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15. 그 날(들)

비혼&비연애주의자의 명절... 괜찮았냐고요?💬

2022.09.14 | 조회 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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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제목을 보고 어떤 날을 떠올리셨을까 궁금합니다. 저는 ‘그 날(들)’을 잘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피곤함이 평소의 열 배는 되는 기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날()’은 바로 명절을 뜻합니다.

 

다들 잘 보내셨을까요? 저는 유난히 짧게 느껴진 연휴가 그럭저럭 지나간 기분입니다. 지난 며칠을 브리핑해 볼까요? 저는 명절 전날 오전에 일어나 아버지 차를 타고 고향에 갔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신 할머니를 뵈었고, 본가로 직행하여 전을 부쳤습니다. 저녁쯤 아버지를 따라 장을 보았고요. 명절 당일에는 평소 출근하는 시간보다 조금 더 이르게 일어나(재앙입니다) 상차림을 돕고, 차례가 끝난 후에는 또 상을 치우고, 조금 쉬다가 오후에 외가에서 재롱을 부리고 운동도 조금 하고, 다음 날 또 일찍 일어나 자취방에 왔습니다. 약속이 있어 나왔다가 밤에 집으로 복귀하여 연휴의 마지막 날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만, 거의 누워 보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음에도 보상심리로 인해 미룬 채로요.

 

언제부턴가 명절은 마음이 무거운 휴일이 되었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평소 게을리 했던 가사노동에 시달릴 각오를 하고 본가에 갑니다. 기름 냄새를 맡으며 전을 부치고, 다음 날 차례를 지낼 때 사용할 목기를 꺼내 닦는 등 명절에는 참 바쁩니다. 가사노동은 대개 여성의 몫입니다. 물론 아닌 집이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현실을 봅시다. 우리 무의식에서도, 현실에서도, 여성들이 전을 부치고 설거지하고 상을 차리고 청소하고 그 모든 것을 치웁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명절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어차피 시집가서 다 할 거라며 아무도 가사노동을 시키지 않았지만 늘, 명절의 풍경이 기괴했습니다. 물론, 비혼을 선언하자 그럼 너희 집이니까 너도 하게 되었습니다.

 

  Photo by Ming Han Low on Unsplash
  Photo by Ming Han Low on Unsplash

저희 집은 현재도 차례를 꼬박꼬박 지내는데요. 제가 어릴 때보다는 많이 간소해졌지만 여전히 다른 집과 비교해보자면 거나한 한 상을 차립니다. 차례를 지내는 명절 아침에는 가족들 전부 새벽같이 일어나(당연히 어머니는 큰집 며느리로서 누구보다 빠르게 일어나십니다) 저마다 몸단장을 하고, 특히 여성 구성원들은 상차림을 돕습니다. 남성 구성원들은 여성 구성원들이 날라 오는 음식을 성주 상과 큰 상에 차례대로 올립니다. 이때, 성주 상에 먼저 음식을 올리고 그 다음 큰 상에 같은 음식을 올리는 과정을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옛날부터 그랬다고 하네요. 그것이 바로 전통문화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명절에 음식이 담긴 제기를 나르다가 저와 아버지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가는 순간이 주로 이때입니다.(평소에는 아주 사이가 좋은 편입니다) 생선을 올려둘 때도 방향이 중요하고, 제사상 위에 올린 제기를 끌어서 옮기는 것도 안 되며, 아무리 추워도 현관문을 꼭 열어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당돌하게도 명절에 한 상 받는 조상신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과 함께>에 나온 성주신이 매 명절마다 작은 상에 위치하는 성주 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그 뿐. 저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지극 정성을 쏟는 귀신에 불과합니다. 정성을 쏟아서 복을 받은 기억은 없으니 이 당돌한 말에도 너무 큰 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차례가 진행됩니다. 여성들은 대개 부엌에 서성거리며 서 있습니다. 때에 맞춰 매(밥)를 내어 주어야하기 때문이죠. 밥, 국, 김치, 김, 간장이 나간 뒤 식수도 한 그릇 나가야 됩니다. 모든 것은 산 자들의 식사와 동일하게 진행되어야 해요. 남성들은 근엄한 얼굴로 순서에 따라 술을 올리고, 절을 합니다. 제가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하다가 지난하다 생각하며 방에 숨어 있는 청소년기를 보낸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큰아들의 큰딸로서 과분할 정도로 애정을 받아 버르장머리 없게 자란 저는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면 남동생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누나인데! 저 쪼끄만 녀석이(?) !! 그 생각은 점점 차례 상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고 동생이 군대에 가고서야 절을 하라며 저를 찾는 어른들의 목소리로 인해 완전히 물구나무를 서게 됐습니다. 명절 당일마다 일부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아침 일찍 나가곤 했습니다. 어른들도 저를 딱히 막아 세우지 않았고, 설득하려는 의지나 방법도 전무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상하긴 하잖아요? 뭐라고 설득할 수 있겠어요.

 

할아버지와 삼촌을 기리는 의미까지 명절에 담게 된 몇 년 전부터는 별 말 없이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제사 문화에는 회의적입니다. 허례허식과 설득력이 전무한 규칙들이, 저의 무의식에 늘 도사리고 있는 반항적인 기질을 끄집어내거든요. , 왜 이래야 하는데?!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몸부림을 가끔 치고 버릇없다는 질책을 받아도 제 생각은 여전합니다. 유난하다거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비혼, 비연애를 결심했다고 꿋꿋이 외치게 되는 원동력입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소속된 가부장제에 구태여 맨몸으로 뛰어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절대적으로 외롭지만, 또 그만큼 꿋꿋하게 잘 지낼 거라는 믿음을 가져 봅니다.

 

비연애라는 단어에 그어지는 빨간 점선 밑줄이 낯서네요. 저에게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단어의 조합이, 여전히 이질적으로 동떨어진 말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자취방에서 오롯이 쉰 어제, 저는 참으로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역할을 마땅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편했거든요.

앞으로도 제가 오롯이 저일 수 없는 역할은 맡지 않을 겁니다.

 

 

 

* 썸네일이 너무 밋밋한 것 같아 변화를 줘 보았습니다. 발행인의 성격처럼 즉흥적인 썸네일을 자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다음 번 레터는 복학생(4)로 다시 돌아옵니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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