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0일 에세이레터- 쓸데없이 비싼 알콜물

  향수, 말 그대로 향기 나는 물. 아무리 진해 봐야 향료 함량은 40% 정도가 최대인 아주 값비싼 알콜물이다 (사실 대부분의 향수의 부향률은 15% 언저리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향수를 사 모은다. “히야 이거 진짜 사치품 끝판왕이네” 하면서도 기꺼이 호갱을 자처하는 걸 보면 꽤나 향수에 진심인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향수가 사치품 끝판왕인 이유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시계나 가방 등도 표면적인 기능이랄 건 있다. 시간을 알려준다든지, 물건을 수납하게 해준다든지, 패션에 포인트를 준다든지 하는. 하지만 향수의 기능은 “좋은 냄새 남”, “기분 좋음”, “유혹(?)” 따위이다. 게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30만 원짜리 향수를 뿌리고 사진을 찍어 봐야 사진에 남지도 않고, 요즘같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는 때엔 그 “좋은 냄새 남”과 같은 아주 미니멀한 기능조차도 수행하지 못한다. 쓰다 보니 생각보다 더 쓸데없네… 아무튼, 그래서 난 향수를 좋아하지만서도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봄/여름용, 가을/겨울용으로 한두 개쯤만 구비해둬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왜 향수를 사 모으냐, 비합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히 쓰잘데기도 없으면서 가격도 비싸? 아 너무 사고 싶다.” 뭐 이런 거다. 본질은 그저 “향기 나는 물”인 주제에 몸값은 10만 원을 웃돌고, 대량생산하기도 힘들 것 같은 세상 화려한 유리병에 담겨있다는 점도 참 웃기고 매력적이다. 그들은 왜 생활에 아무런 편리도 주지 않으면서 당당히 백화점 1층을 장악하고 있으며, 몸값 수십억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앞다투어 광고하는 걸까? 그건 바로 향수의 세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지적인 소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아직까지도 봉건 귀족들처럼 쓸데없는 사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서의 낭만.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사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보통은 거기서 거기다. 삶을 편리하게 해준다든지, 보유하는 것 자체로 장기적인 투자 가치가 있다든지,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향수는 “자기만족"이 최우선적인 기준이 되는 품목으로, 앞서 나열한 기준들에 부합하지 않는다. 향이 변하거나 휘발될 수 있는 특성상 ‘샤테크'(샤넬 재테크)나 ‘슈테크'(신발 재테크)처럼 장기간 보관한다고 가치가 높아지긴커녕, 미개봉 상태여도 구매와 동시에 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진다. 또한, 잘 관리한다고 해서 반영구적으로 쓸 수도 없는 철저한 소모품이기도 하다. 결국, 향수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향수가 내게 신발이나 가방, 혹은 전자제품처럼 어떤 확실한 부가가치를 제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그런 품목은 거의 전무하다. 우린 모든 걸 아주 합리적으로, 똑똑하게 구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향수의 세계에서만큼은 ‘쓸모'야말로 가장 쓸모없는 요소이며, 개인의 취향이 구매의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현대인들로 하여금 옛 귀족들의 사치스럽고 비합리적인 향락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철저히 취향과 이미지와 안목을 사고파는 세계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래서 나는 백화점 1층에 펼쳐진 그 세계를 마주할 때면 꼭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웃거린다. 필요와는 저만치 동떨어진, 순도 100% 낭만에 이끌려서 말이다.

  그렇다 해서 향수가 정말 쓸데없기만 한 건 아니다. 향에는 한 가지 강력한 기능이 숨어있는데, 바로 ‘기억'이다. 향에는 기억을 불러오는 힘이 있다. ‘프루스트 현상'이라고도 하는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어느 겨울날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고향에서 숙모가 내어주곤 했던 마들렌의 향기를 떠올린 것이 유래가 됐다. 나에게 있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다섯 살 생일 때 맛보았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맛이지만, 크면서 그 자리는 여러 향수가 대신하게 되어 중학생 무렵은 엄마 몰래 훔쳐 쓰던 샤넬 샹스로, 고등학생 시절은 입학 선물로 받았던 불가리 바디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대학생에서 사회 초년생으로 넘어가는 지금 이 시절이 나중에 어떤 향으로 기억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뭐가 된대도 좋다. 예전에 하도 뿌려서 이제는 질려버린 향이든 너무 진해서 조금만 뿌려도 머리 아픈 향이든, 내 삶에 찾아왔던 모든 향은 어떤 한 시절로 이끄는 책갈피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지 생활을 하며 종종 향수를 느꼈던 나는, 향은 그 어떤 사진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을, 더 진한 추억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향은 그리움을 달래주기도, 증폭시키기도 한다고, 향수(香水)와 향수(鄕愁)가 동음이의어인 건 한국어 역사상 최고로 멋진 우연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던 시절도 있었더랬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는 새삼 향수가 정말 쓸데없다는 걸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나 공감하며 읽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결과적으로 향수 비추천글도, 영업글도 아닌 글이 되었지만 적어도 내가 향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얼추 담긴 것 같다: 별 쓸모는 없는데 그냥 사고 싶고 멋져요, 사실 그렇게 쓸데없지만도 않답니다. 글에도 향을 첨부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런대로 참 ‘향’답고 좋다고 생각한다. “궁금하면 찾아오세요”, “인터넷으로는 못 알려 드려요” 하는 게, 참 한결같이 구닥다리 같고 낭만적이랄까. 덕분에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나와 내 향이 조금은 궁금해졌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향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쓸모가 많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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