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409]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여름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자란 곳은 사면이 바다인 탓에 굉장히 습하다. 여름이 되면 습도는 배가 된다. 장마철이 다가올 즈음 엄마는 방에 제습기를 틀어놓고 빨래를 말린다. (엄마는 빨래가 덜 마른 꿉꿉한 냄새를 정말 싫어해 같은 티셔츠를 세 번이나 빤 적도 있음.) 이 외에도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타고나길 지성인 나는 여름철에 머리를 두 번씩 감거나, 드라이 샴푸를 들고 다닌다. 옷차림이 가벼워져 몸을 드러내야 하는 것도 싫다. 땀냄새가 날까봐 노심초사, 손수건을 들고다니며 땀을 닦기도 귀찮다. 아, 그리고 선크림 바르기는 언제쯤 습관이 될지 모르겠다. 실은 나는 불과 2 년전만 해도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싫어했다. 그러나 여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거부할 수 없이 좋은 순간들이 모여 싫지만은 않은 계절이 되었다. 여름의 좋은 구석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름은 해가 길다. 그리고 밤 공기가 신선하다. 가을부터 자취를 시작한 탓에, 성큼 다가온 여름을 허둥지둥 맞이했다. 겨우내 나의 분신 같았던 패딩부터 히트텍까지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한 여름의 가운데였다. 옵션인 에어컨만 사용하다보니 선선한 여름바람을 즐기지 못해서 아쉬웠다. 마음 한 구석엔 늘 선풍기를 키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위가 한 풀 꺾여갈 쯤 큰 마음을 먹고 선풍기를 샀다. 결과는... 대만족. 나는 여름에도 따수운 물로 샤워를 해야하는 ‘따샤파’ 인간이다. 뽀득뽀득 씻고 나서 화장실과 방 전체의 창문을 활짝 열면, 뜨거운 수증기는 나가고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온다. 공기들의 인사를 잠깐 만끽한 후, 선풍기를 강으로 틀어놓고 수건으로 쫌맨 머리를 풀어 탈탈 털어준다. 그 순간의 여름이 참 좋다.

“땀”이 나기 때문에 여름이 싫지만, 반대로 좋기도 하다. 여름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불그스름하게 익은 볼이 사랑스러운 이들. 흐르는 땀이 끈적해보이지 않고 건강해보이는 이들. 여름이 주는 생명력 있는 모습이 참 좋다. 땀이 흐른다는 건, 체내 온도가 올라갔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의 햇살을 받아 땀을 흘리는 게 정말 재밌게 느껴진다. 햇빛을 받아 온도가 올라가고 땀이 난다. 포유류가 하는 광합성 같은 느낌이 들어서 즐겁다. 이와 비슷하게 피부가 탄다는 사실도 즐겁다. 햇빛을 받아 피부가 그을린다는 것.. 굉장히 동물스럽지 않은가. 결국 인간도 햇빛과 같은 자연에게 영향을 받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어 재밌다.

청명한 하늘, 따스한 햇살,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초록 나무들. 벌레, 습함과 땀을 제외한, 관념적 여름이다. 1 년 전 중국 북경에 있었을 때, 이를 여름을 잔뜩 만끽하고 왔다. 북경은 건조하고 더운 날씨로 인해, 열사병을 정말 조심했어야 했다. 나는 여름의 습함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북경의 날씨가 싫지 않았다. 쨍쨍한 날에는 손으로 햇빛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이러다 정말 바싹 말라 쓰러지면 어떡하지? 싶은 순간에는 나무 밑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면 됐다. 물론 40도가 넘어가는 날에는 아예 외출을 할 수 없었지만, 그런 날엔 창 밖의 나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능소화, 온통 초록인 세상을 바라보면 절로 웃음이 났다.

어느 순간부터 유행하던 ‘…여름이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무리 마구잡이로 적은 문장이어도 마지막에 ‘여름’를 붙이면 그럴싸 해진다. 늦잠을 잤다. 일어나 요거트를 먹고 느즈막히 집을 나섰다. 여름이었다. 꽤 완성도 있어보이지 않는가? “마냥 아이 같다가도 결국은 어른스러운 계절. 여름은 적당한 것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코 끓게 만든다.” <아무튼 여름>의 한 구절이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온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 꾹꾹 참아왔던 것들이 폭발하는 계절, 기어코 무언가를 행동하게 만드는 계절. 그래서 마구잡이어도 괜찮은 계절. 여름이다

선풍기를 처음으로 개시했던 어느 여름 밤