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3일 에세이레터- 아, 누가 첫 문장 좀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

  ‘아, 누가 첫 문장 좀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뒤부턴 내가 어떻게 알아서 잘 써 볼 텐데.’

  글이 잘 안 써질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난 분명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담고 싶은 생각도 많은데 여는 말을 떠올리기는 왜 이리 힘든 걸까? <첫 __>라는 이번 에세이 주제를 받고 나서도 그랬다. 첫사랑, 첫 출근, 첫 눈, 첫 노트북, 첫 친구… 머릿속에 수많은 ‘첫’들이 스쳐가는 와중에 글의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고뇌의 흔적

  일단 뭐라도 써 보자 하고 끄적여 봐도 형체 없이 뜬구름같은 생각들의 나열일 뿐, 영 지지부진한 게 쓰면 쓸수록 오히려 글은 점점 안개가 낀 듯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미 벌써 몇 번이나 뒤엎었지만,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워드에서 새 문서를 열었다. 이름은 ‘문서4’. 그 순간, 평소에 자주 하던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아, 누가 첫 문장 좀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 글의 첫 문장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이번 글도 그렇지만, 그 어떤 글을 쓸 때라도 일단 이런 식으로 맘에 드는 첫 문장이 완성되면 그 뒤는 비교적 쉽다. 말문이 트이는 느낌과 비슷하다. 대화 중에 우연히 통하는 주제가 나오면 서로 신이 나서 술술 얘기를 이어 나가는 게 어렵지 않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도 일단 ‘이거다’ 싶은 도입부가 정해지면 그 후론 별 고민 없이 죽죽 써 내려갈 수 있게 된다. 어색했던 친구와 갑자기 탁, 하고 말이 트이게 되는 순간처럼 아주 기쁘고 신나게, 휘리릭.

  그런데 그 첫 문장, 내가 쓰고 싶고, 누군가가 읽고 싶은 그 매력적인 첫 문장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도 안 떠오를 때도 있다. 시속 300키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를 앞에 두고 시동을 못 걸어서 동네 마트조차 못 가고 있는 기분이랄까? 답답함을 넘어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첫 문장이 앞장서서 길을 밝혀 주기 전까지 ‘글’에 미치지 못하는 조각 같은 생각들, 손끝에 맴도는 단어들, 첫 문장으로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문장들은 그저 정처없이 떠다니는 도로 위의 무법자들일 뿐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진땀을 빼며 교통 정리를 하면서, 구원자처럼 나타나줄 그 멋진 한 문장을 기다린다.

  뭐, 글 쓰는 사람들이 다 나처럼 도입부에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성미가 급한 건지 취향이 단순한 건지, 진득하니 기다려야 진가가 드러나는 것들 못지않게 첫 만남부터 쿵, 하고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것들에게 큰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노래를 들을 때에도 듣자마자 삘(?)이 꽂히는, 전주나 제목부터 내 취향이다 싶은 음악들을 찾아 듣고, 책을 고를 때에도 ‘첫 인상’, 그러니까 표지, 제목, 목차 등이 마음에 들면 고민 없이 지갑을 여는 편이다. 내 글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매력적인 오프닝에 신이 나서 계속해서 쓰고 싶고, 내 글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라도 멈춰 섰으면 좋겠다. 달리 말해 어그로(?)가 잘 끌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늘 기다린다. 강렬한 첫 인상을 심어줄 그 한 문장을.

  그 한 문장이 열심히 고민한다고 해서 찾아와주지 않는다는 건 조금 애석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때 받는 깜짝 선물처럼 기분 좋게 찾아오기는 한다. 찾을 땐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밥을 먹거나 샤워를 하거나 친구랑 카페에서 떠들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서 뿅! 하고 튀어나오는 식이다. 그러면 나는 그 찰나의 선물을 놓치지 않고 탁 낚아서 휴대폰 메모장에 잘 수납해 뒀다가, 혼자 있는 시간에 살을 붙여 글을 쓰고, 마지막 문장으로 예쁘게 매듭을 지어 다시 첫 문장에게 선물해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처음부터 내가 다 쓰길 잘했다. 선물처럼 찾아온 첫 문장에게 꼭 맞는 매듭은 나만 지어줄 수 있을 테니까. ‘문서4’, 그리고 잠시나마 ‘그냥 외주를 줄까?’하고 고민했던 내 귀차니즘에게 고마운 밤이다. 문서4가 새 이름을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이쯤에서 슬며시 마지막 문장도 놓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