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영화를 잘 안 봅니다.
예전에는 영화를 보는 일이, 특히 극장에서 광고를 보고, 엔딩 크레딧이 흘러나올 때 일어서기까지의 과정을 무척 좋아했는데요. 아무래도 스낵미디어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감정소모에 지쳐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아직도 영화는 남성 서사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돈이 되는, 상업 영화는 남성이 주인공이며 여성은 그들을 보조합니다. 이름이 없거나, 단순히 성적인 대상이거나, 트로피처럼 보상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래서 보지 않는 장르도 있습니다.(명절에 쏟아지던 한국 상업 영화, 한국형 느와르 등) 반면 제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라고 생각했다가 어떤 영화를 보고 눈이 확 뜨인 것들도 있죠. 오늘은 제가 최근에 본 영화에 대해, 또 아주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1. 헤어질 결심
한동안 안부인사처럼 "헤어질 결심 봤어?"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안 봤다"고 하면 네가 정말 좋아할 영화이며 오랜만에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라는 추천사를 들었어요. 주변 남자 지인들이 입을 모아 첫사랑이 떠올랐다고 하기에 여러분은 다 첫사랑이 불륜이었냐고 물으려다 말았습니다. 아무튼, 괜스레 반발감이 들어 보지 않던 차에 친한 선배님이 "영화적으로 훌륭하여 볼 만한 영화다, 그러나 보기에 편안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해주셔서 마침내, 볼 결심을 하게 됐죠.
멋진 여성분들과 넷이 모여 영화를 보았는데 대체로 비슷한 부분에서 몸서리를 치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박해준이 서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어떤 얼굴들을 떠올렸습니다. 일종의 '사랑'이라는 환각이 어떤 형태였는지를 목도하는 시간이었고, 이 영화는 영화적인 연출과 색감이 좋았음에도 저에게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았어요.
보는 내내 송서래가 부단히 애쓰는 것을 넋을 놓고 보았습니다. 송서래는 박해준에게 서래로써 다가가죠. 박해준이 원하는 여성입니다. 서래가 박해준을 흔들어놓을 때마다 저희는 장탄식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는 우리마저 흔들리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영화는 철저히 박해준의 시각에서 진행되기에 저는 무척 아쉬웠습니다. 서래가 서래가 아닌 순간, 철저히 송서래로 존재하는 순간이 궁금했어요. 그는 얼마나 고민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여성일까요! 이제라도 송서래를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정서경 작가의 말맛을 잘 살린 대사, 중심을 잃지 않는 송서래라는 캐릭터가 이 영화를 충실히 쌓아올렸습니다.
서래는 박해준에게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되려 확신했습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환각이라고요. 우리는 정말 '사랑'이라는 것이 무언지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굳이 필요치 않은, 건강하지 못한 로맨스는 이제 그만 버려도 되지 않을까요?
2. 버즈 오브 프레이 :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부제가 상당히 유치해서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4DX로 보고는 벅찬 가슴으로 극장을 나선 영화입니다. 비로소 제가 액션 장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고요. 전에 <오션스 8>을 보고도 짜릿함을 느꼈는데, 야구 배트는 내던지고 큰 망치를 챙겨 여기저기 내키는대로 부수고 다니는 할리 퀸이라니! 저는 그만 정신을 잃...진 않았지만 전작 <수어사이드 스쿼드> 시리즈에서는 단순히 모럴이 부족한, 주요 빌런의 "탐나는" 여친이었다면 <버즈 오브 프레이>의 할리 퀸은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대한 탱탱볼과도 같은 매력을 뽐냅니다.
게다가... 이렇게 잘 싸우는 줄 몰랐어요. 손에 집히는 족족 무기가 되고, 등을 대는 면면 전쟁터가 됩니다. 할리 퀸은 아직 '애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그렇게 이용해놓고 조커 새끼는 그런 것도 가르쳐 주지를 않았네요)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막상 할리 퀸이 성장해 버린다면 내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던 천방지축 할리 퀸이 그리워질지도요?
저는 유튜브로 버오프를 구매해둬서 보고 싶을 때마다 보는데요, 기존의 빌런과 히어로에 대한 생각을 깨부수고 조금은 어설프고 아주 많이 유치하고 어마어마하게 짜릿해서 볼 때마다 좋습니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살아도 되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고요.(그렇다고 망치를 들고 날뛸 생각은 없지만... 아니 그럴 근력이 부족함) 오늘은 마침 세계 여성의 날이잖아요?
도파민 대분출의 여성 액션 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 어떠세요?
3. 에놀라 홈즈
넷플릭스에서 꽤나 핫했던 <에놀라 홈즈> 시리즈! 저는 어릴 적 셜록 홈즈를 이상형으로 꼽을 정도로(알아요, 이성 보는 눈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을) 광팬이었는데 빨간 약을 먹고난 뒤 다시 찾아본 셜록 홈즈는 무척 불쾌한 남자더라고요. 탐정으로서는 아주 우수할지 몰라도 융통성 없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일개 남성에 불과합니다. 어릴 때의 추억을 되살려 가끔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고 싶은데 두어 장 읽다가 불편해져서 덮게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알게 된 에놀라는 세계관은 물론 성격이며 꺾이지 않는 성정까지 전부 마음에 쏙 드는 친구였습니다. 너를 왜 이제 알았을까! <에놀라 홈즈> 1편을 보다가 에놀라가 너무 기특한데다 왈칵 차오르는 연대감에 눈물도 찔끔 흘렸습니다. 멋진 여성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 왜 이렇게 벅차 오르는지 모를 일입니다.
영화를 잘 모르지만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여성 영화를 추천하고 싶었어요.
<헤어질 결심>은 우리가 환각처럼 홀려 있던 '사랑'을 부수어 주는 영화이고 <버즈 오브 프레이>와 <에놀라 홈즈>는 마구 뛰고 뒹굴며 문제를 해결하는 여성들을 우리 앞에 전시해주는 영화입니다. 뭐, 영화 속 인물들만 힘들겠어요? 우리 또한 일상에 만연한 차별을 몸소 느끼고 부딪치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며 하루하루를 꿋꿋이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러나 오늘만큼은, 누구도 '여성이라서' 슬프거나 아픈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며!
🍞🌹
일 주일에 한 번, 당신의 어깨를 토닥일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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