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닻을 내린 우리

내가 기억하는 가장 또렷한 처음의 나는 우스꽝스러운 요리사 모자를 쓰고 남동생과 쿠키를 만들던 모습이다. 두 번째는 파마머리를 하고 머리띠를 쓴 승희와 함께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나다. 인생의 두 번째 기억을 함께 한, 짧은 20대의 인생의 절반을 넘게 같이한 승희는 내 손으로 만든 나의 가족이다.

인생의 두 번째 기억이 무려 7살 시절일 만큼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승희가 곧 잘 이야기하는 우리의 첫 만남도, 나는 그의 입을 통해서 들었을 때야 명확한 기억으로 바뀌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양쪽의 시력 차이가 큰 탓에 한 쪽 눈을 가리고 다녔다. 특이한 이름에, 통통한 외형에 한 쪽에 안대를 붙이고 다니는 여자아이는 남에게 못살게 굴고 싶은 장난꾸러기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꼭 해야 하는 호기심을 가진 아이였다. 첫 발걸음에 긴장을 할 만한 유치원의 첫 등교날도 마찬가지었나보다. 승희가 말해준 유영은 색종이 겉표지에 인쇄된 햄토리를 자르고 있었다. 그 색종이 어디서 났냐는 그의 물음이, 겉표지를 잘라 오려 붙이는 모습을 신기하고 멋지다고 생각해준 그의 마음이, 우리 우정의 시작이었다.

유치원생인 우리는 놀랍도록 공통점이 많았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았다. 태어난 날이 같았다. 둘 다 남동생이 있다. 그러나 미묘하게 다른 점 역시 많았다. 같은 동이지만 입구가 달라 세 입구 중 가장 왼쪽과 가장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각자의 집에 도착했다. 태어난 날은 같았지만 나는 양력, 승희는 음력으로 날을 셌고, 남동생이 있지만 나는 두 살 터울, 승희는 다섯 살 터울이었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며 같은 반이 된 적은 딱 한 번이었다. 모태신앙인 내가 오래도록 가고 싶어했던 미션스쿨 여중을 우리 모두 1지망으로 적었지만, 나는 2지망 학교에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역시 둘 다 외국어 계열 학교에 진학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다른 단과대였다. 놀랍도록 겹치는 우연 속에 사소한 차이를 두고 우리는 17년을 함께했다.

작은 흠은 언젠가 눈에 띄는 구멍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사소한 차이 역시 마찬가지다. 운명같은 우연을 수도 없이 가진 우리가 처음부터 꼭 들어맞는 친구는 아니었다. 나는 좋게 말하면 무덤덤하고 무난해 어디든 잘 어울리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관심사 외의 것에 주의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자세한 부분은 놓치고 만다. 천성이 세심하지 못한 나는 종종 승희를 답답하고 속상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 함께 미래를 계획하고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애정을 느끼고,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해주는 섬세함에 감동받는 승희는 나의 무던함에 곧잘 상처입곤 했다. 여느 초등학생이 그렇듯 그 나이의 나는 만나는 모든 또래와 쉽게 친구가 되었고, 또 쉽게 타인이 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 승희와 나는 특별한 관계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인생 경험치가 없었다. 흔히들 하는 말에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가 있지 않는가. 언제나 나보다 강하고 흔들리지 않을 듯 했던 승희가 울며 ‘너는 나를 소중해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이야기할 때, 인생 처음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일 년에 한 두 번씩은 서로에게 속상했던 일들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방법을 익혔다.

나도 모르는 장점을 알아봐주고, 너는 나의 자부심이라고 잊지 않고 말해주는 승희 덕분에 나는 나름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다. 진정한 친구 한 둘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미 승희를 둔 덕에 괜찮은 인생을 살고있다는 확신이 든다. 가끔은 마음이 방향을 찾지 못하고 떠돈다. 생각이 자욱해 길을 잃고 지향 없이 헤맬 때도 있다. 그러나 17년 동안 내린 닻 같은 나의 승희 덕에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온다. 노래방에서 한 시간을 놀아도 아쉬워 길을 걸어가며 흥얼거리는 우리의 엔딩곡, 맞잡지 않아도 따듯한 팔짱과 차가운 새벽 공기는 죽지 않고 나의 마음에 녹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나의 인생에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한딛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성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주고 받고 서로의 삶에 스며들 수 있는 일은 그 자체로 운명에 가깝다. 나 혼자서는 하지 못할 일들을 승희의 힘을 빌려 시작한다. 409의 첫 시작도 마찬가지다. 스쳐지나갈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보듬는 승희의 힘으로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을 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