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러시아군이 겪는 혼란은 아마도 스탈린이 군에 실시한 대규모 숙청에 버금가는 러시아의 군사적 전통 부정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데, 1870년대 제정 러시아부터 20세기 소련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었던 '군사적 전통' 이 21세기 들어서서 부정되다보니 러시아군이 계속 파훼점을 찾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고 있음.
19세기 말부터 러시아는 대규모 동원체제를 기반으로 한 거대한 군 조직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20세기 소련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었음. 당연하게도 지킬 곳은 많고, 맡아야 할 전선은 넓다보니 이러한 경향이 커졌는데 이러한 군사적인 전통은 러시아군-소련군에 이르기까지 꽤 고착화된 경향이 없잖아 있었음.
대규모 전면전에 걸맞는 전통을 유지하던 군대가 돌연 2008년 이후부터 그 전통을 부정하고 체질을 완전히 바꾸기 시작했음. 즉 BTG로 대표되는 현대전에 맞는 컴팩트함과 기동성을 선택한 것임. 물론 기존의 군사적 전통을 포기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시대적 어젠다와 소련 해체 이후 20년 간 이어진 군사력의 붕괴 등등이 있었을 것임. 다만 확실한 건 러시아 스스로도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지했고 무엇보다도 다게스탄과 조지아 전쟁에서 보여준 러시아군의 기동성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는 것도 한 몫했음.
불과 5만의 병력을 전개하는데도 2주가 소요되다보니 러시아 수뇌부 스스로가 개편을 해야한다는 절실함이 있었음. 이 때문에 2008년 이후로 러시아는 전체 지상군의 규모를 기존의 1/11로 줄이고, 전체 부대의 70%를 차지했던 동원부대 전원을 해체하였으며 BTG 편성을 제시하는 등의 개편이 이루어졌음. 장교단 355,000명 중 135,000명이 사라졌을 정도니 거대한 개편이라면 개편일 수 있었음.
다만 그 개편의 방향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서 문제였음. 가장 큰 문제는 지금도 지적되는 문제지만 BTG를 지휘하는 장교단의 위상 문제였음. 전통적으로 러시아군에서는 대령급 장교단의 위세가 강한 편이었고, 이는 사단과 연대 중심으로 작전하는 경향 때문에 굳어진 것이었으나 BTG는 그보다 낮은 소령급 장교들이 지휘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음.
그동안의 군사적 전통이 유지되던 시기에 양성된 러시아군 장교단이 과연 이러한 변화를 완전히 받아들였느냐부터 고민해야했음. 당연하게도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BTG의 지휘력 자체가 좀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시발점이 되기도 함. 여전히 러시아군에서는 대령급 장교들의 위상이 강한 반면, BTG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령급 대대장들의 위상은 낮은 편임. 오히려 여전히 대령급 장교들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감이 강함.
이러한 문제는 BTG의 강점인 컴팩트함과 기동성을 살려서 기동전을 할 수 있다는 전제에 발목을 잡았음. 위상이 낮은 소령급 지휘관들은 자주 상급자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고, 공격적으로 나설 때 굉장히 주저하는 경향이 강했음. 물론 여기엔 고질적인 병참 부족과 부상자 후송 시스템의 부재도 영향이 있었지만.
더군다나 내부적으로 군사적인 개편을 거치면서 힘을 응집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에 시리아와 돈바스에 군사개입을 실시한 것도 문제였음. 시리아와 돈바스에서 러시아군은 외견상 상당한 전과를 보이며 활약한 것처럼 볼 수 있겠지만 속사정은 달랐음. BTG의 허점이 오히려 도출되기도 했고 오히려 군제개편의 혼란을 가중했음.
분명 BTG는 컴팩트한 기동전이 주요지만, 시리아나 돈바스에는 그게 다르게 적용되었음. 드넓은 전선을 통제 및 유지하려면 결국은 대규모 보병부대가 필요한데 그 지점을 이미 2008년에 죄다 해체시켰다는 점임.
즉 러시아군은 면과 면의 대결에 익숙한 군사적 전통을 포기하고, 선과 선의 대결에 쓸 수 있는 새로운 편성을 제시했지만 2010년대의 군사작전에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되어버린 것임. 그리고 이러한 혼란에 대해서 러시아 수뇌부는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문제를 덮어버렸음.
물론 완전 손놓던 것은 아니고 2019년까지 서부군관구와 남부군관구에 25개 사단, 15개 여단을 창설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4년 동안 10,000명만이 충원되었을 뿐이었음.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된데다가 우크라이나는 유로마이단 사건 이후로 내부적인 단속과 군의 정예화를 꾀하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돈바스 지역의 괴뢰국들은 이들에게 밀리고 있었음.
그래서 2022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단행했는데, 여기서도 러시아는 전통을 포기한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만 했음. BTG 중심의 군대를 동원한 것은 좋았는데 이번 침공은 1999년 이후 러시아군이 시도한 최대규모의 병력 동원이었다는 점임.
1999년 다게스탄이 5만(이후 8만으로 증강), 2008년 조지아가 7만 정도인데 비해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최소 15만, 최대 20만을 동원하였음. 이는 기존에 운용해봤던 군대의 2~3배에 달하는 물량이었고 당연하게도 군제개편의 영향은 이러한 대규모 군대의 운용에 차질을 빚었음.
개전 초기 러시아군의 추태는 이러한 영향에도 분명히 기인되었을 결과일 가능성이 높음. 결국 19세기 말엽부터 이어진 군사적 전통을 포기한 대가는 21세기 러시아군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아마도 스탈린의 대규모 군 숙청에 버금가는 문제일 것임.
러시아가 지금 돈바스 일대에서 대규모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점, 그나마 전면전에 밝다고 평가된 발레리 게라시모프가 등판하고나서야 뭐라도 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뭔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됬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문제는 2008년 이후로 동원부대 전체랑 관련자들, 그리고 관리하던 장비들을 싸그리 날려버리거나 방치해서 추가 동원령 내려도 어려울거임.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2008년 이후로 자신의 군사적 전통을 포기하고 나서 이도저도 아닌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임. 전통으로 회귀하자니 이미 그 근간을 스스로 박살냈고, 그냥 밀고나가자니 진짜 답이 안나오는 외통수임.
하기사 1세기 반 가까이 이어지던 전통을 십 수년 내로 완전히 바꾸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개념을 유지하던 사람들의 인식을 세뇌하듯이 바꾸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지라. 아마 이건 전쟁 끝나고도 러시아에게 딜레마가 될 것임.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