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신화

에린에 시인으로 전생했더니 침략이 멈추지 않아 - 2편

죽을 때까지 싸웠더니 진짜 죽어 버렸어요

2026.03.23 | 조회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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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공방 비둘기

천 년과 만 리의 장막 너머에서 온 이야기를 전해요.

1편에 이어서!

 

4. 눈 떠보니 다음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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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닥쳐 온 역병에 하루아침에 망해 버린 파르홀론의 일족!

그러나 투안(Tuan)이라는 한 사내는 살아남아서 에린을 홀로 떠돌았습니다. 혼자가 된 투안은 옷도 안 입고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는데요,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맞나 봅니다.

 

“나의 온몸에는 멧돼지와 같이 뻣뻣하고 덥수룩한 털이 잔뜩 자라나 있었으며, 몰골은 벗겨진 덤불과 같이 야위었고, 오소리보다 더 푸석푸석하고, 빈 자루와 같이 시들고 주름졌으며, 물고기와 같이 헐벗었고, 겨울에 굶주린 까마귀와 같이 비참했고, 손가락과 발가락에 커다랗게 굽은 발톱이 나서 생기도 신성도 느껴지지 않았소.”

 

그렇게 수십 년을 인간 반 짐승 반으로 살던 투안은 늙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니었으니, 죽음을 맞은 그 자리에서 사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사슴으로 태어난 투안은 온 아일랜드의 사슴을 제패하고 사슴의 왕으로 군림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슴에게도 노화는 찾아오고, 늙은 사슴 투안은 또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멧돼지로 환생해 멧돼지의 제왕으로 군림하죠.

 

멧돼지 다음에는 매로, 매 다음에는 연어로 태어난 투안은 이렇게 수천 년의 삶을 이어 가다가 울라(Ulaidh) 땅의 어부에게 잡혀 노릇노릇하게 구워집니다. 투안은 그 연어를 먹은 울라 왕비의 아들로 태어나 수천 년만에 인간으로 돌아옵니다.

 

인간으로 돌아온 투안을 성자 피닌(Finghin)이 전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본인이 수천 년 동안 겪은 역사를 증언했으니... 이것이 바로 투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입니다. 투안이 없었으면 «에린 침략의 서»는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도 살아서 사신을 농락하며 어딘가에서 조용히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5. 아일랜드에 심시티

 

짐승처럼 살던 투안은 빼놓고, 파르홀론의 일족이 망하자 아일랜드는 이제 텅 비어서 30년 동안 무주지로 남습니다.

30년 뒤에 머나먼 동쪽 스키티아에서 온 네바(Neimheadh)의 함대가 해류에 밀리고 밀린 끝에 우연히 아일랜드에 상륙하니, 창세력 2850년의 일입니다.

 

네바의 아내 마하(Macha)도 이 머나먼 서쪽 미지의 땅을 밟는 영광을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12일째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마하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울라 땅의 아르드 마하(Árd Macha)에 영원토록 이름을 남겼습니다.

 

라(ráth) 또는 링포트(ringfort)는 아일랜드 전역에 수만 곳이 있는 석조 성벽 유적입니다.
라(ráth) 또는 링포트(ringfort)는 아일랜드 전역에 수만 곳이 있는 석조 성벽 유적입니다.

네바의 일족은 야생의 섬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개간을 합니다. 아일랜드 전역에 깔린 석조 성벽, (ráth)를 처음 축조한 이들이 네바의 일족이라고 전해집니다.

 

실제 라는 청동기-중세 초기 게일인이 지은 유적인데, 중세 이후로는 요정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기피하였습니다. 심지어는 20세기에 깐 아스팔트 도로조차 라를 비켜서 짓고는 했지요!

 

특이한 점이 있다면, 킨 에흐(Cinn Eich) 성, 또는 "말머리 성"을 지은 이들은 네바의 일족이 아닌 포보리 일족이었다는 겁니다. 수천 년을 이어질 아일랜드인과 포보리 일족의 피 터지는 갈등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포보리 일족의 마단 민류르(Madan Muinreamhar), 또는 "목 굵은 마단"의 네 아들은 하룻밤 사이에 킨 에흐 성을 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네바가 생각했죠.

"저걸 그냥 놔두면 우리에게 위협이 되겠구나!"

이튿날 아침 네바는 마단과 네 아들을 습격해서 시체로 만들어 파묻어 버렸고, 그렇게 킨 에흐 성을 꿀꺽했다고 전해집니다.

 

네바의 일족은 성도 심시티하고, 심시티할 땅을 만들기 위해 숲도 열심히 베었습니다. 먼 훗날 아일랜드의 대영웅 쿠 훌린의 영지가 되는 미르헤브네(Muirtheimhne) 들판이 이때 생겼습니다.

 

 

6. 내가 죽든가 니가 죽든가

뒤틀린 존재, 게일인의 숙적, 포보리 일족
뒤틀린 존재, 게일인의 숙적, 포보리 일족

네바의 시대는 투쟁의 시대였습니다. 아일랜드 북동쪽 끝자락 달 리아다 땅에서 포보리 일족과 싸움이 붙은 것이 시작이었죠. 이 싸움에서 네바의 아들 스타른(Starn)이 포보리의 수장인 피와르(Faobhar)의 아들 코난(Conan)에게 살해당합니다.

그 다음에는 서쪽 코나흐타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이번에는 포보리의 두 장군 (Gann)과 샤난(Seanghann)이 죽습니다.

세 번째 싸움에서는 스타른의 아들 비완(Beoan)이 아버지의 원수!! ...를 갚지 못하고 아버지의 원수에게 죽습니다.

 

연달아 벌어지는 싸움으로 뒤숭숭한 네바의 일족... 일족의 수장인 네바는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는데요,

보여주기 전에 또 그놈의 역병으로 죽고 맙니다.

아일랜드 남쪽의 항구 대도시 코크(Cork) 앞바다의 작은 섬에 네바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네바가 아일랜드에 온 지 9년째의 일입니다.

 

신난다! 빈집털이다!!!
신난다! 빈집털이다!!!

네바가 죽자 포보리가 움직입니다. 포보리 일족의 두 수장, 앞서 말한 코난과 모르크(Morc)가 재빠르게 군대를 움직여 구심점을 잃은 일족을 압박합니다.

결국 네바의 일족은 포보리에게 매우 가혹한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하지요.

 

“포보리는 온 에린 땅에 양떼를 풀어놓아 길렀으며, 그들의 허락 없이는 에린 사람이 낮에 집에서 연기조차 피우지 못하게 하였다. 또 그들은 네바의 자손에게 해마다 거둔 곡식과 짜낸 우유, 슬하의 자식의 삼분의 이를 바치게 하였으며, 그밖에도 견디기 힘든 온갖 조공과 노역을 요구하였다.”

 

해마다 들판에 나아가 밥도 바치고 아들딸도 바쳐야 하는 네바의 일족이 결국 폭발합니다.

네바의 아들 파라스 랴흐댜르그(Fearghas Leathdearg), 손자인 셰메운(Semeon), 증손자인 아를란(Earghlan)이 온 섬을 돌며 혈족을 소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글우글 모인 곳에 비장한 기운이 감돕니다.

 

“포보리의 압제에 맞서기 위하여 모인 네바의 자손이 바다에서 삼만, 뭍에서 삼만이었으며, 이는 힘을 합치기 위하여 데려온 이방인과 부랑자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무리는 더하지 않은 수효이다.”

 

아일랜드 북쪽의 작은 섬, 토리
아일랜드 북쪽의 작은 섬, 토리

바다 건너의 자그마한 토리(Toraigh) 섬에는 서슬 퍼런 포보리의 수장, 코난의 성채가 사나운 깃발을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포보리의 무력에 굴복한 미물들이 바다 건너편에 집결하여 투지를 불태우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난의 깃발은 바닷바람에 휘날리기만 합니다...

 

에린 역사 최초의 대전쟁과 최초의 대참사의 서막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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