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퇴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름 옆에 서명을 하기 전, 다시금 사직서를 읽었다. 단 한 줄. 뚜렷한 이유를 밝힐 필요도 없었다. 지난 2년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정말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비로소 실감이 나는지 마음 한 구석에 바람길이 났다. 비로소 맑은 공기가 새어들어올, 새로운 구멍이었다.
- 진짜 퇴사하는 거야? 매일 말만 하는 줄 알았는데.
- 서운하다~ 이제 누구랑 점심 먹지?
- 대표님 욕은 계속 같이 해줄 거죠?
막 도장을 찍고 봉투에 갈음하는데 동료들이 앞다투어 장난 반 진담 반의 메시지를 보내 왔다. 제법 모나지 않은 회사 생활을 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답장을 보냈다. 몇 달 전 오 선배가 퇴사할 때에는 대표가 퇴사 전일에야 대단히 뜸을 들이며 고지하더니, 웬일로 나의 퇴사는 일주일 전부터 고지가 되었다. 덕분에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는 나의 가벼운 발걸음을 질투하는 지연과 계속해서 눈이 마주친다. 귀엽게 입술을 삐죽 내미는 지연에게 씩 웃어 보이자, 지연도 금세 정답게 마주 웃는다. 일종의 전우애로 다져진 사이다.
- 지윤님 가시면 저 누구랑 술 마셔요ㅠㅠ
지연의 투정 섞인 메시지가 팀원 중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잘 지낼 거면서.' 라고 답장을 쓰면서 피식 웃었다. 유난히 고된 날이면 퇴근하고 서로의 집에서 딱 중간 지점에 있는 맥주집에서 맥주를 기울이곤 했다. 안주는 대개 대표나 진상 거래처였는데, 당연히 대표가 우리의 단골 메뉴였다. 매일 보는 만큼 매일 미운 짓을 했으니까.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해서 아무래도 싫은 것에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입사하고 두어 달 되었던가? 여느 때처럼 대표가 아침부터 요란스레 목을 가다듬더니 "여러분."이라고 운을 떼자마자 나도 모르게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비슷한 표정의 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부터 우리는 메신저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 그래도 가끔 만나 주실 거죠?
- 그럼요, 연락해요.
어쩌면 마음에도 없는 말일 수도 있다. 진짜로 연락이 올 수도 있고. 떠나는 마당에 무엇이든 말이라도 고마웠다. 누군가 내 부재를 신경써 준다는 것은 퍽 다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어 분위기가 흐트러지자 미리 챙겨온 타포린 백을 꺼냈다. 가끔 코인 빨래방에 이불 빨래를 할 때나 쓰던 것인데, 2년 동안 다닌 회사 짐을 빼려니 보통 크기의 가방으로는 버거웠다. 타포린 백을 열고 허리가 아파 가지고 왔던 쿠션, 손목이 아파 받쳐 둔 손목 쿠션, 그것으로도 모자라 따로 구입한 인체공학 키보드와 마우스, 글귀가 적힌 일력, 일러스트가 예쁜 달력, 갖가지 립밤, 대용량 핸드크림, 집에서 쓰지 않는 로고 박힌 메모지들과 마스킹 테이프 등을 집어 넣었다. 벌써 가방이 꽉 차서 무릎 담요를 도로 서랍에 넣었다.
아직 서랍도 채 비우지 못했는데, 참 많은 것을 사고 챙겨 왔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도저히 정이 가지 않는 공간에 억지로 스며들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2년을 버텼고 앞으로가 막막한 지금이 되었다.
-지윤, 퇴사 소식 이제 들었어. 어쩌다 그런 거야? 이직해? 어디로 가?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일이 손가락에 꼽는, 위층 입주기업에 다니는 과 선배 A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은 건물에 근무한다는 것을 들었다면서 밥을 한 번 얻어먹었는데, 식사하는 내내 우리 회사의 분위기와 진행 중인 사업을 궁금해하는 티가 났다. 본인의 생각보다 내 눈치가 빨라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것을 알고는 데면데면하게 지내 왔다.
이번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더 좋은 회사로 가는지, 회사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도망치는 건지 궁금할 것이다. 그는 퍽 호사가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대학생 때는 마냥 선배같고 어른같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나이를 먹자니 인간으로서는 참 별로다. 선배의 메시지에 "그냥 그렇게 됐어요"라고 대답한 뒤 컴퓨터를 껐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냥 그렇게 됐어요"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냥이라는 말은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냥,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싶었고 그냥, 더 이상은 스스로를 갉아먹고 싶지 않았고 그냥, 이 일에 내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남들과는 다르게, 느리게 가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렇게 됐으니까. 앞으로도 내 삶은 흘러갈 거니까.
p.s. 발행인을 아시는 분들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퇴사를 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완전한 픽션입니다! 전부 만들어낸 허구... 하지만 곧 다가올 미래라고 믿고싶어요 😊
K-직장인 여러분 오늘도 고생 많으셨고 파이팅입니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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