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9일 에세이레터- 흑역사가 덜 마른 빨래라면

  이백의 정야사(靜夜思, 고요한 밤의 생각)를 좋아한다.

 집을 떠나 학교 다니던 때. 기숙사 올라가는 길에 달이 보이면 가끔 외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 고향이 그립지는 않았다. 고향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축축하고 습해지는 거 같아서. 나는 물에 젖은 기억을 묻어둔 구덩이를 살펴봤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유산 문제로 인연을 끊은 동기(同氣)와 재회하고 나쁘게 헤어진 애인과도 다시 연락한다는 세상인데 그깟 곰팡이 핀 흑역사쯤이야.

  하지만 내 흑역사는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과 같아서, 나조차도 대부분 잊어버렸더라. 구덩이를 좀 파볼까 싶어 졸업했던 학교를 둘러봤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초등학교가 폐교돼 박물관으로 개축했다는 것과 중학교 맞은편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는 것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박물관은 진짜 난센스다’, ‘알박기하던 사람이랑 원만히 합의했나 보지’ 같은 실없는 생각만 하다가 돌아왔다. 고향을 말하기엔 이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멀리 오지 못했으니까. 나중에 인생이 술술 잘 풀려 정무직 공무원에 도전하게 되면 정적들이 알아서 구덩이를 파줄 테니까(혹은 없던 구덩이도 만들어 줄 테니까) 굳이 지금부터 손에 흙을 묻히지는 말기로 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지만 그냥 마음 편히 살기로 했다.

  그러나 학교를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에 뜨끔한 일이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가 서 있길래.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주희의 말을 심상히 여긴 적은 없으나 꽃다운 소년 시절은 금방 지나갔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빨도 다 빠지고 머리털도 다 벗겨지겠지. 늙는 게 그렇듯 나는 몹시 추하고 볼품없어질 것이다. 흑역사는 땅 밑이 아니라 거울 앞에 있었다. 그런데도 마냥 마음 놓고 살아도 되는 걸까.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김준엽 교수가 왕정위에 관해 쓴 글을 읽었던 게 생각났다. 신해혁명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장개석과의 갈등 끝에 일본제국에 협력하는 쪽을 택했고, 민족반역자로 영원히 낙인찍히게 됐다고. 말년의 오판으로 인생이 흑역사가 된 경우다. 조지훈 시인도 『지조론』에서 비슷한 맥락의 글을 쓴 바 있다. 구한말 정치가 충정공 민영환을 예로 들어, 젊었을 적에는 집안의 권세만 믿고 시건방지게 굴어 욕을 먹기도 했으나 나이 든 이후 보여준 위국헌신 행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생애 초기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새사람이 된 경우다.

  내가 덮어둔 구덩이를 다시 살펴봤다. 곰팡이 핀 기억들이 묻힌 곳을. 나는 구덩이를 파는 대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꽃도 피고 열매도 열리겠지. 잘 안되면 다시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된다. 살아온 날이 적진 않지만 남은 날이 더 많으니까.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고향에 얽힌 흑역사도 잘 마른 빨래처럼 고이 접어 서랍장에 넣을 수 있겠지. 이왕이면 햇볕 냄새가 나면 좋겠다.

✨구독자 님의 코멘트로 오롯이를 완성해주세요

에세이 감상 남기기

오늘의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오롯이 남겨주세요!

짧아도, 길어도 좋아요. 개인적 경험? TMI? 대환영이죠🥰

남겨주신 코멘트는 필진에게 전달돼요.

다음 주 레터에 실릴 기회까지💌

▶ 지난 주 순두부님의 에세이를 읽고 구독자님들이 남겨주신 감상이에요✉

▶ 순두부님의 지난 에세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