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T-54 혹은 T-55를 꺼내오는 것을 가지고 일부 친러분들은 이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들며 쉴드를 치고 있음. T-55의 주포가 100mm이기 때문에 125mm나 T-62 전차의 115mm 포탄보다 가벼우며, 전투지속 능력에서 우위를 보일 것이라는 점, 그리고 어쨌든 전차이기 때문에 IFV보다는 월등할 것이라는 점을 들며 '최신형이 아니더라도 일단은 전차라서 어쨌든 쓸만함' 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음.
하지만 이러한 것은 그저 변명거리에 불과함. 러시아에게는 더 이상 남은 재고 전차가 부족하다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임. 러시아는 현재 기준으로 매월 평균 150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있으나, 보충은 전혀되지 않고 있음. 우랄자곤바자드 등 2개 공장에서 재생전차 등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한 줌에 불과한 수준임.
그러다보니 T-55들을 꺼내서 일시적으로 보충을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음. 그러나 복구 가능한 T-54/55 전차는 250여 대에 불과하며 이는 러시아군이 1.5개월 동안 손실한 물량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임.
T-55보다 상태가 좋은 축으로 꼽히던 T-62M조차도 엔진 등 문제 때문에 공세작전 투입 자체가 불가능한지라 죄다 토치카로 전용하는 마당인데 T-55가 가지는 가치는 T-62M보다도 낮을 수밖에 없음. 게다가 T-54/55가 간다고 해서 달라질 전장 상황이었다면 진작에 달라졌을 것임.
즉, 결론을 정해놓고 러시아가 T-55를 꺼내오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함.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결정임. 왜냐, 전차 등 기동자산을 대부분 상실한 러시아군이 꺼낼 수 있는 거의 최후의 카드이기 때문임.
또 구식 전차가 등장한 이유는 러시아군이 보기에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총반격 시기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임. 그래서 있는 전차들을 닥닥 긁어모아서 총반격 시기에 맞춰 전선을 방어하는 징집병들에 지급하고, 방어용으로 전용하려는 목적이 클 것임. 당장 기동자산이 부족한 연대들이 수두룩한데다가, 8주 넘게 이어진 크레민나-스바토베-바흐무트-불레다르 전선에서 상실한 기갑전력도 상당한 수치임.
즉 구식 T-62와 T-55 전차들을 중심으로 징집병 연대를 증원해주고, 이들이 우크라이나군의 공세에서 갈려나가는 동안, 러시아는 대전 말기 독일군의 티거 중전차대대처럼 운용 중인 T-90M 독립전차중대와 GRU 직할 스페츠나츠 등으로 기동방어를 해보겠다는 소리임.
구식 전차들을 징집병 부대에 던져주는 것 자체가 러시아군도 얘네 딱히 믿는 구석이 없고, 그냥 시간이나 벌어주라는 목적으로 모아둔 것임. 이에 대한 사례 하나가 며칠 전에 있었는데, 자포리자 전선의 전투 사례임.
이 당시 우크라이나군이 포병이랑 공중지원없이 정규 기계화부대로 돌파시도를 한 바 있었음. 근데 징집병 부대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선에서 와해당해버렸음. 우크라이나군 기계화부대는 찔러본 수준의 공격에 1선 방어선 자체가 붕괴당하자 곧바로 전과확대를 위해 추격전에 나섰고, 놀란 러시아군이 GRU 직할 스페츠나츠 여단과 집중포격을 동원해서 겨우 격퇴하였음.
이 일이 벌어진 것이 불과 1주일도 안된 시기의 일임. 굉장히 시사점이 큰 전투였고, 친러 오신트들조차도 '공중/포병지원도 없는 우크라이나군 여단한테 1선이 박살난' 상황에 황당해했음. 그렇다고 해당 여단이 정예부대인 것도 아니고, 비교적 최근에 창설된 단대호 60 계열의 기계화부대였음.
T-72와 M113으로 무장한 전형적인 개전 이후 기계화부대로, 매우 평범한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 징집병 연대가 그대로 박살난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임. 대전차화기도 빈약한 축이라서 T-55들 꺼내다가 쓰려는 모양인데...지금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문제가 많은 것임.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1.5개월 정도를 버틸 정도의 물량이라서 시간벌이용으로 쓰는 수준일 가능성이 크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M1A1 에이브람스를 받느니, 레오파드2A6 전차들을 받느니 하는 와중에 러시아는 T-55를 꺼내오는 상황이 딱히 좋아보이지 않는 것은 전쟁에 문외한 사람들조차도 알 수 있는 것임.
결국 러시아는...바흐무트를 밀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고, 앉아서 우크라이나군이 공세하는 것을 기다려야할 처지임. 러시아군에게 지금 두려운 것은 T-55를 꺼내오는 자국의 현실보다는, 폴란드로부터 공여받은 PT-91 트바르디 등 비교적 최신 전차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임.
즉 우크라이나군은 전력을 동원하지 않고, 기존 보유 장비 및 노획장비들로 러시아군의 파상공세를 버텨냈으며 A급 장비로 무장한 부대들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임. T-55가 나오게 된 복합적인 이유는 여기에서도 기인할 수도 있음.
뭐...그래도 T-55를 꺼내온 러시아의 전략이다! 라고 하실 분들은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상황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면 좋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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