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나의 x 아니 단짝 소개서

일곱 살이었던 내게 유치원생이 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어린이’임이 인정되는 것과도 같았다. 여느 미취학 아동들이 그렇듯 ‘어린이’라는 호칭은 훈장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유치원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긴장과 설렘을 주는 곳이었다. 어린이집만을 다니다 마침내 유치원 입학을 앞둔 봄에 나는 유영을 처음 보았다. 유치원 측에서는 입학식 전 주 주말 부모님과 함께 방문해 한두 시간 정도 내부를 둘러보고, 장난감도 만져볼 것을 권했다. “그 색종이 어딨어?” 내가 유영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동그란 안경에 안대 패치를 붙인 유영은 색종이의 표면에 그려져 있는 햄토리를 오려 멋지게 종이를 꾸미고 있었다. 나는 상상치 못했던 방법이었다. 색종이의 표지는 늘 나에게 쓰레기통 행이었는데, 햄토리를 오릴 생각을 했다니. 그 날, 나는 그런 유영을 유심히 관찰하며 나 역시도 유영을 따라 색종이를 오렸다.

이후로 유영을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는데,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곳에서 유영을 다시 만나게 됐다.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었고 한 건물만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과장 없이 유영과 내 집 거리는 30걸음이 채 되지 않았다. 더 놀라웠던 사실은, 유영과 나는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 다 4월 9일 하나는 낮, 하나는 저녁에 나란히 이 세상에 나왔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나는 음력, 유영은 양력으로 주민등록번호가 등록되어 있어 누군가 가만 앉아 2001년에 4월 9일을 음력으로 하면 며칠이더라 하고 세어보지 않는 이상은 전혀 모르고 지나갈 뻔한 일이었다. 사주팔자라고들 하지 않나. 우리는 같은 운명을 타고난 듯하면서도, 음력과 양력과도 같은 조그마한 차이들을 두고 함께 커갔다. 초등학생 내내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밖에 없지만 늘 옆 반이 되거나 멀지 않은 곳에 서로의 교실이 있었다. 중학교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게 되었고. 고등학교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다른 어문 계열 특목고로 진학했다. 그 후 스무 살, 한치의 의도 없이 같은 대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나와 유영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지금보다 곱절로 못되고 이기적인 어린이였다. 누군가가 나의 것을 갖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화가 나면 꼭 화를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성미였다. 일례로, 엄마는 ‘아름다운 가치 사전’이라는 책을 두 권 구입해 하나는 나에게, 하나는 유영에게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엄마가 유영에게 선물하는 것이 심술이 났다. 심지어 나에게는 한 권의 책이 이미 있는데 말이다. 그날 밤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책 속에는 배려와 사랑, 나눔이란 무엇인지 어린이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날 엄마에게 혼이 나며 책을 읽지 않고도 나눔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유영은 억울한 일이 있거나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버럭, 화내지 못하는 여리고 착한 아이였다. 나는 늘 유영에게 되레 화를 냈다. 누군가에게 당하고 온 유영을 볼 때면, “거기에서 이렇게 했어야지! 걔를 몰아붙였어야지!” 하며 다그치고는 했다. 성인이 된 지금, ‘어른’이라는 호칭을 단 우리는 조금 달라졌다. 유영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은 할 줄 알게 됐고,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아끼는 방법을 알게 됐다.

유영은 취미가 많다. 뜨개질도 곧잘 하고, 카메라의 세계로 나를 입문시켜 주었으며, 늘 나보다 먼저 다양하고 좋은 노래를 찾아 들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유영이 내려받은 음악을 나에게 전달해 주었었다. 나는 자연스레 유영을 통해 새로운 노래들을 알아 갔다. 가을 방학, 페퍼톤스, ne-yo. 그 시절 그 노래들은 사실 나에게 추억이라기보다 유영이었다. 제빵도, 애니메이션도 늘 나보다 먼저 접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구축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유영이 부러웠다. 유영이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유영의 주위 사람들은 유영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보면, 자연스레 유영을 떠올리게 하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일상에서, 어떤 요소를 보았을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었다면 싶었다. 어쩌면, 유치원 첫날, 색종이를 따라 오리고팠던 마음이 여전한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유영은 자부심과도 같다. 인생에서 오래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것이라는데, 유영과의 관계를 떠올릴 때면 아무런 손 쓰지 않고 내가 성공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방증과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기 딱 좋은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상대들에게 상처받고 길을 헤매어도 결국 돌아갈 유영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난 오늘도 용기가 난다. 무지막지한 나의 편임을 알기에, 친구 그 이상의 관계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