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1일 에세이레터- 삶의 노트들

  상품 상세 정보

  ‘향수’라는 단어는 참 재미있다. 단 두 글자만으로 누군가 그리워져 가슴이 저리기도 하고, 코끝이 향기로워지기도 한다. 영어로 향수를 뜻하는 'Perfume'의 어원도 꽤 흥미롭다. 대부분의 영어 단어들이 그렇듯 ‘Perfume’이라는 단어도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연기를 내어 통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의 제사에서 향기가 나는 나뭇가지를 태워 연기를 내는 행위에서 출발한 단어라고 한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 본 적 있는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어? 하셨을 테다. 한국에서도 장례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나는 어떤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 장소는 나의 장례식이다. 언젠가 열릴 나의 장례식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향이 나면 좋을까.

  로샤스의 마드모아젤, 디올의 블루밍 부케, 톰포드의 비터 피치. 내 '최애 향수'들이다. 이 향들이 장례식장을 빼곡히 채우는 건 어떨까?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부정확한 향이었으면 한다.

  그 향을 맡는 것은 나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조문객들의 몫이다. 그들이 나와 쌓은 추억들, 감정들, 끝까지 하지 못한 말들 따위는 독특한 향기로 남을 것이다. 조문객들은 저마다 나와 맺은 관계가 다를 테니, 그들이 피우는 나의 향도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춤을 추며 공중에 흩어질 테다. 향수의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처럼 말이다.

  Top note. 스트로베리, 우유, 스모키 더스트

  탄생 직후부터 유아기까지를 내 인생의 탑 노트로 간주하겠다. 부모님의 기억에 따르면, 딸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에게서는 계절을 막론하고 딸기 냄새가 풍겼다고 한다. 거기에 어린애 특유의 젖내가 났을 것이고, 신문과 책 사이에서 자랐으니 은은한 먼지 냄새도 났을 게 분명하다.

  나의 탑 노트를 누구보다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당연히 한 여자와 한 남자일 것이다. 하나뿐인 자식이 세상에 없으니 그들은 부모에서 부부라는 단일 지위로 회귀할 것이다. 바로 그 '하나뿐인 자식'이 감히 당신들보다 이른 죽음을 상상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퍽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나의 부재를 아주 빠르게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코에 스치는 나의 향은 무턱대고 순수했던 내 인생의 탑 노트였으면 한다. 흔히들 향수의 탑 노트와 그 향수의 이름을 동일시하듯이, 나의 부모님도 소천한 자식을 영원히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겪었던 복잡한 감정과 사건 대신, 처음 젖을 먹었던 순간이나 처음 제 손으로 딸기를 집어 먹었던 순간 따위를 나의 전부로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후각이 예민한 엄마와 편두통이 잦은 아빠에게 향이 강한 미들 노트와 텁텁한 베이스 노트는 부적절하다. 그러니 두분의 코끝에는 언제까지고 보송하고 폭신한 최초의 향기만이 맴돌기를.

  Middle note. 초콜릿, 시트러스, 레드 히비스커스

  사람들이 사춘기라고 부르는 그 시기의 향이다. 사랑과 우정의 단꿈에 젖어 있었으니 끈적하도록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났다. ―실제로 초콜릿을 많이 먹기도 했다.― 그 꿈에 금이 가고 비틀린 부분이 생겼을 때는 새콤한 시트러스 향에 눈물이 찔끔 났고, 청소년기가 끝나갈 무렵엔 몽롱한 히비스커스 향으로 상처를 덮으려 했다. 되레 지독한 향무덤이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십 대의 반 이상을 함께했던 친구들에게 미들 노트를 부탁한다. 그들도 나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격변하는 향을 지녔던 이들이 아닌가. 나의 죽음을 겸해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들의 노트를 돌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에 무뎌지면서, 낙엽만 굴러가도 웃기 바빴던 소녀들은 그 낙엽에 자신을 대입하는 절망적인 청년이 되곤 하니까. 친구들과 자주 찍곤 했던 스티커 사진처럼, 내 영정에 리본이나 곰돌이 스티커 따위를 붙여 주어도 좋을 것 같다.

  그들 중 몇몇은 고집스럽게도 나의 베이스 노트를 함께 기억하려 하겠지만, 정중히 사양한다. 나의 부모님에게 바라는 바와 같이, 친구들의 몫은 그들이 함께 조향했던 내 인생의 미들 노트를 들이마시는 일로 충분하다. 그럴듯한 어른이 되고자 몸부림쳤던 베이스 노트를 기억하려 한다면 그 끝은 후회로 범벅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술을 더 자주 같이 마셔 줄걸, 산책을 함께 나갈걸, 여행 계획을 짤걸……. 차라리 나의 영정에 고양이 수염이나 한 줄 더 그려 주는 게 좋겠다.

  나의 죽음을 굴러가는 낙엽처럼 여겨도 좋다. 그랬다가는 최소한 가을마다 나를 떠올릴 수 있겠지. '걔 보고 싶다'로 시작되는 쓸쓸함은 낙엽과 함께 가을 바람 사이를 굴러다닐 것이다.

  Base note. 바닐라, 아몬드, 코냑

  탑 노트가 향수의 첫인상을 결정한다면, 베이스 노트는 향수의 기억을 결정한다. 첫인상이 기억으로 직결된다는 주장에는 달리 할 말이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살갗에 은은하게 스며들어 오랜 시간 코에 남는 향이 바로 베이스 노트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지각의 차이인 셈이다. 한 번 지나치고 마는 향수는 탑 노트로 기억되지만, 한동안 곁에 두고 지냈던 향수는 베이스 노트로 지각된다.

  나의 베이스 노트는 어떤 이들에게 공유되었을까. 대학교와 일터, 동아리에서 만난 인연들과 곳곳의 계절을 함께해 준 지난 연인들이 있을 것이다. 옛 연인들이 장례식장에 와 줄 수 있을까? 나야말로 그들의 장례식장에 갈 용기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베이스 노트를 온몸으로 끌어안지 않았나. '은근'하지도 않고, '스며들'지도 않고, 피부의 일부가 된 잔향을 구석구석 기억하려 애썼던 사람들이 연인과 나였으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내가 제안한 나의 베이스 노트는 나의 향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조심스러운 바닐라와 부드러운 아몬드, 그리고 어른인 척하는 코냑.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십 대 초반과 중반의 삶이 살갗에 깊게 침투한 결과물이다. ‘어른’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그 어린 녀석이 ‘멋진’까지 욕심냈으니 그 고군분투는 오죽 괴로웠을까. 이십 대의 향기를 시향해 준 조문객들에게는 다른 것을 부탁하고 싶지 않다. 나로 인해 어질했다면 미안하고, 나로 인해 따스했다면 고맙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은 텁텁한 향이 썩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테니, 오로지 당신들만을 위해 프레시 노트가 선명한 니치 향수들을 입구에 놓아 주겠다. 그 앞에는 경고 문구를 하나 붙여 놓는 것이 좋겠다.

  고인의 바닐라 향을 기억하는 분만 사용하세요.

  판매자 정보

  상상력의 한계라기보다는, 겪어 보지 않은 나의 중-말년을 함부로 상상하기가 조심스러운 관계로 이 글에 적힌 나의 장례식은 나의 이십 대 중반에 열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죽음은 근래 내가 해 본 상상 중 가장 막연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나의 영정사진과 그 아래 깔린 국화꽃 몇 송이를 떠올리기도 전에 몇몇 사람들의 우는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마음이 고생스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이른 죽음에 눈물을 흘렸던 과거의 내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소천한 이의 어디쯤을 맡았을까. 달콤했을까, 강렬했을까, 묵직했을까. 향기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누군가의 영정 앞에서 조금 덜 슬퍼했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향에서 피어난 연기는 공중에 흩어져 종국에는 그 일부가 된다. 나라는 사람, 아니, 내가 아닌 그 누군가의 죽음도 하얀 눈물에서 투명한 한숨으로 흩어져 사라졌으면 한다. 누가 어떤 향으로 나를 기억하건, 적어도 그 향이 칼칼한 미움보다는 다정한 배웅이기를 바란다.

🎵 오늘의 노래 - 브로콜리너마저 "분향(Funeral)"

✨구독자 님의 코멘트로 오롯이를 완성해주세요

에세이 감상 남기기

오늘의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오롯이 남겨주세요!

짧아도, 길어도 좋아요. 개인적 경험? TMI? 대환영이죠🥰

남겨주신 코멘트는 필진에게 전달돼요.

다음 주 레터에 실릴 기회까지💌

▶ 지난 주 오브님의 에세이를 읽고 구독자님들이 남겨주신 감상이에요✉

▶ 오브님의 지난 에세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