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늘은 최근 진행되고 있는 태국 의회의 다수당인 행동전진당(MFP)에 대한 정당해산 이슈와 태국의 왕실모독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정당해산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1958년에는 진보당이 그 대표인 조봉암이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정당 등록취소라는 행정처분으로 강제해산을 당하였고, 2014년에는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해산 결정을 받아 해산된 바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두 정당의 이름에는 모두 ‘진보당’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정당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기구이기에, 다원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의 해산이란 (그것이 적법하다고 하여도)극히 제한적이고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태국에서는 이미 정당해산이 수차례 이루어진 바 있는데요. 게다가 최근에는 (무려!)의회의 다수당조차 정당해산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태국의 왕실과 왕실모독죄, 행동전진당(MFP)에 대한 정당해산 시도와 민주주의를 위한 태국 민중들의 싸움, 왕실과 군부 및 보수세력의 역학관계에 대해 톺아보겠습니다.
2. 태국 국민들의 왕실 사랑,
라마 9세 VS 라마 10세
■ 태국 국민들의 왕실 사랑
태국 여행을 가보신 분들을 한 번쯤 보신 적이 있을 텐데요. 태국의 경우 공공기관은 물론, 식당이나 가정집에도 국왕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아니라 현재에도 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 상영 전에 '왕실 찬가'가 울려 퍼지면 관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거나, 주요 대학의 졸업식에 왕실의 가족이 참여해 학위를 수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태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라마 7세가 1932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외국으로 자진 망명하면서 전제군주제가 폐지되었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여전히 매우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에 대한 비판은 법률적, 문화적으로 강력하게 금지되고 있습니다(태국에서는 왕이나 왕실에 대한 비판은 언제든 강력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데요, 태국 형법 112조 '왕의 존엄에 대한 법'을 위반한 경우, 1건 당 최대 징역 15년형으로 처벌될 수 있습니다).
태국에서 이렇게 강력한 왕권이 유지될 수 있는 배경에는 태국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습니다. 태국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 거의 유일하게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를 겪지 않은 나라입니다. 많은 태국인들은 그러한 역사가 당시 국왕이었던 라마 5세의 현명한 처신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 태국 국민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라마 9세
2016년에 타계한 푸미폰 국왕(라마 9세)에 대한 태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믿음도 태국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사랑의 강력한 이유였는데요. 라마 9세는 태국 짜끄리 왕조의 제9대 국왕으로서 1946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70년 동안 재위했습니다. 이는 역대 태국 국왕 중 최장기 집권일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생존한 전 세계의 군주들 중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를 제외하면 가장 긴 재위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는 태국 정치의 위기 상황 속에서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수차례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고, 태국 지방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왕실 재산을 쾌척하기도 할 만큼 민생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왕비와 일평생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등 사생활에 있어서도 안정적이고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 라마 9세 - ‘검은 5월 사건’과 ‘태국 국경의 지역 프로젝트’
라마 9세의 업적 중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에는 검은 5월 사건과 태국 국경의 마약재배 지역을 커피재배지로 바꾼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1992년 수찐다 크라쁘라윤을 위시한 군부가 '검은 5월 사건'을 일으켜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자, 당시 방콕 시장 잠롱 스리무앙의 주도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경찰 병력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총기를 발포해 유혈사태가 벌어졋고 국제 여론은 악화되었습니다. 이때 라마 9세는 양 진영의 수장인 수찐다와 잠롱을 왕궁으로 소환했습니다. 수찐따와 잠롱은 어전에 들어와 전통 왕실 예법대로 무릎으로 기어 라마 9세를 알현했습니다. 이때 라마 9세는 군부를 대표하는 수찐다를 향해 "부적절하다"고 일갈하였고, 군부 쿠데타는 정당성을 승인받지 못하여 군부 내각은 동력을 잃었고, 결국 수찐다는 외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태국에는 민주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라마 9세는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라마 9세는 지방에 도시가 아닌 마을 단위로 직접 돌아다니며 왕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경지대의 가난한 마약 재배 농촌 마을을 태국 제1의 커피 재배지로 전환시킨 프로젝트입니다. 또한 이러한 왕실 프로젝트의 영향 하에 태국의 많은 병원들은 왕실의 재산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 논란의 대상이 된 태국 현 국왕 라마 10세
위와 같이 라마 9세는 태국 국민들에게 있어 ‘인간과 함께 사는 신’ 또는 ‘국민의 아버지’로서 추앙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라마 9세는 2016년 10월 12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다음 날인 10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 그의 외아들인 라마 10세가 즉위하였는데요. 그의 여러 부적절한 행실은 태국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존경심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라마 9세의 외아들로서 그를 이어 국왕이 된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라마 10세)은 즉위 이전부터 사생활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논란이 된 이슈들에는 네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사라졌던 후궁제도 부활, 이래즈미 문신 등이 있습니다.
2007년 위키리스크가 당시 왕세자 신분이던 라마 10세의 애완견 생일파티 영상을 공개하였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당시 생일 파티에 참석하였던 왕세자비의 옷차림이었는데요. 그녀는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거의 전라 상태로 등장하였고 그러한 차림새로 태연하게 바닥에 엎드려 케이크를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상은 왕실을 존경하는 태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라마 10세의 사치스럽고 무책임한 태도 역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태국 야당은 2020년 9월부터 의회 예산위원회 차원에서 왕실 예산 지출을 조사하였는데, 왕실 예산 중 상당 부분이 라마 10세의 취미 비용으로 쓰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평소 라마 10세는 태국보다 독일에서 더 자주 지내며 국정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2017년에는 라마 10세가 민소매 배꼽티를 입고 이래즈미 문신을 한 모습으로 독일의 한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찍힌 사진이 언론에 노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2020년 코로나로 인해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황에서도 6개월 이상 독일의 휴양지에 머무르기도 하여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3. 민주주의를 향한 태국 국민들의 저항과
행동전진당(MFP)의 약진
■ 민주주의를 향한 태국 민중들의 저항
지난 2020년 7월, 방콕에는 뜨거운 민주화 열기가 몰아쳤습니다. 태국 민중들은 전국의 많은 도시에서 쿠데타 군부정권을 비판하며 정권 교체를 요구했습니다. 처음 그 시위는 대학생 등 청년들이 주도했지만, 과거 탁신 문민 정권을 지지했던 레드셔츠 등 다양한 국민들이 참여하여 더 큰 저항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저항을 촉발시킨 사건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히곤 하는데요, 그것은 ‘레드불 창업주 손자에 대한 불기소 사건’과 ‘미래전진당(FFP)에 대한 정당해산’ 사건입니다.
■ 레드불 창업주 손자에 대한 불기소 사건
2012년 태국 방콕 경찰청은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인 오라윳 유위티아가 과속, 음주운전, 코카인 복용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운전을 하여 경찰을 뺑소니로 사망하게 하였음에도, 한화로 2000만 원 정도의 보석금만을 받고 그를 풀어줬습니다. 그 후 그는 해외로 도주하여 제대로 된 조사조차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태국 검찰은 사건 발생 8년만인 2020년에 그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2020년 7월 태국 경제는 코로나 19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불평등과 실업이 심화된 상황이었기에 이 사건은 태국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 미래전진당(FFP)에 대한 정당해산 사건
21세기 태국 정치의 중요 대립에는 친(親)탁신 진영과 반(反)탁신 진영의 갈등이 있는데요. 2014년 당시 태국의 총리는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 혐의 등에 연루되어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당시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쁘라윳 짠오차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당시 국왕이었던 라마 9세는 쿠데타를 승인하였습니다(쁘라윳 짠오차는 얼마 전인 2023년까지도 태국의 총리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제2야당이었던 미래전진당[한글로 ‘신미래당’으로 번역되기도 함. 영어: Future Forward Party, FFP]은 신생 정당이었음에도 ‘친탁신 VS 반탁신’ 구도에 지친 국민들의 대안으로 떠오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군부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이에 군부는 미래전진당(FFP)과 그 대표 ‘타나톤 쯩룽르앙낏’을 위험 세력으로 인식하였고 그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정치보복을 하였습니다. 또한 군부 정권은 결국 미래전진당(FFP)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고 태국 헌법재판소는 2020년 2월 정당 해산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력 야당 정치인의 의원 자격 상실에 이어 야당에 대한 명분이 없는 정당 해산까지 이어지자 태국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세 손가락을 폈습니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크게 3가지로 “의회 해산, 헌법 개정, 국민에 대한 탄압 중단”이었습니다.
■ 왕실개혁에 대한 목소리로의 의제 확대
대학생들과 청년들은 이 민주화 열기를 왕실 개혁에까지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태국 사회에서 전례 없는 것이었습니다. 시위대의 대학생 대표들은 방콕 탐마삿 대학에 모여 '왕실개혁을 위한 10개조항'을 발표했고 '왕실에 대한 선출된 기관(국회)의 견제와, 왕실 예산의 감축, 왕실의 정치 개입 반대' 등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태국 형법 112조에 규정된 왕실모독죄를 폐지하거나, 형량을 대폭 줄이는 등의 개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법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를 해치고, 반정부 인사를 처벌하는 데 악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시민단체와 야당이 힘을 보탰고, 그들은 여론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대규모 시위는 석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물론, 왕실개혁 주장으로의 확대가 왕실을 존중하는 중·장년층의 시위 참여감소 및 시위동력의 축소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왕실과 정부는 시위 탄압과 반정부 인사 체포 등의 사법처리로 맞섰습니다.
■ 태국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행동전진당(MFP)의 총선 승리
이러한 태국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2023년 행동전진당(MFP)의 총선 선거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행동전진당(영어: Move Forward Party, MFP)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중도좌파 정당으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보수 중심의 태국 정계에서는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으며 젊은 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미래전진당(FFP)이 2020년 2월 21일에 헌재로부터 해산되자, 미래전진당(FFP)의 국회의원 50 여 명은 행동전진당(MFP)으로 이동하였는데요. 그렇기에 행동전진당(MFP)은 실질적으로 미래전진당(FFP)의 후신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 당은 태국 총선에 참가한 주요 정당 중 유일하게 왕실모독죄 개정공약을 내건 정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전진당(MFP)이 2023년 총선에서 151석을 확보하며 놀라운 성적을 보인 것입니다. 피타 림짜른랏 대표의 리더십 하에 전진당은 방콕의 33개 지역구 중 32개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행동전진당(MFP)은 하원에서 151석을 확보함으로써 야당으로서 제1당의 위치로 우뚝 섰고 피타 림짜른랏 대표의 혁신적이고 젊은 정책은 많은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숫자의 우위를 넘어서, 태국의 오래된 정치 판도를 바꿀만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4. 국왕모독죄 폐지 공약과
헌재의 위헌 판결 및 선관위의 정당해산 위협
■ 국왕모독죄 폐지 공약과 행동전진당(MFP)의 정치적 도전
행동전진당(MFP)의 가장 논란이 되었던 공약 중 하나는 국왕모독죄의 폐지였습니다. 태국에서 이 법은 국왕에 대한 모든 형태의 비판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피타와 그의 당은 이 법의 폐지를 통해 보다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이 공약은 특히 젊은층 사이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군부와 보수적인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반대는 전진당이 정치적으로 겪어야 할 많은 법적 및 정치적 도전의 시작이었습니다.
■ 총리 자리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과 피타 림짜른랏의 좌절
피타의 총리직 도전은 많은 정치적 장애물에 부딪혔습니다. 하원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원의 지지도 필요했는데, 상원은 군부가 지명한 성향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피타는 총리직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376표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타의 총리 선출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그에게 큰 정치적 좌절을 안겼습니다.
또한, 피타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 정지 처분을 받아, 그의 정치 경력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피타뿐만 아니라 전진당 전체에 대한 정치적 공격으로 확대되었으며, 태국 정치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결국 2023년 9월 피타 림짜른랏 대표는 당 대표직을 사임하였고 그를 대신하여 차이타왓 뚤라톤 대표가 새로 선출되었습니다.
■ 행동전진당(MFP)에 대한 정당해산 위협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험
행동전진당(MFP)은 피타 전 대표의 의원직 정지 이후에도 여러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도전 중 하나는 정당 해산의 위협이었습니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2024년 1월 31일 행동전진당(MFP)의 왕실모독죄 개정 ‘공약’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위 판결에서 행동전진당(MFP)이 왕실모독죄를 다루고 있는 형법 112조를 변경하거나 취소하려고 했다고 밝혔고 행동전진당(MFP)의 당원들이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구금된 활동가들에게 보석 보증을 제공하는 등 군주제 개혁 운동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판결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행위가 "국가의 안보에 중대하게 위험한" 행위로서 군주제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어 태국 선거관리위원회는 2024년 3월 13일 행동전진당(MFP)이 국왕모독죄 폐지 공약으로 인해 태국의 입헌군주제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정당 해산을 신청하였습니다. 이 요청은 전진당뿐만 아니라 태국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만약 행동전진당(MFP)이 해산된다면 이는 태국 정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전진당을 지지하는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다시 시험대에 오른
태국의 군주제와 태국의 민주주의
■ 태국 왕실과 기득권 세력의 결탁, 그리고 태국 민주주의의 정체
앞서 라마 10세의 행실에 반해 태국 국민들로부터 더 존경받았던 라마 9세의 치적을 설명했습니다만, 그와 태국 왕실이 늘 태국 민주주의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마 9세가 수찐따 내각을 실각시킨 사건은 라마 9세가 승인하지 않은 쿠데타 여섯 번 중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라마 9세의 재위기간 동안 쿠데타는 총 15번 있었는데요, 그는 이 중 9번의 쿠데타에 대해서는 승인을 하였습니다. 즉, 라마 9세는 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서 왕실의 이해관계에 맞게 권력을 행사한 것이지, 라마 9세가 민주주의의 수호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6년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내각과 의회를 해산하고 총리는 해외로 망명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당시 군부가 내세운 쿠데타 이유는 탁신의 부패 스캔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이면에는 태국 왕실과 군부를 위시한 기득권 세력과 불편한 관계였던 탁신을 내쫓는 데 왕실과 군부의 이해관계가 부합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라마 9세를 정점으로 했던 태국 왕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태국 민주주의의 정체와 퇴보에 큰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정당이 의회 제1당이 되었고, 전보다 군주제 개혁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목소리 역시 더욱 커졌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개혁의 중심에 있는 행동전진당(MFP)의 해산이 앞으로의 태국 군주제 개혁의 향방에 미칠 영향 역시 작지 않아 보입니다.
■ 시험대에 오른 태국의 민주주의
태국의 민주주의 역시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도 군부와 보수세력 이를 지지하는 왕실의 승리로 점철될 것인지, 아니면 태국의 민주주의 및 군주제 개혁실현으로 마무리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