년이 살던 마을과 해안선은 점점 작아졌다. 수평선의 고래도 조금씩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마을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소년은 망망대해에 홀로 놓여 있었다.

그러자 문득 두려움이 몰려 왔다. 이렇게 깊은 바다까지 나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다색은 그 투명한 밝은 빛을 잃어버리고 검은 심연을 드러냈다. 파도도 점점 거칠어져서, 배의 출렁거림이 심해졌다. 파도가 어찌나 갈수록 심해지는지, 점점 어지러워진 소년은 더 이상 고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속이 뒤집혔고 소년은 주저앉아 속을 게워냈다. 더 이상은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러움이 너무 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때, 다른 배를 탄 누군가 소리치는 것을 끝으로,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그날 밤, 소년은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고, 자신은 결코 먼 바다로 나설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알았다.

소년 역시 다른 모든 사람처럼 나이들어갔다. 몸집은 커졌고, 턱수염이 꺼끌꺼끌해졌으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 부모는 그의 결혼을 축하하며 박수를 쳤고, 아이를 품에 안고 활짝 웃었으며, 다른 모두가 그렇듯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일도 가졌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는 여전히 수평선을 지나는 고래를 잊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결혼하기 전날에도,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 날에도, 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에도 여전히 그 해안절벽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늘 그랬듯이, 수평선을 지나는 고래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소년도 노인이 되었다. 그의 삶에 남은 마지막 위안이라면, 해안절벽 위에 앉아 맑은 날 멀리 떠가는 고래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해안절벽 위로 올라,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나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비비기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다시 뜨고 보아도, 고래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어쩌면 이보다 더 맑은 날은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고래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인생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겪어본 적 없던 당혹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온 몸이 떨리고 초조와 불안에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반려자에게 이야기했으나, 그녀는 그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다시 해안절벽으로 나섰다. 그러나 고래는 역시 없었다. 그 다음 날도, 또 하루가 더 지난 날에도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비가 왔고, 폭풍우가 지나갔다. 그러나 역시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은 더 이상 초조함을 견딜 수 없어, 바다로 나섰다. 평생 모아두었던 돈으로 배를 한 척 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바다로 나섰다. 자신의 지난 모든 삶이 쌓여있던 마을이었지만, 더 이상 이 마을에서는 어떠한 위안도 얻을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그의 삶은 끝났다. 그는 돛을 활짝 펼치고, 바람을 타고 나아갔다. 이윽고 마을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는 그 어릴 때와 같이 망망대해 한 가운데 섰다. 그러나 더 이상 그때와 같은 어지러움은 없었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배를 뒤흔들어도, 그는 끄떡 없었다. 그의 눈빛은 오로지 수평선만을 향하고 있었다. 계속 고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수평선을 응시했다.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해는 저물어갔다. 그러나 그는 바위처럼 서서 바다를 맞이했다. 그는 삶에서 그토록 강인한 의지를 발휘한 적이 없었다. 전 인생을 통해 모아온 어떤 의지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올랐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곧이어 별이 떴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우뚝 서서 수평선만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사라져갔다. 밤이 깊어지니, 오히려 명료한 확신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반드시 고래가 있을 거라고, 고래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의 마음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다시 해가 밝았다. 그는 밤을 샜지만, 어떠한 피로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의식은 투명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정신이 맑게 깨어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왜 이제서야 떠나왔을까?' 그는 또 생각했다. '그 모든 건 두려움 때문이었어. 바다 한 가운데서 다시 정신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거야.'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인생 내내 원했던 거였어. 왜 나는 그것을 몰랐을까?'

그때였다. 수평선에 무언가 보였다. 그는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고래였다. 그가 잃었던, 평생 그가 꿈꾸었고, 그를 부르던 고래가 있었다. 그는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고래를 향해 갔다. 아침의 눈부신 햇빛이 고래 너머로 떠오르며 그의 눈을 찔러댔다. 그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새하얀 빛'을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쳐다보았다. 그는 고래에게 당도했다. 그것은 빛이었다.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때때로 마을에는 죽을 때가 되면, 하늘을 나는 고래를 향해 떠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마치 새끼거북이 고향의 해안을 찾듯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수평선을 향해 간다고 했다. 어떤 노인은 고래들이 사실 그들의 영혼이라고도 말했다. 바다를 향해 떠난 이들이 고래가 되어, 수평선을 날아 이승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이들 중에서 실제로 고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고래를 향해 떠나는 이들만이 고래를 봤던 것이다. 고래를 봤던 이들만이 고래를 향해 떠났다. 고래를 봤던 이들은 반드시 수평선을 향해 갔다. 그리고 정작 그들은 누구도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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