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기대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런던

아래는 홀로 런던 여행을 하며 끄적인 글의 뭉치이다. 런던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첨부해 본다.

소풍 가는 전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나는 나의 기대가 버거웠다. 소풍 전날이니 ‘얼른 자야 할 텐데’ 하고 되뇌면서도 다음날 벌어질 모든 일들이 벅차게 기대가 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고 남은 유부초밥 귀퉁이와 한땀 한땀 심어 놓은 문어 소시지의 참깨 눈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이 났다. 나는 쉽게 기대하고 신이 나는 어린이였기에 기대에 잠 못 드는 밤이면 내가 덜 들뜨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많은 것들에 도전하고 실패하며 쉽게 기대하지 않는 습성을 갖게 됐다. 과한 기대는 결과로 말미암아 나에게 가끔 상처를 주었고, 안정감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은 현재의 나에게 기대는 경계의 대상이 됐다.

현재의 나는 2월부터 영국 웨일스의 수도인 카디프에 머무르며 6개월 간 어학연수를 하고 있지만, 여태껏 런던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이는 내가 이 나라에 융화되지 못하게 한다는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 인한 일종의 의무감과 함께 홀로 런던으로 떠나는 기차표를 끊게 됐다. 적절한 시기에 대한 고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당장 이번 주이기만을 바랬다. 지난해 여름,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경험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기에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나 보다 싶은 찰나였다. 그럼에도, 혼자 떠나는 티켓을 끊었다. 그것도 해외, 낯선 도시에 나 혼자서. 처음에는 그 곳에 있을 나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러나 날짜가 다가오자 그저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덮쳐왔다. 며칠이고 뒹굴거렸던 지난 날들인데도 말이다. 계획했던 것들을 실수인 척 뭉개고 침대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기에 런던 여행 역시도 그러고 싶었다.

내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왜 남들은 쉽게 기대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이 여행이라는 행위에 나는 이토록 무심한가. 예전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여행을 준비하고, 여행의 전날 밤을 지새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그렇게 억지로 몸을 일으켜 몸을 실은 런던 행 기차에는 유학을 준비하며 고르고 고른 책 중 한 권인 ‘여행의 기술’이라는 이라는 제목의 책과 함께였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지금, 기차 안에서 펼친 이 책은 함박웃음을 짓게 했다. 책에서 언급된 소설 의 주인공인 데제생트 공작은 런던으로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선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기차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와 더불어 런던에 대한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도 다가오면서, 데제생트는 권태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역까지 달려가야 하고, 짐꾼을 차지하려고 다투어야 하고, 기차에 올라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 누워야 하고, 줄을 서야 하고, 약한 몸에 추위를 느껴가며 베데커가 그렇게 간결하게 묘사한 볼거리들을 찾아 움직여야 하고..’

현재의 내 마음과 정확히 일치해서 위안을 얻었다고 하면 웃기려나. 런던행 기차에 몸을 실어 놓고서는, 런던으로 떠나기 싫다는 여행자의 이야기에 실망도 아닌 위안을 얻다니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감정인가? 그러나 나는 위안을 넘어 일종의 행운과도 같다고까지 여겨진다. 이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 중,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정확히 같은 마음으로 이 대목을 마주하는 행운의 순간을 만끽한 사람은 몇명이나 됐을까?

나는 기대를 하지 않는대도, 그것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공작’의 칭호를 가진 과거의 인물마저도 나와 같은 성가심을 느꼈다는 건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데제생트 공작은 당장 기차표를 취소하고 집에 틀어박혀 다시는 여행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당장 이 기차에서 내려서 집의 이불 속으로 돌아가지는 않지 않았는가? 모두가 기대하고 후회하며 실망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적어도 그보다 낫다는 일종의 자만심마저 느껴졌다.

또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고. 그 행복을 느끼는 시간 동안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용하게 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들이 형성된다고. 이는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한대도 그 역시도 괜찮다는 말로 나에게는 들렸다. 여태껏 나는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기대의 역치를 낮추고 무얼 하든 심드렁한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행의 시작이 이렇게 벅차도록 행복한데도 런던에 도착해서는 비가 와서 쫄딱 젖을 수도, 수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런던행 기차에서 나는 무언가를 기대할 힘과, 실망할 용기를 얻게 됐다.

이런 마음으로 도착한 런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멋진 시간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완벽한 시간은 아니었다. 늦은 저녁 홀로 다니는 아시아계 여성은 노숙인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에 위험했고, 비싼 돈을 주고 예약한 호텔은 도저히 그 가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실했다. 게다가 호텔 카운터에서는 인종차별마저 당했다. 그러나 나는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용하는 시간’을 몇번이고 느꼈다. 그 순간은 잠깐뿐이었고, 현실은 몇번이고 나를 그 시간에서 끄집어냈지만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시간마저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습관적으로 기대하고, 초연히 실망할 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