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무지개와 별을 바라보며 살기

3월 29일은 성 금요일, Good Friday 였다. 쉬는 날을 맞이해 영국에 함께 온 현정언니와 옥스포드로 여행을 떠났다. 옥스포드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유명하기에 비가 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우리의 기도가 통했을까, 옥스포드 역에 내린 직후에는 쨍쨍한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그러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현정언니와 나는 비를 피해 건물에 들어가 큼지막한 여행 가방 속을 뒤적거리며 우산을 찾아 펼쳤다. 건물에서 나오니, 아뿔싸 해가 나더라. 언니와 나는 폭소를 했다. 영국은 늘 이런 식이다. 아침에는 해가 쨍쨍하다가도 내가 길을 나서면 놀리기라도 하듯 하늘이 거짓말처럼 흐려지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우산을 사면 거짓말같이 해가 반짝 뜬다. 오늘은 해 대신 쌍무지개가 우리를 반겨줬다. 거짓말같은 풍경이었다.

무지개가 뜰 때 쌍무지개일 확률은 0.2% 에 불과하다고 한다. 무지개가 뜨는 100번 중 단 2번을, 그 극소수의 행운을 내가 누렸다는 생각에 벅차게 행복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몰려오는 생각들이 있다. 원인과 결과, 그리고 나의 시야. 당연하게도 비가 와야 무지개는 뜬다. 그러나 비가 올 때는 무지개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무지개가 뜨면 그제서야 행운이라고 느낀다. 비가 오는 시간에도 무지개를 바라보며, 무지개를 향한 과정임을 되새기며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된다.

옥스포드 시내를 한참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왔다. 구글맵에서 알려준 버스를 탔으나 버스 기사분이 이 버스가 아니니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라고 하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는 술인지, 마약인지 모를 것에 취한 여성분이 감자튀김을 먹으며 욕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겁을 먹었다. 10분에 2만원을 웃도는 택시를 탈 것인가, 숙소로부터 멀리서 내리는 버스를 타서 20분을 걸어갈 것인지 빨리 결정해야 했다. 지칠대로 지쳤기에,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가격을 생각하며 꾹 참고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에 버스가 섰고, 우리는 20분 가량을 숙소를 향해 걸어야 했다. 얼마 전에 함께 본 파묘 탓일까, 오들오들 두려움에 떨며 길을 걷다가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생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별을 바라보며 걷다, 언니와 별과 관련된 노래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크르르의 그림일기, D.O의 별 떨어진다, 잔나비의 10월에 든 생각. 벅차도록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내가 제대로 된 버스를 탔다면, 조금의 편리함을 위해 택시를 잡아 탔다면 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을 되짚어 보니, <여름의 빌라> 라는 책에서 읽었던 대목이 떠올랐다.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옥스포드 여행에서 마주한 무지개와 밤하늘은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이었다. 앞으로의 나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미래의 내가 이 글을 다시 읽게 된다면 동화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나는 이 날의 무지개와 밤하늘을 잊고 몇번이나 낙담하고 시니컬해지겠지만, 그때의 나를 위해 이 날의 순간들을 꼭 꼭 눌러 담아 기억해본다. 비가 내리면 무지개가 뜨고, 계획이 어그러진 뒤 밤하늘을 마주했듯 절망적인 순간 속에서도 무지개와 밤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어른이 되고 싶다.

Good Friday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