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20일 에세이레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

  솔직히 말하면 광화문에서의 추억이 많지 않다. 개인적인 추억이 듬뿍 묻어나는 장소라기보다는 ‘서울의 관광 명소’ 같은 느낌? 외국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놀러 오면 데려갈 법한. 맛집도 많고.

  그래서 아주 친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광화문이 좋다. 고풍스러운 광화문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도심의 풍경, 또 그 안을 바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현실이 아닌 슬로우모션 처리된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듯한 느낌, 첨단과 과거가 동시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늘 현대적인. 왠지 몰라도 광화문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다. 위로 20분 걸어가면 삼청동에서 수제비를 먹을 수 있고, 아래쪽으로 20분을 가면 덕수궁 돌담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도 크나큰 장점이다. 정말이지, 갈 때마다 ‘서울이라는 나라에도 수도가 있다면 여기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광화문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한 그 몇 안 되는 추억들이 모두 선명하고 따뜻한 기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장소에 다섯 번쯤 가면 기억에 남는 날은 하루 이틀 정도 된다고 했을 때, 광화문은 그 다섯 번 모두가 유독 선명하고 진하게 남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웃기는 말이지만, 그게 참 신기해서 자주 안 간다. 광화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특별한 기분, 그게 옅어질까 봐.

  그래서 그 기억들이 뭔가 하면, 우선 광화문은 초등학생이던 내가 혼자서도 놀러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다른 동네’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친구들끼리 5호선 열차를 타고 광화문역 지하 교보문고에 갔는데, 아무도 책은 살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관심 있는 척 뒤적거렸다. 그렇게 10분 정도 눈치 싸움을 하다가 누구 한 명이 “아 다 봤다~” 하면 자연스레 다 같이 문구 코너로 발을 옮겨 그제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펜이며 공책이며 스티커며 신나게 쇼핑을 해댔더랬다.

  어느 날엔 또 수제 팔찌를 만들겠다며 공예 상가에 갔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은 무슨, 인터넷 검색이 생활화되지 않던 때라 뭐가 필요한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비즈만 2만 원어치를 샀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비즈만으로는 만들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구나!’ 아무리 초등학생이라지만 조금 바보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랬다. 그날 밤, 돈 함부로 쓴다고 부모님께 혼도 났던 것 같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끼리 떠나고 우리끼리 물건을 사고 밥을 먹고 하는 그 순간, 내가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 봐야겠다 하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다 큰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중학생 때는 광화문 디타워에서 가족 식사를 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3층인가 4층에 있는 고깃집이었던 것 같다. 불판 위에서 직접 구워 먹는 게 아니라 코스로 구워져서 나오는 것도 신기했지만, 디타워를 비롯한 그 주변 건물들이 나에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중학생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던함의 극치(?)였달까.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띠는 오브제들과 따뜻한 톤의 간접 조명들, 그사이 중간중간 배치된 알록달록한 미술품들. 그리고 그런 화려한 고층 건물들 사이에 온갖 맛있는 것들은 다 모아 놓은 듯한 디타워. 초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생각하면 딱히 뭐 그럴 게 있었을까 싶은데, 그때는 정말이지 그곳이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고등학생 때는 <서울 도심 탐방>이라는 지리 수업 과제로 외국인 관광객들과 터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인터뷰를 했고, 대학생 때는 친구랑 정통 아인슈페너를 먹으러 갔다. 그리고 얼마 전엔 공예 상가에 (또) 갔다. 이번에는 팔찌가 아니라 반지를 만들러. 그래도 크면서 생각이라는 게 조금 생겼는지, 낚싯줄과 니퍼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았다. 이번엔 반대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아 좋았다. 뚝딱뚝딱 생각보다 너무 잘 만드는 탓에 ‘이거 팔아서 돈 벌어볼까?’ 하는 다분히 상업적인 생각도 잠깐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모아놓고 보니 정말 하나같이 대단할 것도 없지만 평범하지만도 않은 추억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따로 있던 비즈 알들이 낚싯줄에 꿰어져 하나의 팔찌로 완성되는 기분이다. 광화문에서의 다음 추억은 뭐가 될까? 다음 비즈 알은 뭐가 될까. 자꾸 비즈 얘기를 하니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다소 촌스럽고 귀여운 표현도 생각난다. 방울방울. 광화문은 내게 그런 곳이다. 촌스럽고 귀여운 내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지금까지 터지지 않고 방울방울 맺혀 있는 곳. 여전히 ‘서울의 관광 명소’이지만, 그렇기에 매일 내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네나 일터와는 다른 설렘과 기대가 남아있는 곳. 나의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곳. 그런 곳인 것 같다, 광화문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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