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05. 어느 밤, 어느 낮

오늘은 새로운 장르! 시세이(시+에세이) 도전!✒

2022.07.06 | 조회 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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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어느 밤

 

어느 날 밤은 우는 줄도 모르고 울다가 잠에서 깼다

지독한 배고픔을 느껴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시 너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관성이다, 라고 쓰고 또 너를 떠올렸다

지우다 말고 지독하다, 라고 쓰고 많이 울었다

전부 지우고 남은 흐느낌을 마저 울며 냉장고를 열었다

악취가 났다

남은 게 없다, 먹을 게 없다, 쓰고 힘없이 누웠다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

 

나는 가끔 새벽에 배가 고파 일어난다. 정해진 수순처럼 냉장고를 무심히 열었다가 방치되던 어떤 것이 내뿜는 악취에 놀라 얌전히 닫는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게을러 자주 겪는 일이다. 싱싱하던 야채나 과일의 새로워진 모습에(?) 매번 사과하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시는 새벽에 배고파서 겨우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악취에 놀라 닫은 뒤 불현 듯 적어 내렸다는 뜻이다. 몇 가지 연유로 나는 내 시의 내력을 설명하는 일을 다소 꺼리는데 첫째로는 즉흥성이 반 이상 가미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별다르게 대단히 특별한 영감에서 출발한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나라는 시인의 민낯은 이러하다. (이 뉴스레터의 구독자가 몇 되지 않아 다행인 점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인구수가 애초에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해지기 전에 이 글을 적는다.)

 

  Photo by aboodi vesakaran on Unsplash
  Photo by aboodi vesakaran on Unsplash

시를 쓴지는 벌써 햇수로 7년차이지만, 실력이 그다지 눈에 띄게 좋아진 것 같지는 않다. 사랑시를 미친 듯이 적어대던 과거와는 다르게 평온하고 느른한 하루하루를 보내서인지 시를 쓰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하루하루가 시 없이 흘러간다. 가끔은 인스타그램에 올린 시 게시물에 댓글이 달린다. 그럴 때면 마음이 다소 조그마해지는데, 정성스러운 댓글에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막막해서다. 왜냐면... 위 문단에서 말했듯이 내 시는 상당히 대수로운 소재로 쓰이는 편이고, 이따금 괜찮은 문장이 적혀 있다면 실화가 반, 공상이 반으로 적절하게 뒤범벅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걱정 어린 댓글이 달릴 때면 내 시가 퍽 설득력이 있었나 보군! 하며 자만할 때도 있지만, 역시나 부끄럽다.

시가 써지지 않는 밤이면 몇 조각의 문장이 부유하는 메모장을 멍하니 보며 생각한다. 역시 사랑에 빠져야 할까? 사랑이 없어 시도 나오지 않는 걸까? 역시 로맨스를 품어야 시를 쓸 수 있을까? 연거푸 몇 문장을 썼다 지우며 깊은 숨을 내쉬는 밤이 반복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다른지 생각하다보면 끝도 없이 글이 늘어진다. 가장 큰 차이는, 자다 말고 일어나 생각하고 눈물짓는 사람이 로맨스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더 원초적인 상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하게 따라붙는 거대한 무력감에 납작 엎드리면서도 언젠가는 전복해 보이리라 오기를 품게 된다.

지금은 밤 9시 반. 수요일 오후에 간식처럼 까먹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대차게 실패했다. 그럼에도 수요일을 넘기지 않기 위해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이 글을 적는 중이다. 요즘은 부쩍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낮을 보낸다. 매일같이 메모하고, 기억하고, 묻고, 쓰고, 잊어버리는 햇빛 아래의 삶.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일상을 영위하려 노력해 왔음에 경탄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을 떠올릴 수 있도록 달 아래에서 만큼은 여전한 고요를 잃지 않으려 한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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