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제강점기나 군부독재시대가 아니지만, 5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금지된 세상이다. 촛불 시위로 이뤄낸 민주정부에서는 5인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고 있다. 소위 팬데믹 사태가 만들어 낸 기이한 현상이다.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는 나, 어느 날부터 인가 룸메이트의 방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프락치가 아니고, 룸메이트의 사생활을 존중하지만 또한 준법시민이기도 하다. 며칠간 나는 그의 *게슈타포가 될 것인지 고민했다.
*게슈타포 : 나치 정권의 비밀경찰
다만 의문스러운 점은, 방 밖으로 나오면 보이는 현관에 나와 룸메이트의 신발만 보인다는 점이었다. (룸메이트는 발이 무척 크기에, 그의 신발은 내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나는 매일 밤 룸메이트와 대화를 나누는, 신발 없는 무리의 정체가 궁금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귀가 울리면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네. 낮게 흥얼거리는 소리는 벽에서 나오는 것 같았어. 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던걸 보면 그도 같은 소리를 들었던 모양일세. 우리가 선 바닥이 떨리는 것이, 이 교회에 익숙해졌던 손님들이 이제 우리를 덮치려 하는 것 같았네, 그들만의 장소를 지키기 위해 말이야. 정상적인 시공간의 틀이 뒤틀리고 깨지는 것만 같았어. 유령으로 가득 찬 교회는 지옥의 영원한 차가운 불로 타오르는 것 같았네. 제임스 분을 직접 보는 것 같았어. 반듯이 누운 여인들에 둘러싸인 음산하고 불행했던 그 사람을’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예루살렘 롯> 중에서-
하지만 얼마 후, 룸메이트가 유령들과 불법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나의 룸메이트는 단지 요즘 유행하는 어플, 클럽하우스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것 또한 불안의 *강령술이 아닌가, 생각했다.
*강령술 : 영혼을 불러오는 의식
사실 나는 SNS의 메커니즘이 사회적 불안감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은 사회적 연결망, 그것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소외된 사람이 된다. 동떨어졌다는 불안감이 SNS 사용자들을 그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SNS를 사용한다.
더군다나 현재의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무대가 결핍되어버린 존재들이다. 학교, 직장, 동아리 등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자신의 무언가를 뽐낼 곳을 상실해 버렸다. 그 무대의 상실을 대신하여 사람들은 제한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존재 증명의 불안감이 지워지길 희망한다.
왜 클럽하우스일까? 지인들과의 화상채팅이나 (줌 화상회의) 낯선 사람들과의 마피아 게임 (어몽어스)을 지나 가상 사회의 장은 계속해서 새로운 무대로 이전해왔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나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첫 번째, 낯선 사람들과의 음성채팅 기반 서비스. 사람들은 누구나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고 싶어 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 또한 부담스러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혹 알고 있던 사람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더 속 깊은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얼굴을 내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간대의 어떤 깊은 대화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매력적인 아이러니다.
두 번째는 클럽하우스의 초대권. SNS의 메커니즘에서 이 초대권이라는 개념은 꽤 독특하다. 지금까지도 비공계 계정과 팔로우등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해 구분하는 시스템은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이 초대권이라는 이름의 가상의 종잇장은, 사생활 보호의 개념을 벗어나 사람들 내면의 특권의식을 자극한다.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길 고대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초대를 받는 것뿐만이 아니다. 누가 초대를 받지 못하는가, 그것이 이 초대의 쾌락을 강화시킨다. 특권의식, 그것은 초대받지 못할 것 같은, 무리에서 소외될 거라는 불안감을 가장 분명하게 선을 그어 해소해주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클럽하우스가 소위, 핫해지자 초대권을 구하기 위해 가상의 마켓을 뒤지기도 한다. 소외의 불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넷상의 *스캐빈저가 되어버린 것이다.
*스캐빈저 : 생물의 사체 따위를 먹이로 하는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나는 문득 이 불안의 소용돌이가 언제쯤이면 끝날 것인가 궁금해졌다. 돌이켜보면 SNS뿐만 아니라 사회의 많은 것들이 불안에서 도망치기 위한 기능으로써 존재한다. 나는 매일 밤 룸메이트의 불안의 강령술을 엿들으며, 그의 불안을, 또한 나의 불안을 곱씹는다.
언제쯤 나의 룸메이트는 불안감을 잊기 위한 가상의 강령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언제쯤 나는 해시태그를 하지 않은 게시물의 좋아요 개수를 온전히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가 종식되길 바라는 것처럼, 나는 이 불안의 사회가 종식되길 매일 밤 바라본다.
글쓴이: 호모루덴스
소개: 낭만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맛있게는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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